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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 가라앉히기

by GIMIN

지금은 사라진 씨네코드 선재에서『아티스트』를 봤다. 무성영화를 보고 나서 계단을 올라갔다. 음악을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인사동까지 계속 걸어갔다.


걸어간 김에 좀 더 걷기로 했다. 종로 3가에 이르는 길은 가을바람으로 인해 눈부셨다. 미처 가지 않은 길에 대하여 이야기하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를 생각하기에, 내가 가고 싶은 길은 지나치게 많았다. 어디로 걸어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걸었다.


옛날엔 세운 상가 바로 곁에 있던 서울레코드에 들렀다. 조니 미첼의 앨범을 사고 싶었으나 마침 없었다. 나는 다시 걸어서 광장 시장까지 걸어갔다. 세운상가의 헛헛한 모습과 지금은 없는 금은방 건너편에서 종묘 앞 공원이 누렇게 물들고 종로 성당은 햇살을 받으면서도 마치 해시계의 탑침 마냥 우뚝 서있었다.


광장시장의 아케이드를 올려다보며 비린내와 국수 냄새와 기름 냄새를 지나쳤다. 유리로 만든 비커와 유리로 만든 실린더와 먼지가 약간 낀 현미경을 지나쳤다. 약사 두 것이 대기하고 있는 큰 약국과 종묘상을 지나쳤다. 멀리 흥인지문이 보였다. 두산 타워나 밀리오레나 동대문 DDP를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얼른 청계천 쪽으로 걸어갔다.


청계천은 여전히 낯설었고, 예전에 여기가 상가가 있었다는 생각과 회상과 느낌은 청계천의 와르르 물 흐르는 소리와 더불어 떠내려갔다. 우래옥과 을지면옥이 있는 거리를 지나치다 지나간 을지로는 아직 힙지로라는 이름이 붙지 않은 동네였고, 그래서 아크릴 제작 가게나 기계 공작소 같은 가게만 즐비했다. 그라인더나 전기톱으로 무언가를 가르고 써는 소리가 가을 하늘에 울려 퍼졌다.


나는 기어이 중소기업 빌딩까지 걸어갔다. 영화에 대한 여운은 가라앉고, 이제 다리도 아프기 시작했다. 을지로 3가 역으로 가기 위해 지하로 내려왔다. 지하에 있는 음반점과 분식집을 지나쳐서 벤치에 잠시 앉았다. 저 쪽이 명동이었던가. 한번 보고 싶었다.


대신 사옥이 없었던 시절인지라, 명동성당 가는 길은 수많은 건물들로 가득했다. 몇 년 뒤면 이 모든 건물이 사라질 것을 짐작하지도 못한 채 나는 골목을 걸었다. 명동성당으로는 가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보이지 않는 골목만 걸었다.


명동 예술 극장 근처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점심을 사 먹었다. 외국인들이 줄 선 곳에서 나만 한국인이었고, 주문을 받은 여자 아르바이트 생은 외국인의 말에 귀 기울이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표정을 찡그려야 했던 수고를 덜었다. 나는 빅맥 세트를 그 자리에서 해치웠다.


명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들렀다. 하나는 ‘부루의 뜨락’이라고 하는 음반사였고, 나머지 하나는 지하상가에 있는 음반사였다. 둘 다 들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지하상가에서 헌 책방을 발견하고 나는 박정대의 시집 한 권을 샀다.


신세계 백화점을 끼고돌아 남대문 시장까지 걸어갔다. 환전을 하는 가게도 지나쳤고, 귀금속을 사고파는 가게나 전당포도 지나쳤다. 갑자기 더 가고 싶지 않았다. 물집도 잡혔는지 한쪽 발이 불편했다. 나는 곧장 회현역으로 들어갔다. 영화의 여운을 만끽하는 동안 나는 세상이라는 영화 속을 온종일 쏘다닌 것 같았다.


집 근처의 역에 도착할 때까지 앉아서 눈을 붙였다. 전철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마치 필름 돌아가는 소리처럼 들렸다.(2024.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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