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9. 62-46-48
어쩌면 모든 추억은 머릿속에 제각기 따로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기억엔 경계가 없다. 때로는 한 기억이 다른 기억에 갑자기 틈입하고, 때로는 여러 기억이 함께 다른 기억들을 물들인다. 팻 매시니(Pat Metheny)에 대한 ‘동경’과 노란 대문을 그리는 ‘동경’이 결국 같은 자리에서 왔다는 점을 세심히 고백한 이 앨범은 세상 모든 추억을 한 아름 껴안을 정도로 너른 두 팔을 지녔다.
이 앨범은 오마주의 대상이 지닌 ‘권위’에 기대지 않았다. 대신 그 ‘오마주’를 통해 무엇이 피어났는지를 차분히 청자에게 들려줬다. 이 앨범의 모든 곡에 깃든 사운드는 악기 소리를 문득 잊은 채로, 귀 기울여 듣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나는 일요일 예배의 모든 풍경이 담긴 「엄마와 성당에」를 들을 때마다 잠시 신디사이저 연주를 잊는다. 「물고기들의 춤」을 ‘헤엄’ 치는 모든 악기 연주를 잊는다. (이 앨범에 맞게 다듬어서 다시 녹음한) 「함께 떠날까요」의 훅에서 합창이 들리는 순간, 이 곡의 베이스 연주는 그저 곡이 권하는 사려 깊은 권유를 가만히 지탱하는 손길로 거듭난다.
이 앨범의 수록곡은 특유의 고유한 정서를 (세련된 사운드를 기준 삼아) ‘편집’하거나 ‘윤색’ 하지 않았다. 「동쪽으로」와 「동경」을 짙게 수놓은 사운드는 「엄마와 성당에」에 등장하는 ‘키 작은 걸인’ 또한 넉넉히 다뤘다. 「노란 대문(정릉 배밭골 '70)」에서 ‘칠성이네 엄마’와 ‘할머니’ 또한 너그러이 담은 그의 태도는 이 앨범이 ‘맹목적’인 동경에만 골몰한 앨범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노란 대문(정릉 배밭골 '70)」의 끄트머리에 자리한 (김영석의 심벌 연주가 돋보이는) 후주 연주는 곡이 지닌 추억의 여운을 끝까지 멋지게 추적한 명연이었다.
조동익의 이러한 태도는 (팻 매시니[Pat Metheny]의 사운드를 오마주한) 프리 재즈를 한껏 머금은 곡에서도 드러났다. 「경윤이를 위한 노래」에서 베이스 지판 짚은 소리까지 그대로 살린 이 곡의 사운드는 베이스 현을 신중히 짚는 그의 태도를 (즉흥적인 뉘앙스와 현장감 어린 사운드와 더불어) 즉각 소리로 들을 수 있게 만든다. 이 앨범의 숨은 명곡인 「물고기들의 춤」에서 조동익의 플랫리스 베이스 연주 사이로 들리는 장필순의 보컬 또한 이런 그의 태도를 함께 대변하는 듯했다. (이 곡에서 그는 이 앨범이 누차 강조한 ‘춤’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한없이 밝은 빛만 있는 것 같은 이 앨범에도 물론 ‘현실’은 있다. 이 ‘현실’은 청자의 ‘수고로운 피로’와 직접 맞닿았다. 「함께 떠날까요」의 ‘권유’는 취기와 햇살 때문에 모든 게 ‘싫어질 때’라는 ‘현실’ 덕분에 더 깊이 몰입해서 들을 수 있다. 「혼자만의 여행」은 단순한 편곡 사이로 들리는 조동익의 목소리가 청자에게 조곤조곤 위로를 건넸기에 더욱 감동적으로 들린다. 그는 동경으로 시작한 이 모든 일의 끝에 ‘청자’가 있음을 음악으로 조곤조곤 고백한 셈이다.
이 앨범을 듣다가 문득 가지런한 자세로 심호흡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이 앨범은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그러나 내 몸에 분명히 있는 숨구멍으로, 푸른 하늘을 한껏 들이마셨다. 이 하늘이 날숨으로 새는 게 아쉬워서, 잠시 숨을 참고 싶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앨범이 그린 넓은 하늘을 조금이나마 닮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