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9. 16-21-38
「거리에서」의 학습된 (그러나 깊은) 슬픔과 「무전여행」의 풋풋한 (그러나 어설픈) 낭만 사이에서 머뭇거렸던 이들은 김창완의 도움을 받아 연주 세션을 모집하며 이 앨범을 만들었다. 이들은 그 이전서부터 이미 곡을 많이 만든 상태였다. (이들은 이 앨범의 수록할 곡을 정하기 위해 신중하게 ‘토론’했다.) 여태까지 그룹 이름조차 제대로 생각하지 못한 이들은 ‘동물원’이란 이름으로 (일종의 사회화를 거치며) 세상에 나왔다. ‘동물원’이란 이름에 대한 각자의 해석조차 달랐던 이들은 말 그대로 여러 대학에서 모인 대학생들이었다. 그러니 이들이 이 앨범에 어떤 목적을 추구했을 리가 없었다. 이 앨범은 그저 이들의 ‘기념’ 음반이었다. 에고(Ego)나 야심이 너무나도 없는 이 앨범의 음악은 어쩐지 이들을 쏙 빼닮은 듯이 들린다.
이 앨범은 이들이 품은 모든 조숙함과 모든 열악함을 동시에 긍정했다. 기억과 인생에 대한 고찰이 담긴 「잊혀지는 것」은 이들의 조숙함을 고스란히 대변한 것처럼 들린다.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은 사랑을 겪지 않은 사람의 초조함과 번민을 매우 적확하게 표현했다. 「지붕위의 별」의 건반 연주와 어쿠스틱 기타 연주가 어우러진 대목에서 ‘내 생각은 재미있을지도’ 모른다고 노래했던 유준열의 목소리는 풋풋하기 이를 데 없다. (김창완이 드럼머신으로 만든 드럼 사운드가 인상적인) 「귀 기울여요」의 ‘최선을 다한’ 보컬 하모니는 이들이 자신들의 음악을 정성 들여 불렀다는 점을 강조했다. 열악한 사정으로 인해 리버브를 거의 걸지 않은 이 앨범의 보컬 사운드는 의도치 않게 그 ‘정성’이 흩어지지 않게 했다. (물론 이 앨범의 열악한 조건은 김창완의 ‘배려’와 ‘줏대’와 ‘음악적 센스’가 아니었던들 무너지고 말았으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화려하지 않지만 누추하지도 않았던 이 앨범의 사운드는 이 앨범의 수록곡이 지닌 감수성에 합당한 당위성을 부여했다. (너무나 순진한 「비결」은 이 당위성의 혜택[?]을 고스란히 입은 곡이었다.)
이 앨범은 당대의 대중가요가 즐겨 사용한 클리셰를 (눈치 보면서) 꽤나 서툴게 다뤘다. 그러나 그 덕분에 이 앨범은 이들 스스로가 표출한 표현들이 더욱 빛났다. 김창기가 ‘작정’하고 만든 (김광석 보컬의 바이브레이션이 해당 곡의 리버브를 ‘보충’했던) 「거리에서」는 해당 곡의 소박한 사운드 덕분에 조금 더 진솔하게 들린다.「변해가네」를 부르는 박기영의 목소리는 어눌한 어투로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표현했기에, 도리어 곡의 ‘성찰’이 빛났다. 「어느하루」의 밝은 목소리는 스쳐 지나가는 것과 떠나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밝은 목소리로 표현했기에 더욱 서글프게 들린다. 단순한 발라드인 「그리움」을 ‘정직’하게 부르는 김창기의 목소리는 퍽 감동적으로 들린다. 순수하기엔 너무 자랐고, 때가 묻었다 말하기엔 너무나 순진했던 이 앨범의 ‘정직한’ 곡은 의도치 않게 기존의 한국 대중음악이 ‘남발’했던 감정과 말과 구도와 포즈를 모두 묵은 옷처럼 보이게 했다.
「여기서 우리」에서 들리는 엄숙한 ‘합창’은 잘하는 대목은 힘차게 부르고, 못하는 부분은 얼버무리며 부른 이들의 숫기 없는 노래들을 또 다른 의미로 잘 대변한 듯하다. (물론 폭압의 시대라는 ‘철창’도 충분히 이들의 음악에서 느껴지지만) 이 앨범의 ‘엄숙한’ 결론은 차라리 이들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며 내놓은 결론의 뉘앙스가 더 두드러진다. 이 앨범은 바로 그 점 덕분에 오늘날의 ‘철창’에 갇힌 우리들과 충분히 공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