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9. 55-32-34
헤비메탈이 아닌 다른 음악 장르는 듣지도 보지도 생각하지도 않겠다고 결심한 이들이 만든 듯한 이 앨범은 여러 다른 (부틀렉이 아닌) ‘버전’이 존재한다. 그러나 헤비메탈을 반드시 연주하고야 말겠다는 이들의 간절함만큼은 이 앨범의 모든 버전에 등장한 (숱한 시행착오와 어눌한 녹음 상태를 뚫고 나온) 디스토션 이펙터를 건 기타 연주로 선명히 드러났다.
이 앨범에 등장한 신대철의 모든 기타 연주는 (이 앨범의 ‘열악한’ 레코딩 환경을 감안해도) 확실히 뛰어났다. 단순한 곡 구성으로 인해, 헤비메탈의 사운드를 ‘쌓는’ 과정을 청자에게 차근차근 들려줬던 「크게 라디오를 켜고」는 이 앨범이 무엇을 만든 것인지를 우직하게 설명한 ‘결의문’이었다. 벌스(Verse)와 훅(Hook)에서까지 리프 연주를 고집한 신대철은 이 곡의 간주에 이르러 정교한 태핑 주법의 기타 연주를 내세우며 청자에게 확실히 고했다. 이 앨범은 하드 록 사운드가 아닌 헤비메탈의 사운드로 채워졌다고. 마지막 곡이자 숨은 명곡인 「하루해 마냥 떠나고」까지 고른 연주 실력을 유지한 그는, 이 앨범의 유일한 연주곡인 「1월」이나 훌륭한 록 발라드인 「그대 앞에 난 촛불이어라」에서 그의 비범한 서정성도 함께 입증했다.
박영배는 (앨범의 전반부에서도 훌륭한 연주를 들려줬지만,) 「잃어버린 환상」이나, 「아틀란티스의 꿈」, 「하루해 마냥 떠나고」와 같은 곡에서 상대적으로 좀 더 풍부한 베이스 연주를 구사하여 해당 곡들에 탄탄한 리듬을 부여했다. 그의 굳센 베이스 연주 솜씨는 「남사당패」에서 신대철의 기타 연주와 임재범의 에너지 넘치는 보컬을 단단하게 서포트했다. 필인 연주마저도 묵직한 강종수의 드럼 연주는 「아틀란티스의 꿈」의 복잡한 리듬 파트를 무람없이 연주하는 저력을 발휘하며 이 앨범 사운드의 ‘비트’를 확실히 책임졌다. 김형준의 키보드 연주는 무척이나 다채로운 구성을 지닌 「아틀란티스의 꿈」에서, 멤버들이 미처 챙기지 못했던 스케일과 디테일을 챙겼다. (하나의 주제를 거듭 연주하는 연주곡 「1월」에서도 그의 키보드 솜씨는 빛났다.)
임재범의 보컬은 이 앨범의 화룡점정이었다. 그의 보컬은 이 앨범의 사운드가 자칫 누락할 수도 있었던 중저음 파트를 안정적으로 보완하고 완성했다. 때로는 그의 보컬이 해당 곡의 사운드를 온전히 다 책임지는 대목도 이 앨범에서 많이 들린다. 「하루해 마냥 떠나고」를 부르는 그의 보컬은 곡의 속도에 걸맞은 필링으로 곡의 정서를 잘 표현했으며, 「잃어버린 환상」을 부른 그의 보컬은 곡의 처절함을 한층 배가시키며 해당 곡의 감성을 보충했다. 「아틀란티스의 꿈」을 드라마틱하게 부르는 그의 보컬은 왜 그가 당대의 보컬인지를 확실하게 증명하며 (해당 곡이 지닌 느슨한 구성에 일관성을 부여하며) 보완했다. 「남사당패」에서 내지르는 그의 보컬은 그 자체로 곡의 빈티지한(?) 사운드를 가득 채웠고, 「그대 앞에 난 촛불이어라」의 서정적인 멜로디에 무게감을 부여한 그의 중저음 보컬은 해당 곡의 완성도를 한껏 알차게 끌어올렸다. 「젊음의 로큰롤」에서 ‘그대’는 ‘진실한 음악’을 모른다고 외치는 그의 ‘일갈’에 쉽게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을 정도다. 이 앨범에서 그의 역할은 신대철 다음으로 지대했다.
한국 헤비메탈의 문을 활짝 열겠다는 자신감과, 헤비메탈의 소리를 사수하려는 처절함이 똘똘 뭉쳐 고체[Solid]를 이룬 이 앨범은, 한국 록이 새로운 소리가 깃든 영역에 비로소 첫발을 내디뎠다는 사실을 당대의 청자에게 확실하게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