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세 번째 보고 집에 돌아온 날, 책장에서 <유럽 낙태 여행>을 꺼냈습니다. 감독이 논란을 각오하고 연출한 장면 때문이죠. 영화 속 여성은 하녀 소피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난 후 묻습니다. "아이를 원하나요?" 아니라는 대답을 들은 그는 바로 소피의 임신 중단을 도와요. 영화를 잘 "기억"하기 위해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느꼈답니다. 책장에서 꺼낸 책은 서점에서 막 사들고 나온 것처럼 깨끗하군요. 재작년 가을에 사놓고 한 번도 읽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이렇듯 제 책장은 '깨끗한' 책들로 가득합니다. 서울에 살았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누군가는 어떻게 책을 파리로 다 들고 가냐고, 집에 놔두거나 알라딘에 팔라고 했죠. 또 누군가는 책을 새로 사기 전에 있는 책이나 다 읽어야 한다고도 했어요. 그때마다 아유 네네 그렇죠 그래야 하는데… 라며 엉성하게 웃었지만 제 맘 속엔 다른 생각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언젠가 이 책들이 내게 올 거예요. 읽어야만 할 때가 있을 거예요.
책장의 다른 칸들도 들여다봤습니다. 지금 내게 오는 책들을 꺼내기 시작했어요.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 씨네마떼끄에서 10년 만에 만난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에게 영감을 준 책이죠. 앨리슨 벡델의 <펀 홈>, 파리한국영화제에서 다시 본 <벌새>의 김보라 감독이 추천한 그래픽 노블. 역시 그래픽 노블인 <피카소>, 피카소미술관에서 조용히 앉아 있을 때마다 생각났네요. 홀로코스트의 기록 <삶은 계속된다>, 마레지구에 있는 쇼아기념관을 다르게 이해하고 싶었어요. 머뭇거리다 사무엘 베케트의 책 2권도 꺼냈습니다. 오로지 북디자인에 홀려 샀기 때문에 읽을 생각은 애초에 없었지만… 몽파르나스 묘지에서 베케트의 단정한 무덤에 반했는데 시도라도 해봐야 할 것 같아서.
종이책은 여기까지군요. 리디북스에 로그인했습니다. 6년 전 특가 이벤트에 휩쓸려 사놓고 한 권도 읽지 않은 세계문학전집이 보이네요.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을 먼저 골랐습니다. 16구에 있는 '발자크의 집'에 갔을 때, 여기 너무 좋다며 직원에게 방정을 떨었군요. 다음은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씨네마떼끄의 뱀파이어 특별전을 계속 보고 있거든요. 라쥬 리 감독의 영화 <레미제라블>이 인상적이었으니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도 골랐습니다. 요즘 자주 걷는 벨빌이 배경인,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도요.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를 마지막으로 골랐어요. 퐁피두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프랜시스 베이컨 특별전 때문이죠. <오레스테이아에서 영감을 받은 삼면화> 앞에 오래 있었지만 제게 오지 않았습니다. 읽고 나서 다시 그림을 보고 싶었어요.
500권이 넘는 종이책을 파리로 가져오며 비용이 아깝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오래 살아야 하기에 안정된 느낌의 공간이 필요했고, 제게 편안함을 주는 물건은 책이니까요. 좋은 책으로 가득한 책장은 훌륭한 인테리어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가끔은 어떤 책부터 읽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출간일 순서로 읽어볼까? 생각하며 1992년에 소담출판사에서 나온 <회색노트>(로제 마르탱 뒤 가르)를 펴 들기도 했지만 곧 이 작품이 프랑스에선 1922년에 나온 걸 알고 담배를 물었죠.
이제 저는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책부터 읽어야 한다는, 그런 규칙은 없다구요. 그러한 규칙과 방법을 말하는 사람을 경계한다구요. 앉아서 영화를 관람하고 일어서 그림을 바라보다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면 책장에서 노크 소리가 납니다. 오랫동안 쉬고 있던 책들이 저를 부르고 있어요, 자기를 읽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