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um Jan 17. 2020

땅은, 언어에 앞선다


"땅은 언어에 앞선다. 언어 이전에 땅이 있다."


정수복, <파리를 생각한다> 30쪽. 이 문장을 오래 들여다본 다음날부터 저는 걷기 시작했어요. 목적도 계획도 없이, "마음 내키는 방향으로 파리를 걸어 다니고 나서 저녁에 집에 돌아와 그날 걸어 다닌 길의 위치를 (…) 확인하고 파리의 다른 길들과 어떻게 연결되는가"(148쪽) 알아봤죠. 걷다 지치면 평소 이용하던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타면서 길을 바라봤어요. 점차, "파리의 지도 위에 뚝뚝 떨어져 있던 일련의 지하철역의 검은 점들이 지상에서 밝게 연결"(37쪽)되기 시작했네요.


⁣⁣⁣⁣⁣⁣⁣⁣⁣⁣⁣맞아요, "대부분의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사회에서 할 일 없이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며 걸어 다니는 

사람은 나태하거나 위험한 인물"(63쪽)이 되지요. 하지만 걷는 일은, 이방인인 제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열심히 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인 걸요. 서서히 저는 "특별히 살 물건도 없으면서 상점의 진열장을 들여다보고 특별히 살 책도 없으면서 서점에 들어가서 이 책 저 책의 책장을 넘기는 사람"(77쪽)으로 변했군요. 5구의 무프타르 거리Rue Mouffetard에서 14구의 들렁브르 거리Rue Delambre까지 걸으며, "파리는 단수(pari)가 아니라 복수(paris)이다. 각각의 동네에는 그곳 특유의 역사적 분위기와 생활의 리듬이 느껴진다"(100~101쪽)는 문장을 떠올리는 산책자로요.


⁣⁣⁣⁣⁣⁣⁣⁣⁣⁣⁣파리지앵도 아니면서 파리를 걷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일이 쑥스럽다고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경주 사람들이 불국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파리를 사랑한 프랑스 사람들 가운데는 파리가 아닌 프랑스 지방 출신의 사람들이 많다"(113쪽)는군요. 보르도 출신의 몽테뉴와 브장송 출신의 빅토르 위고처럼 "파리는 파리 사람들의 파리이지만 그와 동시에 이방인들의 파리"(같은쪽)라는 사실이 제 발걸음에 힘을 주었죠.


⁣⁣⁣⁣⁣⁣⁣⁣⁣⁣⁣여행자들이 루브르와 개선문을 둘러보며 파리를 찬탄하는 건 쉬운 일입니다. 여기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음산한 날씨나 더러운 거리 등등 지금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단점을 꼽으며 파리를 불평하는 것 또한, 실은 쉬운 일이지요. 이 책의 저자는 매우 어렵고 놀라운 길을 걸었습니다. 파리의 대로와 골목길 곳곳을 7년 동안 걸으며 쌓은 넓은 지식과 깊은 사유로 독자에게 파리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거든요. 책을 읽고 파리를 걷는 제게 아래의 문장이 더 이상 호들갑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입니다.


⁣⁣⁣⁣⁣⁣⁣⁣⁣⁣⁣"파리는 강과 언덕, 길과 광장, 집과 가로수, 광고탑과 분수대, 궁전과 백화점, 오페라와 호텔, 버스와 자전거, 성당과 학교, 운하와 기차역 등 수없이 많은 부분들이 독특한 방식으로 결합되는 거대한 교향악이다."(191쪽)

작가의 이전글 깊이 있게 웃기는, 마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