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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um Jan 14. 2020

깊이 있게 웃기는, 마법


"남편을 놔두고 바람을 피울 수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바람을 피우란 말이야?(Si on ne peut plus tromper son mari avec son mari, où va-t-on ?)⁣⁣⁣⁣⁣⁣⁣⁣⁣⁣⁣"


외도를 일삼는 중년 여성 마리아의 속마음입니다. 세 번째 보고 나서야 이 대사를 잡았어요. <마법에 빠졌어요(원제 Chambre 212)>에서 키아라 마스트로야니가 연기한 마리아의 이 말은, 박찬옥 감독이 2003년 만든 <질투는 나의 힘>에서 문성근이 연기한 문학잡지 편집장의 말과 같은 맥락에 있네요. "부인한테도 잘하고 애인한테도 잘하면 되지. 바람 안 피우고 부인한테 못하는 남편보다 그게 백배 더 낫다."⁣⁣⁣⁣⁣⁣⁣⁣⁣⁣


⁣배우자든 애인이든, 상대를 속이고 다른 이와 관계를 갖는 상황. <질투는 나의 힘>에 깔린 정조는 어둡고 불길하지만 <마법에 빠졌어요>를 보는 관객들은 우울해지거나 탄식할 틈이 없답니다. 남편과 다툰 후 집을 나와 맞은편 호텔 212호실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는 그에게 크리스토프 오노레 감독이 부리는 마법 때문이죠. 청년 시절의 남편, 남편의 예전 애인, 마리아 자신의 '의지', 급기야 마리아가 바람을 피운 수많은 남자들이 차례로 212호실 문을 열고 들어와요. 유쾌한 난장판이 지나가고 날이 밝았을 때, 그는 이전과 조금 다른 생각을 하지요.


⁣⁣⁣⁣⁣⁣⁣⁣⁣⁣⁣처음 영화를 봤을 때 프랑스적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이제 그 생각을 바꿉니다. 이 영화는 몽파르나스적인 것 같아요. 비록 몽파르나스 가 본 적이 손꼽을 정도로 적어서 자판을 두드리는 제 손가락이 없어지고 있지만… 영화가 의도적으로 계속 등장시키는 극장과 호텔과 바를 찾아보다 알았거든요. 모두 한자리에 있었어요. 파리 14구 몽파르나스, 들렁브르 거리(Rue Delambre).


⁣⁣⁣⁣⁣⁣⁣⁣⁣⁣⁣직접 찾아가 걸어보니 분명해졌죠. 영화가 예쁜 장소 군데군데를 따다 편집한 게 아니라 이 거리를 그대로 담았다는 사실이. 프로그래밍이 좋다고 소문난 극장 '7 Parnassiens'는 호텔 'Lenox'와 마주하고 있었고, 호텔 옆에 영화 속 인물들이 모두 모이는 바 'Rosebud'가 있었어요. 영화 속 풍경 그대로인 거리에 서서 잠시 아찔해졌습니다. 이 거리랑 친하게 지내며 몽파르나스적인 게 어떤 건지 알고 싶다 생각했네요. 자주 걸어야겠어요… 걸을 수만 있기도 하지요. 부동산 사무실에 붙여진 월세 가격이 상상을 초월하더라구요.


⁣⁣⁣⁣⁣⁣⁣⁣⁣⁣⁣내 맘대로 꼽는, 그리하여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저의 '2019년의 영화'는 이미 다른 작품(<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영화도 못지않게 좋아요. 왜 그럴까 고민해보니 제 취향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인데, 가볍고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는 작품을 만났을 때 저는 사랑에 빠져요. 이 글을 쓰면서 영화의 한국어 제목을 알기 위해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에 들어갔습니다. 영화 소개에 감독의 말이 인용돼 있었죠. "깊이가 있으면서 가벼울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대단한 거다." 맞아요, 정말이지, 그렇게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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