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포 선셋>이 시작되기 전,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러 들어온 에단 호크는 제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전날 <보이후드> 무대인사에서 그가 앉은 곳을 기억한 제가 근처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죠. 같이 들어온 링클레이터 감독이 촬영 당시를 회상했어요. "아름다운 여름이었죠. 셰익스피어앤컴퍼니 서점, 라탱 지구, 노트르담 성당, 센강… 파리는 영화를 찍어야 마땅한 도시였고요. 하지만 에펠탑은 찍고 싶지 않았네요." 폭소와 함께 박수가 터졌습니다.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회고전. <비포 선셋>을 관람하는 파리의 관객들이 가장 크게 웃었던 순간은, 카페에서 줄리 델피의 셀린느가 에단 호크의 제시에게 "파리 사람들 뾰로통해. 프랑스 남자들은 정말 짜증나구"라며 불평하는 씬이었어요. 셀린느와 제시의 유쾌한 수다에 저도 많이 웃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자주, 마음이 따뜻해졌네요. 쿨레 베르트 산책길에서 셀린느가 "예전엔 더 순수했지만 세상을 보는 시각은 지금과 똑같아. 난 통 안 변하나 봐"라며 미소 지을 때. 센강의 유람선 위에서 셀린느가 "아무도 쉽게 잊은 적 없어. 누구나 저마다의 특별함이 있거든"이라고 고백할 때. 제시가 차 안에서 불행한 결혼생활을 토로하자 셀린느가 그를 안으려 손을 뻗다 머뭇거릴 때… 어머 감동한 부분이 왜 다 셀린느일까요?
영화가 끝나고 에단 호크가 다시 들어왔습니다. 바로 관객들의 질문을 받기 시작했어요. 40분 정도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에서 마지막 질문이 뭐였는지는… 모르겠네요. 관객의 프랑스어를 통역가가 에단 호크에게만 동시통역했거든요. 하지만 답변하던 에단 호크의 이 말은 제 귀에 들렸지요.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도 아니고, 우리가 정체화한 젠더도 아니며, 우리의 피부색을 결정짓는 인종도 아닙니다." 그는 이어 말했죠. 우리 모두는 각자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기만의 본질essence을 간직하고 있다고.
프로그램 종료 후 그는 상영관 앞에서 팬들과 사진도 찍혀주고 사인도 해줬어요. 저 또한 사인을 받은 후 얼떨떨한 기분으로 지하철 역으로 가는데… 앞에서 그가 다시 보이더군요. 퐁피두센터를 나온 그는 수행 기사도 경호원도 없이, 파리의 밤거리를 자신의 친구들과, 마치 <비포 선셋>의 한 장면처럼, 걷고 있었어요. 르나 거리Rue de Renard를 내려가다 이내 리볼리 거리Rue de Rivoli로 꺾었지요. 샤틀레 광장에서 저의 동선은 그와 갈라졌습니다. 경쾌하게 걸어가는 에단 호크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봤습니다. 그가 사람들 사이로 섞여 사라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