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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순 Jul 27. 2023

좌충우돌 코카서스 및 터키 생존기

좌충우돌 코카서스 및 터키 여행기

             코로나로 인해 4년동안 못나갔던 해외여행을 드디어 나가게 되었다. 약 한달동안의 여행을 계획하고, 코카서스 지역과 터키를 여행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 12시까지 밀린 일을 마감하고 자리에 누우니 가슴이 설레어 잠이 오지않았다. 뜬 눈으로 새다시피하고 새벽에 일어나 짐보따리를 쌌다 풀었다를 한시간 이상 되풀이했다. 어떤 것을 가방에 넣어야 요긴한지, 어떤 것이 혹시 쓸데없는 짐이 되지않을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마침내 26인치 캐리어에 옷을 집어넣고, 배낭을 둘러맸다. 계획했던 지역은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터키였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은 가지못했다. 그 이유는, 항공 티켓은 마일리지 항공권이라 제약이 많았고, 또한 아르메니아-터키,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과의 관계가 나빠서 4개국을 원활하게 돌기에는 시간상, 금전상 제약이 많아서 결국 아제르바이잔은 빼놓게 되었다.  카자프스탄 알마티를 거쳐서 아제르바이잔 바쿠에 먼저 들어가야만, 아제르바이잔 바쿠 - 조지아 트릴리시 – 아르메니아 예레반 – 조지아 트빌리시 – 조지아 보르조미 – 조지아 쿠타이시 - 조지아 바투미 – 터키 트라브존 순서로 원활하게 둘러볼 수 있었으나, 내게는 이런 정보들이 부족했으며, 일단 트빌리시로 입국하면, 원하는 4개국을 둘러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조지아에서 아제르바이잔으로 가는 국경을 막아놓은 이래 아직까지 열어놓지않았다.  아제르바이잔쪽에서는 조지아로 들어가는 육로는 개방해놓았다고 한다.  관광버스를 타고 아제르바이잔에서 조지아로 넘어온 관광객들로부터 들었다.  우선 조지아 여행기부터 풀어나가려고 한다. 


조지아 

             2023년 5월 31일 밤 12시까지 고객으로부터 받은 일감을 간신히 마무리하고 아침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아시아나 마일리지 좌석을 신청한지 3일만에 가까스로 독일 뮌헨을 거쳐서 조지아 트빌리시까지 가는 좌석을 얻게 되었다.  뮌헨에 입국하는 순간부터 좌충우돌 여행이 시작되었다. 인천에서 오전 11시 40분에 출발하여 뮌헨에 현지시간 17시 40분에 도착하였고, 뮌헨공항에서 약 4시간 40분을 대기했다가 현지 시간 22시 20분에 트빌리시로 떠나는 스케쥴이었다. 공항 바깥으로 나갈 시간은 안되어 눈을 좀 붙이려고 했다. 환승구역을 둘러보니 누울 수 있도록 만든 긴 의자 4개가 있었다. 기내에서도 가슴이 설레서 잠을 못잤으니 잠깐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떤 영감이 옆 의자에서 독일말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번듯하게 누워서 수다스런 아줌마와는 비교도 안될만큼 휴대폰으로 쉬지않고 쏼라대는데 도대체 눈을 붙일 수 없었다. 장장 1시간을 떠들어댔다. 참다못해서 그 영감에게 눈을 좀 붙여야겠으니 조용히 해달라고 했더니 그때서야 자리를 떴다. 영감이 자리를 뜨고나서 비로소 꾸벅꾸벅 졸았다. 눈을 떴는데, 22시 05분. 아뿔싸 탑승시간 15분전. 무릎이 아프다는 사실은 까먹은채 그 넓은 공항을 뛰어서 간신히 트빌리시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장장 19시간을 비행한 끝에 마침내 조지아 트빌리시에 입국하게 되었다.   


조지아 도착 첫째날 기절초풍 러브호텔

             트빌리시에 도착하기전에 숙소를 먼저 정하는게 여행의 첫순서인 것 같아서 집에서 북킹닷컴을 통하여 Mkerav Hostel(므케라브 호스텔)을 첫 숙박지로 예약했다.  대금은 현지에 도착하면 지불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트빌리시 시내 도미토리(여럿이 같은 방에서 각자 침대 하나씩배정)는 1인당 20라리(약 10,000원)였으나, 예약한 이 호스텔은 화장실과 욕실은 비록 같이 쓰지만, 개인실을 쓴다는 명목으로 27라리를 주고 예약을 했다. 트빌리시 공항에 아침에 도착하여 공항내에서 우선 환전을 하고(1라리는 약500원), 심카드를 샀다(일주일 무제한 데이터 45라리=23,000원). 간단한 영어 한마디 통하지않는 조지아 사람들에게 구글 지도를 보여줘가며, 므케라브 호스텔로 가는 교통편을 물어물어 변두리에 위치한 이 숙소에 도착하고보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도착한 호스텔은 판자촌과 다름없었고, 침대는 푹 꺼져있고, 방에는 문고리 조차도 달려있지않았다. 더군다나 도로변에 붙어있어서 차량들 지나다니는 소리도 들렸다. 그렇지만, 일단 예약한 호스텔을 취소하고 돌아간다는 것은 예의상 안될 것 같아 하룻밤만 지내리라 생각했다. 집을 출발한지 24시간동안 닦지못했으니 우선 샤워라도 하고 싶어서 숙박비를 건네려고 했더니 기다리라고 한다. 그럼 우선 샤워를 해도 괜찮냐고 했더니 허락했다. 그래서 샤워하고 나오니 어느덧 낮 12시가 넘어갔다. 이번에도 숙박비를 지불하겠다고 했더니 기다리란다. 호스텔 주인들은 먼저 숙박비부터 내놓으라고 하는데, 참 이상하네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바깥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겠으니, 그동안 문고리를 달아놓으라고 부탁했다. 간단한 영어 한마디도 통하지않으니, 이 사람의 휴대폰으로 조지아 말을 다시 영어로 번역하는 2중 번역을 통해서 간신히 의사소통을 하였다. 자신의 가족들은 다른 도시에 살고 있으며, 자신은 조지아 정교 신학생이며, 후배 신학생들을 돌보는게 임무라고 했다. 점심은 숙소로 들어오는 길에 발견한 까르프 푸드 코너에 가서 먹고 주인장 양말도 한 켤레 사다주려고 했다. 주인장 수염이 더부룩하니 정확한 나이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약 30대 후반 정도로 추측되었다. 양말은 발가락이 숭숭 뚫어져있어서 대체 이 사람의 직업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 이전에 어떠한 숙박객을 받은 경험도 없어 보였다. 만약 내가 이 숙소의 첫손님이라면 더욱 더 숙박을 취소할 수가 없었다. 

             점심을 먹으러 까르푸에 갔으나, 우리나라 시골 슈퍼마켓보다 못했다. 레스토랑도 없었고, 양말도 없었고, 물론 푸드 코너도 없었다. 워낙 배가 고파서 빵을 하나 사서 까르푸 계산대로 갔으나, 3대의 계산대 앞에는 이미 열댓명의 손님들이 줄을 서있었지만 계산기가 고장나서 3대가 줄줄이 멈춰섰다. 손님들은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는 10분을 기다려도 계산기가 작동되지않는 것을 보고 그냥 빵을 내던지고 나와버렸다.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골목에 가게가 보여서 그곳에서 감자 8알을 800원주고 사가지고 나왔다. 숙소 주방에서 감자 5알을 소금넣고 삶아먹었다. 조지아에 와서 첫 식사가 삶은 감자라니, 그런데 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주인장의 친구가 들어오더니, 숙박비를 달라고 했다. 그래서 27라리를 건넸더니, 이 금액이 아니라고 한다. 아니 북킹닷컴에서 분명히 27라리라고 하지않았느냐라고 했더니, 당신이 내일 아침에 체크 아웃한다고 했으니 24시간 이용하는 요금으로 54라리를 주어야하며, 만약 지금 체크아웃한다면, 11시간 이용 요금으로 27라리를 주어야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너무 화가나서 그들이 알아듣던말던 쏘아부쳤다. 당신들 지금 러브호텔 운영하니? 나 지금 체크아웃할 것이며, 돈은 한푼도 줄 수 없다고 소리쳤다. 아마도 그들이 보기에는, 나이든 여자가 혼자 여행하니, 피곤할텐데 감히 우리 숙소를 나가겠느냐고 생각했겠지만, 요즘이 어떤 세상인가? 휴대폰만 있으면, 숙박업소 요금도 각종 사이트에서 검색해볼 수 있으며, 구글 지도를 보고 이 세상 어디라도 찾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저들만 모르는 모양이다. 


       북킹닷컴을 통해 예약한 첫 숙소              Mkerav Hostel(므케라브 호스텔)

 

             조지아에 와서 아주 씁쓸한 첫 경험을 하고, 다시 숙소를 검색하여 한국 젊은이들이 많이 간다는 파브리카 호스텔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하지않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거리를 캐리어를 끌고 파브리카 호스텔로 직접 찾아갔더니, 카운터 아가씨가 20라리 하는 숙박비를 38라리 내놓으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 인터넷에서 20라리하는데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갑자기 객실이 다찼다고 변명한다. 그래서 다시 인터넷을 검색하여 글로벌 호스텔로 갔다.   20라리를 주고 하룻밤을 묵었다. 글로벌 호스텔이 위의 파브리카 호스텔보다 규모는 작지만, 더 깔끔하고, 위치도 더 좋으며, 주인장은 필리피노로 친절하였다. 


둘째날 보석이 가득박힌 대성당

             아침 일찍 길을 나서 트빌리시 성 삼위일체 대성당을 둘러보았다. 1989년 설계되어 2004년 11월에 완공된 성당이다. 성당의 돔 지붕과 그 위에 세워진 십자가는 모두 금으로 덮혀있다고 한다.  성당 안의 각종 성화나 성모상, 성인성녀상 역시 온갖 보석이 박혀있었다. 소련으로부터 독립후 모두다 국민의 자발적인 헌금으로 세워진 성당이라 한다. 성당을 둘러보고나서 케이블카를 타고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산을 올라갔다 내려왔다. 트빌리시 시내를 돌아다닐 때 이용한 교통수단은 지하철이었다. 일단 지하철 카드를 2라리 주고 산다. 이 카드에 하루에 1라리씩 충전하면, 하룻동안은 시내버스나 지하철을 무한정 이용할 수 있다. 트빌리시 지하철은 참으로 인상깊었다. 지하철 역의 개수는 20개가 채 안되었고, 승강장은 지하 50미터는 족히 되었으며, 70도 각도의 에스컬레이터가 빠른 속도로 내려가면서 오래된 강철 계단끼리 서로 마찰하는 소음은 아주 요란해서 공포스럽기까지했다. 노인들은 지하철을 못탈 것 같다. 물론 엘리베이터는 없다. 하기사 수명이 짧은 나이든 노인들이 별로 눈에 띄이지않았다


지하철 내려가는 계단


                                        트빌리시 전철 노선도

삼위일체 대성당 출입구


삼위일체 성당 진입로


째날 봉고차 마쉬로카 타고 므츠헤타로 

             트빌리시 시내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므츠헤타에 있는 스베티츠코벨리 대성당을 찾아가는 여정에 나섰다. 숙소가 있는 마쉬란제역에서 전철을 타고 시외버스가 출발한다는 디두베역 터미널에 갔더니, 눈을 씻고봐도 제대로된 버스는 안보이고, 조지아 각지로 출발하는 아주 오래된 봉고차들이 모여있었다. 이 봉고차를 조지아 사람들은 ‘마쉬로카’라고 부른다. 터미널에는 우리나라 옛날 시골 장터인 포장도 안된 질퍽거리는 바닥위에 마쉬로카들이 모여있다. 므츠헤타까지 요금은 4라리. 한국에서부터 스베티츠코벨리 대성당에 대한 거대한 환상을 품고 갔다. 이곳에 가면 예수님이 입으셨던 로브가 지하에 있다고 했으니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성당에 들어갔더니 성당 출입구에서부터 팔다리가 심하게 일그러진 장애인이 구걸을 하고 있었다. 한국 같으면, 성당 밖에서는 몰라도 미사를 드리는 성당 출입구앞에서 구걸을 하게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부님도 장애인에게 자선을 베풀라고 곁에서 독려하고 있었다. 혹시 장애인을 통해서 경제적인 이득을 바라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더욱더 이해못할 것은, 예수님이 입으셨던 로브를 실제 볼 수 없었다. 조지아 전역을 돌아봐서 느낀 사실이지만, 조지아는 많은 성인성녀를 배출한 곳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전설의 고향처럼 스토리텔링을 만들어서 홍보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신부님께 예수님이 입으셨던 로브를 보고싶다고 했더니, 자신은 영어를 못한다면서 대답을 회피했다. 이 성당 뿐만 아니라, 조지아 어느 유적지를 가더라도 영어로 된 설명문은 하나도 없었다. 실망을 가득 안고 바위산 꼭대기에 있는 즈바리 수도원으로 향했다. 545년경에 ‘즈바리의 작은 교회[Small Church of Jvari]’라는 이름으로 교회가 세워졌으며, 4세기 초 성녀 니노[Saint Nino]가 세운 나무 십자가가 큰 기적을 행한 수도원으로 1500년동안 수도원 건물이 유지되고있다고 한다. 스베티츠코벨리 대성당에서 산꼭대기를 올려다봤을때는 금방 올라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최소한 2시간 이상 올라가야한다고 한다. 무릎만 안아프면 어떻게든 걸어서 올라가겠지만, 할 수 없이 20라리를 주고 택시를 탔다. 원래는 5라리를 깎아서 15라리에 가기로 했지만, 차량으로 수도원 올라가는 길은 산을 빙글빙글 돌아서 가야하니 약 15분~20분이 걸렸다. 수도원 정상에서 1시간을 기다렸다가 다시 원래의 지점으로 데려다 주는 비용이라서 미안해서 원래 요구했던 20라리를 다 주었다. 즈바리 수도원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신부님도 돈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평일인데도 관광객은 좀 있는 편이었는데, 관광객이 수도원안을 한바퀴 돌고 나가면, 젊은 신부님이 반드시 헌금함을 들여다보았다. 

스베티츠코벨리 대성당 입구


                                                        스베티츠코벨리 성당 돌담

스베티츠코벨리 성당 내부 (지하에 예수님 로브가 모셔져있다고 뻥칭)
조지아 설명문을 이해못해서 미안합니다.  

                                                                                        즈바리 수도원

                                                        수도원내 성녀 니노 기념비


넷째날 카즈베기 

            아침 일찍 다시 전철타고 디두베역으로 가서 마쉬로카를 타고 카즈베기로 향했다. 약 200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3시간 걸렸다. 마쉬로카 요금은 15라리. 고속도로는 없었고, 국도라고 해봤댔자 2차선 도로였다. 다행히 차량은 많지않아 차량 정체는 일어나지않았다. 카즈베기에 오후 2시쯤 도착했다. 조지아 첫 숙박지인 Mkerav Hostel(므케라브 호스텔)에서 실망을 했기 때문에 숙소를 미리 예약하지않고, 인터넷에서 숙소 검색만 하고 직접 숙소를 찾아가서 확인한 다음에 정하기로 하였다. 욕실과 화장실은 공용이지만, 개인실을 사용할 수 있는 숙소를 27라리 주었다. 숙소는 약간 언덕빼기에 있었고, 도로에서 올라가는 길은 자갈길이어서 캐리어를 밀고 올라가기가 힘들었지만, 도착하고보니 게르게티 트리니티 교회가 올려다보이는 조용한 숙소였다. 숙소 여주인이 여러날 묵은 옷가지들도 세탁해주었다. 카즈베기는 시골중의 시골이었다. 그렇지만 이곳의 물가는 트빌리시의 2배 이상이었다. 조지아 전통 빵도 트빌리시에서는 1라리인데, 여기서는 관광객들에게는 4라리를 받고 있었다. 


다섯째날 게르게티 트리니티 교회 (사메바 성당)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를 속여 꺼지지않는 불을 훔쳐서 인간에게 준 죄로 3천년동안 묶여서 잔혹한 형벌을 받았다는 전설이 깃든 카즈베기산에 위치한 해발 2,170m의 높은 언덕 꼭대기에 서 있는 교회를 이번에는 걸어서 올라가보기로 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내 무릎이 다음 기회를 허용할 것 같지 않아서였다. 일반 사람들은 2시간이면 올라간다는 산을 4시간 걸려서 올라갔다. 올라가는 도중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워낙 높은 산이라 나무가 없어서 비를 피할 곳이 없었다. 올라오는 도중에 너무 힘들어하니 핸섬한 청년이 올라가는 것을 도와주었다. 어느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보니 러시아인이라고 한다. 올해 26살. 조지아에 와서 느낀 것이지만, 코로나 이전에는 세계 어디를 가나 중국인이 부쩍댔다. 그런데 지금은 조지아 거주 중국인이 아니라면 순수한 중국 여행객은 눈에 띄이지않았다. 일본인을 비롯해서 한국인 여행객도 드물었다. 그날 교회를 올라가는 동양인은 내가 유일했다. 현재 트빌리시 시내를 비롯하여 조지아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외국인의 80%는 러시아 젊은이들이었다. 이후에 간 아르메니아에서도 여행객의 80%는 역시 러시아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젊고 스마트하고 금전적으로 유복한 자들로서 징집을 피해서 피난왔다. 푸틴은 왜 전쟁을 일으켜서 국익을 헤치고 있는가? 우선 영어를 할 수 있는 젊은이들은 이미 징집을 피해서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독일로 건너갔다고 한다. 조지아에 머무는 러시아 젊은이들은 사업 유지를 위해서 러시아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을 수 없어서 조지아와 카자크스탄에 머무는 것이라고 한다. 교회에서 내려올때에도 역시 걸어서 내려왔다. 엉금엉금기다시피 내려오는 도중에 폴란드인 40대 남자 여행객을 만났다. 폴란드인 역시 푸틴이 전쟁을 일으켜서 폴란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푸틴에 대한 분노를 토로하였다. 숙소로 돌아오는 도중에 가게에 들려서 라면과 토마토를 사가지고 와서 숙소에서 끓여먹었다. 왜 하필이면 라면을 먹느냐고 하겠지만, 내입에는 라면이 가장 잘 맞았다. 여러 유튜버들이 조지아의 음식 카차푸리(피자의 일종으로 치즈와 계란을 넣은 것), 낀깔리(만두의 일종으로 고기와 양파가 들어간 것), 소고기 내장탕 등이 맛있다고 허풍을 떨고 있지만, 소금을 너무 많이 집어넣어서(최소한 한국의 2배 이상) 하나도 맛이 없었다. 조지아에 머무는 동안 음식을 잘한다는 식당에서도 소고기 내장탕에 작은 페트병에 담긴 물 절반은 쏟아부어야 겨우 먹을 수 있었다.  사전에 소금을 조금만 넣으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간단한 영어 단어 조차도 통하지않았다.  


언덕 아래에서 올려다본 게르게티 트리니티 교회


                                                        트리니티 교회 계곡


트리니티 교회 내부


트리니티 교회 내부


여섯째날 광천수의 고장 보르조미 

             아침 일찍 카즈베기 터미널(터미널이라고 해봤댔자 우리나라 시골 리 단위의 버스 정류장)에 와서 9시 출발하는 트빌리시행 마쉬로카를 탔다. 지방에서 다른 지방으로 가려면 교통이 발달하지않아 우선적으로 트빌리시로 가야한다. 트빌리시로 오는 도중에 마쉬로카 안에서 천천히 산하를 둘러보니 카즈베기 지역은 탄광지대였다. 조지아에서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두가지 사업이 눈에 띄었는데, 바로 석탄광산 개발과 터널 공사였다. 조지아는 코카서스 산맥에 둘러쌓여있어서 도로를 확장하려면 터널공사가 필수적이다. 석탄 채굴도 터널공사도 모두 중국 기업이 독차지한 것 같다. 여기저기서 중국인 인부들이 눈에 띄였다. 낮 12시에 트빌리시 터미널에 도착해서 다시 보르조미행 마쉬로카로 갈아탔다. 이번에도 인터넷에서 숙소를 검색만 하고, 직접 가서 확인해본 다음에 정하기로 했다. 조지아 대부분의 도미토리는 하루에 20라리였는데, 개인실을 사용하면 대략 27라리로 정해진 것 같았다.  도착하여 보르조미 사카다제 67번지에 위치한 숙소를 찾아가는데 아무리 근처를 맴돌아도 보이지않았다. 숙소 주인에게 헤매고있으니 데리러오라고 전화했더니 영어를 못알아듣는척해서 어떤 여자 중학생에게 물어서 한참이나 언덕 꼭대기를 올라가니 그때서야 30대 남자 주인이 내려와 그를 따라 또 한참이나 올라가도 숙소가 나타나지않아서 “대체 숙소 어디있느냐 오늘밤 숙소에 몇사람이 묵느냐”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첫날 숙소 주인에게 당한 경험이 있어서 무서웠다. 그래서 취소한다고 소리를 빽지르고 다시 언덕을 내려갔다. 다시 인터넷 검색해서 알아낸 20라리짜리 숙소를 찾아들어갔다. 위치는 국립공원 앞에 있으나 워낙 건물이 낡았고 모든게 썩어들어가서 숨쉴수가 없었다. 80대가 다 되어가는 할머니 둘이서 숙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주인인지는 모르겠으나 80대가 다 되어가는 카운터 매니저가 조지아말로 뭐라고 쏼라댔지만, 말하는 폼으로 봐서, “아, 그래 한국에서 여기까지 왔네.  환영한다”라는 말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아무리 환영한다고 해도 썩는 냄새가 풀풀 풍기는 건물에 단 1초도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기도 퇴짜놓고 다시 검색해보니 사카다제 25번지에 위치한 숙소가 30라리에 올라와있기에 그곳으로 갔다. 이미 사카다제 60번지까지 올라간 경험이 있으니, 25번지는 더 아래쪽에 있어서 찾기도 수월하고(집집마다 대문에 번지가 크게 쓰여져있다) 버스터미널과 더 가까워서 좋았다. 이 집은 노인 부부가 운영하는데 나무로 지은 깔끔한 집으로 욕실과 주방이 딸린 개인실을 사용할 수 있어서 아주 편안하고 조용했다. 


일곱째날 거리에 폐품 줍는 사람은 없지만개똥이 가득한 보르조미’ 국립공원

             조지아에 와서 느낀 점이라면, 조지아는 어떠한 폐품도 거리에 떨어져있지않고 심지어 담배꽁초 조차도 떨어져있지않다.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이 있어서 청소가 잘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조지아인 평균 한달 월급 40만원 정도로는 담배값이 너무 비싸서 담배피는 사람이 드물었다. 운전기사 정도나 담배를 피웠고, 일반 남자들은 그냥 담배에 불은 붙이지않고 입에 물고만 있었다. 그리고 비닐 조각이나 휴지 한조각도 소중하기 때문에 거리에 떨어져있지않다. 나는 머리를 묶는 고무줄이 끊어져서 노란 고무줄이 혹시 길바닥에 떨어져있지않나하고 눈을 까뒤집고 찾아봤으나 도로에는 아무것도 떨어져있지않았다. 할 수 없이 타이어조각 떨어져나간 것으로 머리를 묶고 다녔다.  가게에 가서 사면 되지않느냐고 하겠지만, 가게에서 이런 시시한 물건은 팔지 않는다. 그럼 은행가서 돈묶는 고무줄 좀 달라고 하면 되지않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다.  보르조미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국립공원으로 가기 전에 조지아 전통 빵 라바쉬(치즈 아주 조금 넣고, 주로 소금만 넣어서 만듬)를 화덕에 굽는 빵집에 가서 맘모스빵 크기만한 전통 빵을 1라리 주고 샀다. 아주머니가 손으로 빵을 건네주기에 비닐에 넣어달라고 했더니 비닐값으로 1라리를 더 내라고 하기에 할 수 없이 배낭에 넣었다. 

             국립공원에 도착했는데, 국립공원이라고 하기에는 시설이 형편없었다. 울창한 삼림이 수십킬로미터에 걸쳐있어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트랙킹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트랙킹하는 사람은 발견하지못했다. 입구에서 한시간을 걸어들어갔는데 국립공원이라고 생각하면 실망이 컸다. 국립공원안에는 개똥 천지라서 걷는 한시간 동안 발을 어디다 내디뎌야 좋을지 몰랐다. 트빌리시 시내 중심가에도 당나귀만한 개들이 도로를 어슬렁거리고 있으며, 거리는 온통 개똥 천지다. 큰 덩치의 개들은 공격적이지는 않으며, 길가 아무데서나 벌렁 두러누워있다.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모양이다. 귀에 인식표 칩을 심어서 걸어둔 것을 보니 주인은 있는 모양이다. 공원안에는 도로를 청소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열심히 청소하지않는다. 국립공원안에는 케이블카도 있지만, 길이가 100미터도 안되며 지상으로부터의 높이가 10미터도 안된다. 공원안에 광천수는 우리나라 초정리 광천수 맛과 비슷했다. 한 컵을 마시는 것은 괜찮지만, 페트병에 담아가려면 돈을 내야한다. 예카테리나 여제가 와서 휴양한 곳으로 유명한 광천수가 분출하는 온천이라고는 하나, 옆에는 개똥이 널부러져있고, 관리상태는 형편없다. 공원 입구에는 쿠라강만이 매우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낚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점심으로 치킨케밥(너무 소금을 많이 넣고 만들어서 절반도 못먹었다)을 먹고 쿠타이시로 향했다. 어떤 유투버가 보르조미에서 쿠타이시까지 거리가 얼마 안된다고 말했기에 보르조미 숙소에 트렁크를 놔두고 덜렁 배낭만 매고 길을 나섰다. 마쉬로카를 타고 쿠타이시로 향했다. 


불을 훔쳐다가 인류에게 준 죄로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서 카프카스 산 바위에 묶여서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는 프로메테우스


                                            물살이 아주 빠르게 흐르는 쿠라강


일곱째날 거리에 폐품 줍는 사람은 없지만개똥이 가득한 보르조미’ 국립공원

             조지아에 와서 느낀 점이라면, 조지아는 어떠한 폐품도 거리에 떨어져있지않고 심지어 담배꽁초 조차도 떨어져있지않다.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이 있어서 청소가 잘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조지아인 평균 한달 월급 40만원 정도로는 담배값이 너무 비싸서 담배피는 사람이 드물었다. 운전기사 정도나 담배를 피웠고, 일반 남자들은 그냥 담배에 불은 붙이지않고 입에 물고만 있었다. 그리고 비닐 조각이나 휴지 한조각도 소중하기 때문에 거리에 떨어져있지않다. 나는 머리를 묶는 고무줄이 끊어져서 노란 고무줄이 혹시 길바닥에 떨어져있지않나하고 눈을 까뒤집고 찾아봤으나 도로에는 아무것도 떨어져있지않았다. 할 수 없이 타이어조각 떨어져나간 것으로 머리를 묶고 다녔다.  가게에 가서 사면 되지않느냐고 하겠지만, 가게에서 이런 시시한 물건은 팔지 않는다. 그럼 은행가서 돈묶는 고무줄 좀 달라고 하면 되지않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다.  보르조미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국립공원으로 가기 전에 조지아 전통 빵 라바쉬(치즈 아주 조금 넣고, 주로 소금만 넣어서 만듬)를 화덕에 굽는 빵집에 가서 맘모스빵 크기만한 전통 빵을 1라리 주고 샀다. 아주머니가 손으로 빵을 건네주기에 비닐에 넣어달라고 했더니 비닐값으로 1라리를 더 내라고 하기에 할 수 없이 배낭에 넣었다. 

             국립공원에 도착했는데, 국립공원이라고 하기에는 시설이 형편없었다. 울창한 삼림이 수십킬로미터에 걸쳐있어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트랙킹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트랙킹하는 사람은 발견하지못했다. 입구에서 한시간을 걸어들어갔는데 국립공원이라고 생각하면 실망이 컸다. 국립공원안에는 개똥 천지라서 걷는 한시간 동안 발을 어디다 내디뎌야 좋을지 몰랐다. 트빌리시 시내 중심가에도 당나귀만한 개들이 도로를 어슬렁거리고 있으며, 거리는 온통 개똥 천지다. 큰 덩치의 개들은 공격적이지는 않으며, 길가 아무데서나 벌렁 두러누워있다.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모양이다. 귀에 인식표 칩을 심어서 걸어둔 것을 보니 주인은 있는 모양이다. 공원안에는 도로를 청소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열심히 청소하지않는다. 국립공원안에는 케이블카도 있지만, 길이가 100미터도 안되며 지상으로부터의 높이가 10미터도 안된다. 공원안에 광천수는 우리나라 초정리 광천수 맛과 비슷했다. 한 컵을 마시는 것은 괜찮지만, 페트병에 담아가려면 돈을 내야한다. 예카테리나 여제가 와서 휴양한 곳으로 유명한 광천수가 분출하는 온천이라고는 하나, 옆에는 개똥이 널부러져있고, 관리상태는 형편없다. 공원 입구에는 쿠라강만이 매우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낚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점심으로 치킨케밥(너무 소금을 많이 넣고 만들어서 절반도 못먹었다)을 먹고 쿠타이시로 향했다. 어떤 유투버가 보르조미에서 쿠타이시까지 거리가 얼마 안된다고 말했기에 보르조미 숙소에 트렁크를 놔두고 덜렁 배낭만 매고 길을 나섰다. 마쉬로카를 타고 쿠타이시로 향했다. 


뜻하지않은 쿠타이시에서의 하룻밤 숙박 :

             쿠타이시에는 겔라티 수도원이 있다고 했기 때문에 꼭 가보고 싶었다. 전날 조지아의 정보를 한국인들에게 전달한다는 사람과 연락이 닿아 조지아에서의 여행 루트를 물어봤다. 간단한 회답을 통해서 보르조미에서 쿠타이시까지 거리가 얼마 안되니 당일치기로 갔다올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점심때 쿠타이시까지 마쉬로카를 2번이나 갈아타고 오후 5시쯤 도착했다. 내 생각에는 보르조미에서 쿠타이시까지 거리가 족히 200킬로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시간이 늦어서 혹시 수도원이 문을 닫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조지아의 수도원은 하루종일 문을 개방한다고 한다. 그리고 조지아는 밤 9시는 되어야 해가 지기 때문에 오후 5시는 대낮과 마찬가지였다. 수도원까지 마쉬로카가 다니기는 하지만, 이미 시간이 늦었고, 게다가 비까지 부슬부슬 내려서 서둘러서 택시를 불렀다. 50라리를 요구했다. 듣기로는 20라리면 갈 수 있다던데, 이 택시 기사는 늦은 시간인데다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고 더군다나 여자라서 바가지 씌우기는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요금이 얼마냐고 물어보았는데, 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타라고 한다. 그래서 올라탔더니 50라리를 달라고 해서 내리겠다고 하니 이미 골목 한바퀴를 돌았기 때문에 내가 헷갈려서 못내리리라 생각해서 무리하게 요구했던 것 같다. 그래도 내리겠다고 하니 내려줬다. 난 터미널 쪽 거대한 맥도날드 간판을 봐두었기 때문에, 맥도날드 간판을 향하여 내달렸다.  다른 택시를 불러서 왕복요금으로 30라리를 주고 겔라티 수도원에 도착했다. 


겔라티 수도원 :

             겔라티 수도원은 조지아의 왕인 건설자 다비트에 의해 설립되었고, 오랫동안 조지아의 문화와 지성의 주요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수도원안에는 12~17세기의 벽화와 필사본들이 보존되어있다. 이러한 정보들은 수도원안의 영어 설명문이 있어서 알아낸 것도 아니며, 신부님들이 영어가 유창해서 알려준 사실도 아니다. 어떤 조지아인 가이드가 외국 여행객을 상대로 설명하는 것을 곁에서 엿들었다. 조지아 어디를 가나 영어 설명문 한 장 붙어있는 곳이 없었다. 대체 이 나라는 훌륭한 유적물 유산에 비해서 관광 인프라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한 나라였다. 이에 비해 아르메니아에서는 유적지 어디를 가나 영어 설명문이 붙어 있어서 이해하기에 편안했다.

             겔라티 수도원을 다 둘러보고 다시 터미널로 오니 7시였다. 이미 보르조미행 버스는 끊겼다고 한다. 아뿔싸 예정에 없었던 이곳 쿠타이시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보르조미 숙소 주인에게 하루 더 묵겠다고 얘기하고 트렁크도 가지고 오지않았으며, 더군다나 숙소 전화번호를 숙지하지않고 나왔다. 왜 미리 계획을 잘 짜지않았느냐고 핀잔할지 모르지만, 조지아는 버스 시간표 같은 것은 아예 없으며, 도시간 거리를 표시한 지도도 없으며, 간단한 영어 한마디도 통하지않는 나라였고, 나는 당연히 당일안으로 보르조미 숙소로 돌아갈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에, 숙소의 전화번호를 숙지하지않고 길을 나섰다. 인터넷 닷컴들에서 검색한 숙소들은 가격과 위치만 나와있을 뿐이지 전화번호는 기재되어있지않다. 실제 예약을 하지않으면 전화번호를 알 수 없다. 트렁크 안에는 빨랫감 밖에 없었기 때문에 크게 걱정은 되지않았지만, 내가 아무말 없이 숙소로 돌아가지않는다면, 숙소 주인도 내가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고 걱정할 것이라는 생각에 우선 경찰서를 찾아갔다. 경찰서에는 그날 당직중인 경찰들이 있었지만, 간단한 영어조차도 통하지않았다. 내가 메모해준 영어를 구글 렌즈로 찍어서 조지아어로 번역할 수 있건만 그것 조차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럴줄 알고 내가 길에서 중학교 1학년 13살짜리 남자아이에게 경찰서 가는 길을 물어봤다. 다행히 영어가 좀 통하여 경찰서까지 동행하여 도와줄 수 없느냐고 했더니 흔쾌히 도와주었다. 경찰들도 어떻게 대응해야좋을지 몰라서 쩔쩔매는데, 이 남자아이가 중간에 통역을 해주어서 간신히 숙소 주인과 연락이 닿아서 안심시켜줬다. 이 아이가 통역을 해주기전에 전날 통화했던 조지아 정보를 한국인들에게 전달한다는 사람에게 전화하여 상황을 설명하고 경찰에게 상황을 설명해줄 수 없느냐고 했더니, “바빠요”라는 단 한마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때 시간은 밤 9시였는데, 그 시간에 무슨 일이 바쁜지는 몰라도 15년을 조지아에서 살았다는데 단순한 의사도 전달해줄 수 없는지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 사람은 아무리 조지아에 오래살았어도 조지아 언어를 배우지않았다는 사실만 추측할 뿐이다. 경찰이 이제 어디로 갈거냐 숙소를 정했다면, 그 숙소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경찰서에 오기전에 인터넷으로 숙소(20라리 호스텔)를 검색만 하고 예약은 하지않았다.  시내에서 좀 떨어진 곳 같은데, 이 밤중에 어떻게 찾아가나 내심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데려다주겠다니 너무 고마웠다.  도착해보니 4명이 함께 침대를 사용하는 도미토리였는데, 머리를 더부룩하게 파머한 동양 남자가 먼저 눈에 띄였다. 나도 모르게 한국어로 “남자가 방에 있네”라고 했더니, 그 젊은 남자가 “나도 한국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아줌마도 “나도 부산에서 왔어요”라고 했다.  숙소 주인은 너무 친절했다.  24살 아가씨가 조부모와 같이 운영하고 있었다. 아가씨 크리스티나는 한국 사람들을 좋아한다며, K-팝, 드라마 주인공들 이름을 열거하는데, 나는 이런 것들에는 관심이 없어 알지못했기 때문에 대답을 못했다. 밤 10시가 넘은 늦은 시간인데도 한국의 팥죽 같은 것과 음료수를 내주었다. 물론 팥죽은 조금 짰다. 그래도 맛있다고 인사를 전하고 잠이 들었다.  지금까지 전세계 호스텔을 이용했지만, 이 호스텔만큼 친절하고 편안한 곳은 없었다.   내가 다시 조지아를 간다면, 이 호스텔을 다시 가볼 수 있다는 것이 한가지 이유가 될 것이다.  최고의 호스텔 Medico and Suliko Guest House (Tbilisi St. 3rd Lane #6, 4041), 메디코 할머니, 술리코 할아버지, 손녀 크리스티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그 친절에 감사드린다.   

                                                     겔라티 수도원 외관

공사중인 수도원 내부 (예수님 천장화는 어느 지점에서 보아도 똑같이 잘보인다고 한다)

                                                    수도원 내부의 화려한 성화

수도원장의 무덤 (조지아어를 이해못해서 더 이상 설명 불가)

여덟째날 보르조미에서 바투미로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천천히 쿠타이시를 둘러보니 수도인 트빌리시 보다 더 깨끗하고 계획된 도시였다.  숙소 주인은 물론 이곳 사람들이 더 친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내버스타고 터미널까지 와서 마쉬로카를 2번 갈아타고 보르조미 숙소로 돌아가서 트렁크를 가지고 나와서,  터미널에서 다시 마쉬로카를 타고 바투미로 향했다. 원래는 보르조미에서 쿠타이시로 와서 쿠타이시를 둘러보고 바투미로 가는게 순서여야했으나, 트렁크를 되찾느라 보르조미 숙소까지 다시 되돌아가니 왕복 총 6시간과 하루치 숙박비 30라리와 교통비 40라리를 손해봤다. 저녁때쯤 바투미에 도착했다. 바투미는 흑해 연안에 접해있는 조지아의 두 번째로 큰 도시라고 한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본 숙소 도미토리는 20라리였다. 직접 도미토리에 가서 숙소를 확인하고 숙박을 정하려고 했으나, 터미널(우리나라 시내버스 정류장 같음)에 도착하자마자 숙소 피켓을 든 아줌마가 개인실을 40라리에 사용할 수 있다고 하여 그녀를 따라 터미널 바로 뒤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골목안에 있는 숙소는 2층으로 이루어져있는데, 한층이 20평 정도였고, 아래층에 방2개, 윗층에 방 2개 총 4개가 있다. 이중에 방 하나만 60대 주인 부부와 손자가 사용하고, 나머지 방은 세를 주었는데, 2층 방 2개는 장기 임대자에게 내주고, 아래층 문간방을 단기 숙박자인 내가 묵게 되었다. 서로 의사 소통은 안되었지만, 손자의 통역을 통해서 간신히 의사 소통을 했다. 안주인은 입에서 쉴새없이 돈돈돈을 내뱉었다. 세탁기를 한번 사용하면, 우리돈 10라리. 우선 질문이 몇박을 묵을거냐는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 편안하면, 며칠동안 묵을 것이고, 편안하지않으면 오늘 밤만 묵을 것이다. 내게 세탁비를 받으면 오늘 밤만 묵을 것이라고 했더니, 세탁비는 안내도 된다고 했다. 문앞에 화장실 겸 욕실이 있는데, 4개의 방에 머무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화장실과 욕실을 사용하니 비록 개인실을 쓴다고는 하지만, 도미토리와 다름없었다. 그리고 안주인의 돈돈돈 소리도 듣기 불편했다. 저녁때 바투미 시내 수산물 시장에 가서 생선을 먹으려고 둘러보았으나 그 비용은 한국의 횟집 비용과 같았다. 아침에도 바투미 해변에서 안초비(멸치 비스므리한 것) 낚시하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별다른 특색있는 구경거리는 없었고 모든 물가가 비싸기만 했다. 물론 바투미에서 한달살기를 한다는 한국사람들도 있지만, 조지아 생활물가 특히 식료품 값이 우리나라와 비슷하니 비싸기 그지없었다. 러시아 사람들이 15조원을 이 나라에 들여와서 달러값은 내려간 반면에 일반 물가는 올랐다고한다. 바투미는 다 둘러보았으니 점심때 아르메니아로 가려로 했으나, 바투미에서 아르메니아로 직접 가는 수단이 없기에 다시 트빌리시로 가야만 했다. 

좌우로 회전하면서 10분마다 남녀가 만남
바투미 흑해 해변을 따라 낚시꾼들이 하루종일 낚시함


아홉째날 아르메니아 예레반으로 

             트빌리시 글로벌 호스텔에서 일찍 나와서 아블라바리 전철역에 내려서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5번째 정거장쪽에 있는 오르타찰라(Ortachala) 국제버스 터미널로 갔다. 외국 도시를 연결하는 장거리 버스들이 집합되어있다.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 예레반까지 버스 요금은 40라리(약 2만원). 바로 여기서 3일전 쿠타이시행 마쉬로카 안에서 만났던 중국인 여행자 5명, 즉 여자 4명과 남자 1명을 다시 만났다. 예레반까지 동행자가 생겼다고 서로 반가워했다. 이들 여자 일행은 내 또래 아니 나보다 약간 젊은 편이었다. 그런데 결국 이들 일행중 ‘양꽝’이라는 여자에게 약 28,000원을 둘렸다(속임을 당했다).


아르메니아 

첫째날 지금까지 가본 호스텔중에 가장 열악한 숙소 쿠르디스탄 호스텔

            조지아에서 아르메니아쪽으로 국경을 넘어오자 드넓은 초원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나무는 눈에 띄이지않았으나 온갖 풀들과 꽃들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조지아에서 그렇게도 많이 봤던 양떼나 소떼는 보이지않았다. 왜 이런 황금같은 초원지대를 그냥 놀리나 라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아르메니아쪽 첫 번째 휴게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가 다되서였는데, 마침내 식사를 하게 되었다. 레스토랑을 둘러보니 여러 음식이 있었지만, 그나마 입에 맞는건 필라브(쌀에 기름과 소금을 넣고 찐 밥)가 나을 것 같았다. 금액은 400드램이었다. 400드램이면 달러로 얼마나 되냐고 물으니 미화 1달러 정도 된다고 했다. 그럼 1달러를 내겠다고 했더니 자신들은 미화는 안받는다면서 그냥 필라브를 공짜로 주겠다고 했다. 너무 배가 고파서 고맙다고 맛있게 받아먹었다. 그동안 주로 빵만 먹었더니 밥이 너무나 반가와서 염치를 잠시 잊어버렸다. 중국인 5명은 휴게소에 잠시 머무는동안 용케 달러를 환전했다. 예레반 터미널에만 가면 환전할 곳은 많으리라 생각했는데 완전 잘못된 생각이었다. 휴게소에서 환전하지못한 것이 그만 ‘양꽝’ 일행에게 코가 꾀는 결과를 가져왔다. 예레반 숙소도 미리 예약은 하지않고 인터넷에서 검색한 숙소를 직접 가서 확인한 다음에 정하려고 했다. 예레반 터미널은 우리나라의 구석진 시골 터미널보다도 못했다. 물론 유심파는 곳도 없었고, 환전하는 곳도 없었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이들 일행중에 여자 2명은 따로 다른 숙소로 간다고 했다. 아니 당신들 친구사이 아니었느냐고 했더니 우물쭈물 제대로 된 대답을 회피했다.  양꽝과 그녀 친구는 광서성 난닝 출신, 다른 숙소로 간 여자 2명은 천진 출신, 남자는 대련 출신이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양꽝과 1명만 친구 사이이고, 다른 곳으로 간 여자 2명과 남자(윗니 3개가 빠진 46세 총각)는 모두 조지아에 와서 여행지에서 만난 길동무였다. 양꽝이 내게 제안했다. 오늘 내가 예약한 숙소를 취소하고 자신들이 묵을 숙소에 침대가 4개이니 같이 묵자고 제안했다. 그러면 숙박비도 절약될터이고, 같이 여행을 하면 여행비도 절약될터이고, 유심도 도시락 와이파이 같은 것으로 4명이 같이 사용하면 비용이 상당히 절약될 것이라고 했다. 듣고보니 타당한 제안이라 생각하고 동의했다. 아뿔싸, 결과는 양꽝이라는 여자에게 둘리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는 중국어를 이해할 수 있었을 뿐이지, 중국인의 사고방식은 완전히 이해하지못한 결과로 코가 꾄 것이다.  양꽝이 숙소를 같이 사용하자고 제안했을때에는 괜찮은 호텔이니까 같이 묵자고 했을테지 지레짐작하고 그 여자를 따라 나섰다. 예레반 시내를 무려 2시간이나 끌고 다녔다. 다행히도 윗니 3개 빠진 중국 총각(여행을 하기 보다는 윗니 임플란트를 먼저 했으면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이 내 트렁크와 배낭을 대신 들고다녔기에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 괜찮은 호텔이라면 왜 쉽게 찾지못하고 헤매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숙소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봐도 대답을 하지않았다. 결국 2시간을 헤매서 도착한 숙소가 쿠르디스탄 호스텔. 일반 호스텔 도미토리는 1박에 3,000드램(12,000원). 도착한 쿠르디스탄 호스텔도 4명이 나누어내면 3,500드램(14,000원). 아픈 무릎을 무릅쓰고 2시간을 헤맨 끝에 도착한 호스텔은 내가 지금까지 봤던 호스텔중에 최악이었다. 반지하와 1층에 객실 4개가 전부인데, 1층에 화장실 겸 샤워실이 단 1개 뿐으로 타일은 깨어져있고, 샤워 꼭지 없이 샤워줄로만 샤워를 해야했다. 그날밤 대략 14명이 단 하나의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샤워를 해야했으며, 그나마 배정된 반지하 방 한쪽은 곰팡이가 피고 있었고, 또한 도로변에 접해있어서 자동차 소리가 시끄러웠다. 이미 2시간동안 예레반 시내를 걸어서 헤맸기 때문에, 쓰레기 같은 호스텔을 박차고 나올 약간의 힘도 남아있지않았다. 코를 감싸고 잠을 청했으나 자동차 소리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나는 도저히 이곳에서 더 머무를 수는 없으니 다른 호스텔로 옮기겠다 했더니 이틀치 숙박비7,000드램과 어제 이 호스텔로 오느라고 택시를 탔으니 1인분에 해당되는 200드램, 합해서 7,200드램을 내놓으란다. 어째서 이틀치냐고 했더니 내가 이틀을 머물겠다고 하여 이미 숙소에 비용을 지불했으니 내놓으란다. 우리돈으로 약 28,000원. 이런 경우없는 사기꾼 같은 여자와 더 이상 입씨름하기 싫어서 아침 일찍 예레반 중심가에서 환전을 해서 7,200드램을 주었다. 


두 번째 날 게하르트 수도원돌들의 교향곡(주상절리), 가르니 신전샤렌트 아치

             양꽝 일행과 마주치기 싫어서 혼자서 돌아다닐 작정을 하고 유적지까지 가는 대중교통 수단을 알아보았으나, 몇 번이나 차를 갈아타야한다니 너무 불편해서 1일 투어를 하는 봉고차가 모여있는 곳으로 갔다. 결국 그곳에서 다시 양꽝 일행과 만나게 되어 같은 투어 봉고차에 합류하게 되었다. 양꽝은 투어 봉고차 사장(여러대의 투어 봉고차를 소유한 보스 영감)에게 손짓 발짓으로 5000드램하는 것을 우리는 일행이 4명이니 1000드램씩 깎아달라하여 결국엔 4000드램으로 하였다. 봉고차안에 러시아인 4명과 우리 일행 4명 총 8명이 게하르트 수도원, 돌들의 교향곡(주상절리), 가르니 신전, 샤렌트 아치 4곳을 둘러보게 되었다. 

             4곳의 유적지는 예레반에서 남동쪽으로 32km 떨어져 있는 곳에 모여있다. 먼저 들른 곳은 게하르트 수도원. 게하르트는 ‘창’이라는 뜻인데, 전설에 따르면 유다 타대오가 이곳으로 롱기누스의 창을 가져왔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한다. 일설에 따르면 아르메니아를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개종시켰던 계몽자 그레고리오가 4세기에 세운 수도원인데, 처음 지어진 수도원은 9세기에 아랍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건축물은 12~13세기 무렵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또한 이 수도원은 합창단이 유명하다. 내가 방문한 날도 어떤 젊은 여자분이 지붕이 뚫려있는 돔 아래에서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봉고차 바깥에 붙여놓은 관광지 안내문

                                            게하르트 수도원 올라가는 언덕길


게하르트 수도원 마당
게하르트 수도원 내부 제단
수도원 내부 천장 돔
수도원 내부 천장이 뚫려있는 돔 아래에서 성가를 부르는 여자분 
수도원 내부 기둥 

 

             두 번째로 방문한 곳은 가르니 협곡에 있는 돌들의 교향곡(주상절리)이다. 지상 최대의 주상절리였다. 마치 파이프오르간의 집합 같았다. 약 500미터에 이르는 길은 바닥이 비포장 자갈길이었지만, 말을 타거나 코끼리 열차를 타고 둘러볼 수도 있으며, 완만한 언덕이라서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지만, 목이 말라서 물을 사먹으려고 했으나 페트병 물값은 우리나라와 같으니 비싼 값이었다. 주상절리 옆에 시냇물이 흐르고 있으니, 이 길을 끝까지 따라가면 반드시 마실 수 있는 물이 나오리라고 생각하고 끝까지 갔더니 정말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아마실 수 있게 설치해놓았다. 사먹는 물보다 훨씬 맛있었다. 


             세 번째로 방문한 곳은 가르니 신전이었다. BC 3세기에는 요새로 건립되었다.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BC 1세기에 아르메니아 왕 트리다테스 1세(Tiridates I)가 네로황제의 후원을 받아 태양신 미트라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건축했다한다.  ‘아르메니아가 로마의 지역이라는 사실을 선포’한다는 의미의 신전 건립목적을 확실히 하기 위해 신전 내에 트라야누스(Trajan) 황제의 모습을 본뜬 상(像)을 세웠다는 설도 있으나, 지금은 어떤 모습도 볼 수 없었다. 태양과 결부된 동부 지중해 연안의 신(神)인 미트라 때문에, 이 신전을 ‘가르니 태양신전’으로 부르기도 한다. 

             네 번째로 방문한 곳은 샤렌트 아치였다.  언덕 위에 인공으로 만들어진 아치였다. 언덕위의 아치에서 예레반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다. 사실 예레반 시내는 중심가에서 2킬로미터만 벗어나면 시골이었다. 아치 앞에는 레스토랑이 있는데, 8명의 일행중에 누구도 그곳에서 점심식사를 하지않았다. 그래서 투어가 예외로 빨리 끝났다. 중심가로 돌아오니 오후 4시였다. 아침에 잽싸게 검색하여 옮긴 숙소로 돌아가서 침대에 몸을 뉘였다.

샤렌트 아치 입구 (이 남성이 내 트렁크를 이틀동안 들어주었음)
샤렌트 아치에 올라 내다본 전경

 

에르메니아인 국민성 :

             옮긴 숙소는 쿠르디스탄 호스텔에 비하면 위생적인 면이나 시설면에서 훨씬 나았다. 우리돈 3천원만 더 주면 쿠르디스탄 호스텔보다 더 나은 호스텔이 많이 있었다. 대부분의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착하고 친절하다. 조지아를 먼저 갔다오니 그 대비가 뚜렷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사람들에게는 사회성이나 타인을 배려하는 정신이 부족한 것 같다. 밤9시가 되니 남자 주인 호스트와 남자 카운터 매니저가 또래들 여럿을 모아놓고 거실에서 돌비 시스템으로 TV를 감상하고 있었다. 자다말고 깜짝 놀라 일어나서 티비 소리 좀 줄이라고 했더니, 밤 11시에 드라마가 끝나니 그때 끄겠다고 한다. 투숙객을 보호해야할 주인 호스트와 카운터 매니저가 앞장서서 티비를 밤늦게까지 켠다. 밤 11시가 지나서 이제 좀 조용해지려나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세탁기가 요란하게 돌아간다. 주인 호스트에게 세탁기를 돌리는 것 같으니 체크해달라고 했더니, 세탁기 안돌아간다고 했다. 세탁기는 화장실 안에 있는데 확인해보려하니 누군가가 화장실안에 들어가서 나오질않는다. 30분후에 화장실문이 열렸다. 세탁기를 확인해보니 세탁기는 돌아가지않지만, 여전히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바로 카운터 매니저가 실외기 소음 요란한 에어컨을 틀어놓고 자고 있었다. 카운터 매니저 옆에 리모콘이 있어서 그 리모콘으로 에어컨을 껐다. 끄고나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5시간을 겨우 자고 캐리어를 한쪽에 세워놓고 전철타고 기차역으로 갔다. 아르메니아의 경치는 너무 아름다웠지만, 인간들이 너무 피곤하여 일치감치 트빌리시로 돌아가고 싶었다.  전철 요금은 100드램. 기차역에서 밤 9시반에 트빌리시로 가는 기차표(3등칸 아래층 1400드램)를 예매하고 전날 1일 투어를 하는 봉고차 집합소로 갔다. 


두 번째날 코비랍 수도원와이너리노라방크버드케이브제르묵 폭포 등 7곳 방문

             투어 봉고차가 출발하는 곳에서 다시 양꽝 일행과 마주쳤고 또다시 같은 봉고차를 타게 되었다. 이번에는 러시안 커플 2팀과 커플의 남자친구 1명, 즉 러시아인 5명, 중국인 3명, 그리고 나 총 9명이 함께 1일 투어를 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양꽝이 투어 봉고차 사장과 흥정하여 10,000드램을 1,500드램 깎아서 1인당 8,500드램으로 투어를 하게 되었다. 



코비랍 수도원과 아라랏산 :

             아라랏산 밑에 코비랍 수도원이 있다. 아라랏산은 노아의 방주가 내려섰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이 산은 만년설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트랙킹은 금지되어있다. 왜냐하면, 아라랏산은 터키 땅이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인은 언젠가는 아라랏산을 되찾으리라는 희망에서인지 아르메니아 은행 이름도 아라랏뱅크이다. 터키쪽 보다는 코비랍 수도원 앞에서 아라랏산의 전경을 관망할 수 있다고 한다. 코비랍은 아르메니아어로 ‘깊은 지하감옥’이라는 뜻으로 성 그레고리오가 타라디테스 3세에 의해 수년간 갇혀있던 감옥위에 세워진 교회라고 한다. 갇힌 이유는, 그레고리오의 아버지가 타라디테스 3세의 부모를 암살하였기에 아버지는 즉시 살해당하고, 그레고리오는 터키 카파도키아 지방으로 피신했다가 고국을 잊지못해 다시 귀국했지만, 왕은 그레고리오를 지하 감옥에 13년간 가두어두었고 그동안 많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다. 얼마후 왕은 중병에 걸렸고, 그레고리오의 기도로 왕은 회복되었다고 한다. 이후 왕은 301년 기독교를 인정하였고, 세계에서 기독교를 가장 먼저 인정한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방문한 그날이 바로 그레고리오의 탄생일이라 많은 사람들로 인해 입구 300미터 앞에서부터 자동차 주차장으로 변해있었고, 수도원 안에서는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내부 사진을 찍을 수는 없었다.  언덕을 올라오느라 페트병에 들어있던 물을 마셔버려 몹시 목이 말랐다. 마침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서려고 하던 나이 드신 신부님께 물을 좀 달라고 빈 페트병을 내밀었더니, 페트병 뚜껑까지 달라고 하여 드렸더니 잠시후에 물이 가득 담긴 새로운 페트병을 주셨다.

코비랍 수도원 들어가는 길가 
코비랍 수도원 외관

 

새들의 보금자리 : 

             아르메니아의 전신주는 독특한 모양으로 옛날에 우리나라에서 사용했던 애자를 통해서 전원을 공급하고 있었다. 코비랍 일대에도 도로변 전신주가 늘어서있는데, 아주 독특하게 생겼다. 그 전신주 위에 새들이 거대한 집을 지었다. 그 주변에는 뽕나무들이 꽉 들어차있었다. 아니 아르메니아 전역에 뽕나무들이 들어차있다. 아르메니아 음식이 입에 안맞는 나와 중국인 3명은 뽕나무 열매 오디를 따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디로 배를 불려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보라색 오디, 핑크 오디, 화이트 오디 등. 


 

관광농원과 와이너리 : 

             관광농원에 들러서 와인을 시음하고 아르메니아 전통 빵(소금빵)을 맛보았다. 러시아 커플들과 중국인 3명은 와인에 흥미가 많았지만, 나는 술맛을 모르니 관심이 없었다. 아무도 물건을 사지않으니 일행을 다시 태우고 운전기사는 10분 떨어진 와이너리로 우리들을 데려갔다. 러시아 커플의 남자 친구만이 와인 한병을 샀다. 운전기사는 리베이트를 받을 수 없어서 많이 실망한 것 같았다. 


노라방크 :

          노라방크는 '새 수도원'이라는 의미. 1105년에 첫 건설되고, 1990년에 재건하였다. 수도원 안에 있는 성모교회 2층 예배실로 가려면 한 사람이 거의 기어서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도록 되었다. 방문한 날은 일요일 이었는데, 마침 젊은 커플의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카라펫교회는 교회 안에 성직자나 후원자가 묻힌 많은 석관들이 있고, 주요 후원자였던 오르벨리안 왕과 그 아들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특이한 것은 교회와 교회 주변의 산이 모두 붉은 사암으로 둘러져 있어 더욱 인상깊었다. 

 

노라방크 수도원 입구
수도원을 둘러싸고 있는 사암 
성모교회

버드뱅크 아레니-1동굴 

             3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동굴. 아르파 강 유역에 위치한 동굴로, 2007년에 첫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기원전 4300년-3400년)와 중세시대(IV-XVII 세기)에 사람이 거주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동굴 내의 온도 변화와 낮은 습도의 지속적인 수준은 유기 유적의 보존을 위한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했기에 이 동굴에서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아레니-1은 바구니와 의복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죽 신발(기원전 3600년-3500년)을 비롯한 잘 보존된 많은 양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지금은 새들만이 동굴안에서 보금자리를 틀고 있다.

점심 식사 

             4군데를 둘러보고나니 오후 3시가 넘었다.  그때서야 운전 기사는 일행을 데리고 점심을 먹으라고 식당으로 데려갔다.  중국인 3명과 나는 아르메니아 음식이 입에 안맞아서 각자 알아서 빵과 간식을 사서 먹고 다녔는데, 운전기사는 식당에 왔으니 식사를 사먹으라고 독려하였다. 운전기사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아마도 이 식당은 손님들이 식사하는 대금에서 얼마간의 리베이트를 운전기사에게 주는 것 같다. 러시아인 5명만 음식을 시켰다. 음식 시킨지 1시간이 넘어 4시반이 되어서야 겨우 음식이 나왔다. 아침에 투어 봉고차 타기전에 투어가 몇시에 끝나느냐고 물어보았을때에는 저녁 7시에 끝나서 원래 지점으로 데려다준다고 했다. 아직도 제르묵 폭포를 비롯하여 2군데 유적지가 남았는데 러시아인들은 5시가 지났는데도 세월아 내월아 하염없이 음식을 먹어댔다. 운전기사에게 항의했다. 나는 밤 9시반 기차로 트빌리시로 가게 되어있는데, 지금 점심을 먹으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 앞으로 볼 유적지가 두군데나 더 남아있지않느냐, 대체 오늘 투어는 몇시에 끝나냐고 했더니, 8시라고 했다. 그럼 지금 5시가 다 되었는데, 언제 밥먹고 나머지 제루묵 투어를 할꺼냐고 했더니, 젊은 러시아 커플 총 5명이 내게 “그럼 예레반에 도착하면 숙소까지 택시타고가면 되지않겠느냐”고 야유를 퍼부우면서 꾸역꾸역 음식을 시켜서 세월아 내월아 먹고 있었다. 참다못해서 운전기사에게 언제 출발할꺼냐고 소리를 빽질렀더니, 자기는 “당뇨환자라서 지금 식사를 못하면 쓰러진다”고 했다. 이 모든 소통은 휴대폰을 통하여 아르메니아 말을 영어로 번역한 2중 번역을 통해서였다. 옆에 중국인 3명은 아무말도 없고... 내가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니까 운전기사가 어디다 전화를 해대더니 곧 차가 도착하니 그 차로 나를 태우고 예레반으로 간다고 했다. “예레반까지는 120킬로 남았다는데, 택시비는 그럼 누가 낼꺼냐?”고 또다시 소리질렀더니, 운전기사가 어디다 통화를 해대더니 내가 택시비를 낼 필요는 없다면서 10분만 기다리면 차가 온다고 했다. 이 말을 믿어야되나 말아야하나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자가용이 다가오더니 차에서 사람이 내렸다. 그 사람은 바로 어제 같이 투어를 했던 러시아인 모자였다. 아들은 26살로 아마도 징집 명령을 피해서 엄마와 같이 아르메니아로 온 것 같다. 아들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했더니, 운전기사에게 몇마디 물어보고는 날더러 걱정말라고 한다. 택시비는 투어회사에서 낼 것이라고 했다. 나는 러시아인 모자가 타고온 차량을 타고 예레반으로 향했다. 숙소에 8시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고 짐을 챙겨가지고 예레반역으로 향했다. 카운터 매니저는 샤워를 하고 체크아웃하는 내게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아침에 무려 12명이 2개의 화장실과 2개의 욕실을 사용하느라 나는 미처 샤워를 하지못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자연 경관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혼자서 자유 여행을 하기에는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한 나라였다. 이런 관광인프라를 뒷받침하지못하는 정부의 정책 부재와 사람들의 마인드(조지아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관광객을 그저 돈을 뜯어낼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긴다)는 하루 아침에는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얼른 터키로 가고 싶었다. 터키는 이들 나라보다 발전했기 때문에 나으리라고 생각했으나 뒤에서 말하겠지만, 터키는 이들 두나라보다 훨씬 피곤한 나라였다. 밤 9시반에 출발한 기차는 밤새 3번의 국경 통과 절차를 거쳐서 아침 6시에 트빌리시에 도착했다. 오르타찰라(Ortachala)  터미널에서 120라리(6만원)를 주고 아침 9시에 터키 트라브존행 버스에 올라탔다.


터키 트라브존을 향하여 :  

             여행하면서 지나왔던 루트를 다시 되돌아서 이미 하루를 묵었던 바투미를 거쳐서 터키 트라브존을 향하여 버스는 쉴새없이 달렸다.  국경 통과하기직전 안내양(40대 아줌마)이 여기 마지막 조지아 환전소에서 환전해야한다고 외쳤다.   나는 아르메니아에 입국하면서 바로 환전을 못했던 경험이 있어서 서둘러 미화 50불을 환전했다.  그런데, 환전상이 미화를 조지아 라리로 환산하고 다시 터키 리라로 환전해주었다.   받아보니 환전액이 이상했다.  왜 조지아 라리로 중간에 환산해야하느냐 다시 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버스가 막 출발하려고 요동을 치니 더 이상 따지지못하고 터키 리라를 받아들고 버스에 올라탔다.  안내양과 운전기사와 환전상이 한통속이 되어 어리숙한 외국 여행객을 등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천천히 계산해보니 5달러를 떼먹었다.   분한 마음을 삼키고 세관을 통과해야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안내양은 면세점에서 술 2병과 담배 1보루를 내손에 쥐어주려했다.  “내가 왜 당신을 위해서 이런 심부름을 해야하느냐, 당신은 이미 환전소에서 내게 거짓말로 환전액을 등치지않았느냐”고 싫다고 뿌리쳤다.  가만히 보니 조지아에서 세관을 통과하는 모든 운전기사와 안내양 및 일반사람들은 이런 물건들을 터키쪽으로 가지고가서 웃돈을 벌고 있었다.  안내양은 조지아말도 터키말도 능숙하게 하는 여자였다.  내가 말한 것도 아마 알아들었을 것이다.  나이든 어리숙한 여행객으로 얕보고 끝까지 우려먹으려 했던 것 이다.  설상가상으로 터키 국경으로 넘어오자마자 버스가 그만 퍼져버렸다.  버스가 터키 국경에 2시에 도착했으니 예정대로라면, 트라브존에 오후 5시에는 도착해야만 하지만, 버스는 5시가 넘어도 고치지못했다.   어디선가 전문가가 날아와서 겨우 손을 본 다음에 6시가 되어서야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터키쪽 첫번째 터미널에 도착하여 전문가가 또 손을 대니 시간을 더욱 허비했다.  흑해 해변을 따라 달리고 달려서 트라브존에는 밤 10시가 되어 도착했다.  버스로 오는 도중에 터키쪽 심카드를 살 수가 없어서 옆좌석 아가씨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와이파이를 공유하여 겨우 아고다를 통해(터키에서는 북킹닷컴은 검색되지않는다.  북킹닷컴이 터키에 찍혔나보다) 숙소를 예약하자마자 카드에서 한국돈 37,000원이 철거덕 결제되어버렸다.  버스는 트라브존 터미널을 들르지않고 바로 공항앞에서 내려주고 여기가 ‘트라브존’이다라면서 떠나버렸다.  밤10시가 넘은 한밤중에 누군가에게 길을 물어볼 수 없어서 여행중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항 입구에서 택시를 탔다.  주소를 보여주니 100리라(6,000원)를 내라고 한다.  택시에서 내릴때보니 70리라가 찍혔으나, 이미 내가 100리라 준다고 약속했으니 달라하여 주어버렸다.  숙소에 도착해서도 한밤중과 새벽에 동네 모스크에서 흘러나오는 아잔 소리에 잠을 설쳤다.  조식을 준다고는 하나, 빵조각에 치즈 한조각, 삶은 계란 1개가 전부라서 더 이상 이 숙소에서는 머물고싶지않았다.  20년전 터키를 단체 여행했을때에는 아무리 시시한 호텔이라 할지라도 음식은 맛있었다.


                            흑해를 따라서 트라브존으로 향하는 도중 흑해에서 해가 지는 모습

 

 트라브존에서 터키 여행을 시작하다 :   

             아침에 새로운 숙소를 찾아야했다.  와이파이로 다른 숙소를 검색해보니, 개인실에 화장실과 욕실과 주방이 딸려있는 1박에 350리라(21,000원) 하는 Karabina Eylul Aparts(카라비나 이룰 아파트)를 찾아냈다.  우선 숙소 이름과 주소를 갤러리에 저장했다.  그리고나서 터키 심카드를 사러 번화가인 메이단공원까지 일부러 한시간을 걸어갔다(지리 감각도 익힐겸).   천천히 눈을 돌려보니 공항은 흑해앞에 있었고, 흑해를 따라서 대도시가 연결되고 있었다.   트라브존 시내는 앞에는 해변이 있고, 뒤에는 높은 산이 있는 형세였다.  메이단공원에서 심카드를 사려했더니, 투르크셀과 보다폰셀 유심이 있었다.  두 종류의 유심 모두 15기가에 터키 국민에게는 200리라, 외국인에게는 600리라 이상.  그나마 양심이 있는 가게에서나 600리라에 살 수 있지, 정해진 값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800리라, 900리라 제멋대로 받고 있었다.  이밖에도 전철비용과 버스 요금도 외국인에게는 3배, 유심값 3배, 박물관 유적지 관람료는 최소 4배 이상을 받고 있었다. 터키인들도 외국인만 보면 바가지 씌우려고 안달했다.  조지아나 아르메니아보다 더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중에도 친절한 터키인이 더 많았다. 


             휴대폰에 저장한 숙소 이름과 주소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물어보았으나,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공항과 가르데니아 공과대학 근처 어딘가에 있다는 것은 알아냈다.  돌무쉬(봉고차 시내버스) 운전기사가 대충 언덕배기 종점에 내려주었다.   우리나라같으면 복덕방이 있을 법한데 복덕방은 보이지않고 여행사 사무실이 여러군데 보였다(길건너 트라브존 공항이 있으니 여행사 사무실들이 모여있었다).   그중에서도 언덕 꼭대기에 있는 좀 한가해 보이는 여행사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40대 남자 혼자서 사무실에 있었다.  그 사람에게 상황을 설명했더니, 누가 봐도 쉽게 알 수 있도록 구글 지도를 크게 확대해서 컬러로 프린트해주었다.  금방 숙소를 찾았다.  아파트라기 보다는, 3층짜리 다가구주택이었다.  크기가 각각 다른 10개의 객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도착했을때에는 주인은 외출중이었다.  유일하게 장기 임대를 하고있는 젊은 부부가 나를 맞이했다.  부부가 연락하니 주인 아저씨가 왔다.  인터넷에 예약하지않고 직접 왔으니 300리라만 내라고 했다.   싱크대와 도시가스 화구 1개, 화장실과 욕실이 딸린 1인실이었다.  여행와서 이렇게 편안한 숙소를 찾은건 처음이었다.  이틀 묵는동안 부부가 많이 도와주었다.  남편 하룬은 26살, 아내 데니즈는 24살.  부부는 집옆에 있는 가르데니아 공과대학 토목공학 출신으로 5평짜리 원룸에서 유럽인을 상대로 토목공학 도면을 설계해준단다.  월세 2,000리라의 주거 공간이 바로 사무실이기도 했다.  공항이 가까우니, 여기서도 유심 파는 가게가 많이 있어서 하룬과 데니즈가 나를 대신해서 유심을 사주려고 했으나 역시 외국인에게는 3배 이상을 받겠다고 해서 트라브존 시내에서는 유심없이 다녀보기로 했다(내가 큰 사업을 하는 사람도 아니니 와이파이존에서만 인터넷 검색을 하리라 생각했으나, 터키는 와이파이존이 아주 드물었다).  오전 시간을 다 보내고 점심때가 되어 시내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쉬멜라 수도원에 가보겠다고 하니, 산쪽을 가리키며 오늘은 구름이 꼈으니 비가 올 것 같다면서 내일 가는게 좋다고 하룬이 말하였지만, 여행자에게 날씨를 가려서 다닐만큼 시간적 여유는 없었기 때문에 가보기로 하였다. 

숙소를 장기 임대하고 있는 부부
숙소 가는 길을 출력 (고마운 여행사 사장님)


             트라브존 앞쪽 흑해는 날씨가 화창했지만, 뒤쪽 산은 비가 내렸다.   메이단 공원 아래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물어봐도 내 눈에 터미널은 눈에 띄이지않았다.  터키 사람들이 터키말로 아무리 설명해봤댔자 낯선 곳을 어떻게 찾겠는가?  헤매는 내가 안타까웠는지 어떤 아저씨가 메이단 공원 언덕 아래에 있는 터미널로 데리고갔다.  시외버스 터미널이라 하여 우리나라 버스 터미널로 생각하고 헤맸으나, 공터에 돌무쉬들이 모여서 시외버스 터미널 구실을 하였다.  낮 1시반에 쉬멜라로 가는 돌무쉬에 올라탔다.  차비는 편도 50리라.  돌무쉬는 쉬멜라 수도원에서 1시간반을 기다려주었고, 되돌아올 때 50리라를 더 내야한다.  쉬멜라 수도원에 2시반에 도착했다.  가파른 1300미터 절벽위에 세워진 쉬멜라를 한시간반내에 다녀와야 했다.  무릎만 안아프면 그리 힘든 등산은 아니었지만, 어찌되었던 한시간반안에 돌아봐야한다는 부담 때문에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서기 385년 그리스 아테네 출신의 수도사 형제가 성모마리아의 계시를 받아서 세웠다한다.  몇차례의 재건을 거듭하다 13세기에 이르러 현재의 수도원이 완성되었다.  5층 구조로 72개의 방이 있었다하며, 한때는 800명의 수도사들이 거주했으며, 신학교, 부엌, 도서관, 교실 터가 남아있다.  특히 이곳은 비잔틴시대 수도원중에 프레스코 성화가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아니 현재 터키 국내에서 가장 프레스코화가 가장 잘 보존된 곳이라 할 수 있다(왜그런지는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쉬멜라 수도원 주변 경관은 뛰어났다.  그랜드캐년보다 더 아름다운 협곡이 펼쳐져있다.   방문한 날은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니 먼지는 씻겨내려가고, 폭포수는 힘차게 흘러내렸다.  운무 낀 쉬멜라 수도원의 운치는 뭐라 말로 다 표현하지못하겠다.  




                 그 다음날 아침 일찍 메이단 공원 밑에 시외버스터미널에 가서 돌무쉬를 타고 우준괼에 갔다.  우준괼은 마치 산정호수 같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운무 낀 호숫가를 한바퀴 돌아봤다.  비싼 커피(우리나라 스타벅스 커피값과 같음)를 한잔 마시고 우준괼의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셨다.  트라브존 지역은 우기인지 연일 비가 내렸다.  내 취향은 오히려 해가 쨍쨍나는 날보다 운무 낀 정취가 더 좋았다.   입장료가 없어서인지 더 좋았다(쉬멜라 입장료는 300리라, 터키국민은 80리라).   저녁때 돌아오는 돌무쉬안에서 한참을 졸았다.  엄마가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셨다는데, 엄마가 누워있어야할 자리에 엄마가 보이지않았다.  엄마를 찾아나서려는 순간 잠이 깼다. 눈을 뜨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다 내렸고, 돌무쉬는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시동을 걸고 있었다.  운전기사도 뒤에서 졸고 있는 나를 발견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후다닥 돌무쉬에서 내려서 공항쪽으로 가는 돌무쉬에 올라탔다.  트라브존 시내는 공항에서 메이단 공원까지가 메인 스트리트이며, 공항 – 오타가르(장거리 시외버스 터미날) – 메이단공원으로 이어지는 거리는 약 8킬로미터 정도 된다.  숙소에 돌아오니, 하룬과 데니즈 부부가 반기면서 주인아저씨가 기다리다가 집으로 돌아갔다면서 오늘 숙박비는 250리라만 받아두라고 했단다.  너무 감사했다.  



             다음 일정으로 지중해에 면한 안탈리아를 가려고 했으나, 안탈리아에서 민박과 투어가이드를 겸하는 유투버가 여러가지 사유를 들어서 지금은 안탈리아를 방문하는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고 해서 카파도키아 괴뢰메로 행선지를 바꾸었다.   유투버가 왜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고 했는지 다음과 같은 일을 겪으면서 알게되었다.   이제 귀국까지 9일밖에 안남았는데 많은 곳을 돌아다니기는 무리라고 생각해서 카파도키아 지역을 돌러보고 이스탄불을 둘러본 다음에 귀국할 예정이었다.  카파도키아는 20년전에 가봤는데, 그 경관이 너무 아름답고 인상적이어서 20년간 괴뢰메에 대한 환상을 품고 살았다.  언젠가는 다시 가보리라고 생각했는데, 그언젠가가 바로 지금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짐을 챙겨서 트라브존 시외버스 터미널로 갔다.  조지아도 마찬가지였지만, 터키도 정한 요금이 없었다.  똑같은 행선지를 여러 버스회사들이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버스회사마다 요금이 달랐다.  트라브존에서 괴뢰메 까지는 15시간 걸린다.  데니즈 부부가 카미콕 이라는 회사를 추천했다.   요금은 499리라.  막상 버스회사 티켓 판매카운터로 가니 520리라를 불렀다.  그래서 미리 사진으로 찍어둔 obilet.com에서 검색한 결과를 보여주었다(터키 여행 내내 결코 심카드를 사지않았다.   필요하다면, 미리미리 와이파이존에서 검색한 결과를  사진으로 찍어놓았다).  그랬더니 갑자기 500리라만 달라한다(티켓 요금은 끝자리가 9리라로 끝나지만, 결코 어느 버스회사 카운터에서도 1리라를 거슬러주지않는다).  아침 10시에 500리라를 주고 오후 5시 출발 티켓을 예매했다.  남은 7시간동안 메이단 공원 주변을 돌아다니려했다.  우선 트렁크를 어디다 맡겨야좋을지 코인락카가 어디인지 물어보니 코인락카는 없으며, 바로 자신들 카운터 앞에 놔두어도 된다고 했다.  감시카메라가 위에서 비추니 염려하지말라고 했다.  하기사 트렁크 안에는 젖은 빨래감 밖에 들어있지않았으니 트렁크를 잠그지도 않았다.   마음놓고 메이단공원 아래 흑해 주변을 돌아보았다.  파도가 거센탓인지 보트 투어도 없었고, 낚시하는 사람도 눈에 띄이지않았다.   다시 메이단공원 윗쪽으로 올라와서 점심을 먹었다.  20년전에는 이렇지않았는데, 지금의 터키 모든 음식은 엄청 짜다.  햄버거도 짜고, 고등어 케밥도 짜고, 치킨 케밥, 양고기 케밥, 소고기 케밥 및 모든 음식들에 소금을 엄청 넣고 있었다.  여행하는 내내 평소 비싸서 못사먹던 체리를 마음껏 사먹었다.  1킬로그램에 우리돈 4,000원 정도 된다.  음식이 안맞으니 더욱 더 체리로 배를 채웠다.  여러 유투버들이 터키 음식 맛있다고 선전하고 있지만, 터키를 잘 아는 지인과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면 결코 일반 여행객은 특수하게 맛있는 식당은 찾아갈 수 없다.  일반 식당 대부분에서 팔고 있는 음식은 엄청 짜다.     


             출발시간보다 2시간 앞서서 3시에 터미널로 돌아왔더니, 아뿔싸 내 트렁크가 보이지않았다.  버스회사 카운터에 내 트렁크 어디에 두었느냐고 했더니 그들도 당황해서 감시카메라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물론, 내게는 안심하라며, 누군가가 자신의 트렁크인줄알고 잘못 들고 갔으니 곧 가져올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자의 트렁크는 어디 있느냐고 했더니 그사람 트렁크는 창고에 넣어두었다고 한다.  그럼 내 트렁크는 언제 다시 가져올거냐고 했더니 지금 오고 있으니 안심하라고 했다.  그렇지만 4시반이 되어도 트렁크는 되돌아오지않았다.  내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내 트렁크 찾아내놓으라고.   내 트렁크를 지금 돌려주러 오고있다면 내 트렁크를 사진으로 찍어서 영상이라도 보내달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내 트렁크를 바꿔가지고 간 사람하고 통화를 시켜달라고해도 요지부동이었다.  마침내 버스가 출발하기 10분전 버스 회사 간부가 내 트렁크를 영상으로 보여주었다.  괴뢰메로 가는 도중에 ‘삼순’이라는 도시가 있는데, 내 트렁크는 ‘삼순’ 지역 터미널에 도로 가져다놓았으니 안심하라고 했지만, 나를 안심시키려고 감시 카메라에 찍힌 사진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되었지만, 어찌하겠는가?   그래서 “대체 ‘삼순’이라는 도시가 얼마큼 떨어져있느냐?  몇시간이나 걸리느냐”고 해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래서 우선 내 차비 500리라를 돌려달라고 했다.  내 트렁크를 찾는 즉시 차비를 내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안탈리아에 거주하는 유투버와 통화를 했다.  터키말이 능숙하여 버스회사 직원과 통화하여 내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 유투버는 나를 안심시키며 진정시켰다.  500리라가 3만원 정도밖에 안되지만, 내 트렁크를 찾는 일종의 보험료로 생각하고 돌려받아두었다.   5시 출발 괴뢰메행 버스를 탔지만, 트라브존에서 삼순이라는 도시까지 7시간 걸리는 거리였다.  7시간동안 긴장감으로 눈을 붙이지못했다.   밤 12시가 다 되어 삼순 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회사 사무실에 들어가니 내 트렁크가 있었다.   그리고 도둑의 트렁크도 내가 타고 온 버스에 실려서 따라왔다.  도둑의 트렁크는 버스회사 직원 말마따나 창고에 넣어둔 것이 아니라, 버스가 출발하기전에 버스회사 카운터 앞에 놓여있던 물건이었다.  시커먼 때가 묻은 트렁크에 무엇인가 빵빵하게 채워넣고, 때탄 플라스틱 물병을 매달아놓았다.  출발시간이 다가오자 다른 사람의 트렁크는 다 버스에 실었는데,  그 도둑의 물건만 버스회사 카운터앞에 덩그러니 놓여있어서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전말은 이러했다.   내 추측이기는 하지만.  내 트렁크에는 한글과 영어로 이름과 전화번호를 크게 적어놓았으니 착각하여 잘못 가지고 갔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오히려 외국사람의 것이니 트렁크안에 돈될만한 물건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져갔으나 단돈 1원 한푼도 들어있지않았고, 노트북 같은 것도 없었다.   단지 냄새나는 빨랫감밖에 없으니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도둑은 만약을 대비해서 자신의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쓰레기를 가득 채운 트렁크를 버스회사 카운터앞에 놔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왜 7시간 걸리는 ‘삼순’까지 가서 돌려주었겠는가?  아마도 삼순 지역에는 그 도둑의 경찰 커넥션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실망과 절망의 괴뢰메 :

             마침내 아침 8시에 괴뢰메에 도착했다.  아침에 본 괴뢰메는 20년전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도착하기전 8인실 도미토리를 450리라에 예약을 하자마자 철커덕 카드 결제가 되어버렸다.   예약해둔 숙소로 갔다.   조지아에서 만난 여행객들도 괴뢰메 물가가 비싸다고 말했기 때문에 물가는 소문을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도착한 00케이브 호스텔이라는 말마따나 동굴 같은 지하방에 8대의 침대를 들여서 투숙시키고 있었다.  지하방에 들어서자마자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숙박을 취소하겠다고 했더니 순순히 취소해주겠다고 한다(아고다에서는 취소 자체가 안된다고 엄포를 놓고있다).  한시간동안 괴뢰메 근처의 숙소를 알아보니 터키 평균 호스텔 숙박비의 2배 이상을 받고 있었다.   아침에 9시에 투어버스가 출발한다고 하니, 더 이상 숙소를 알아보지못하고 그린투어에 참석했다.  그린투어(괴뢰메 중심지로부터 100킬로미터 떨어진 유적지까지 이동)는 미화 60불, 레드투어(근교 투어)는 미화 40불.  그린투어에는 우찌히사르, 데린구유 지하도시, 셀리메 수도원, 점심식사, 으흘랄라 협곡, 관광상품 판매소 방문 등이 일정에 포함되어있다.   9인승 봉고차에 50대의 ‘귈렌’이라는 남자 가이드가 배정되었다.  스페인-페루 커플, 미국 모녀, 카자크스탄 커플, 나 총 7명이 동승하게 되었다.  귈렌은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영어로 설명해주었다.                  


우찌히사르 성채 및 비들기 계곡 : 

             우찌히사르 성은 하나의 거대한 바위를 깎아 만든 성채이다.  그 아래쪽에 비들기 집들이 있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로마인들로부터 도망쳐서 이곳에서 기독교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았으나, 7세기경 이슬람이 침공해오자 동굴이나 바위에 구멍을 뚫어 지하도시를 건설하여 신앙을 지키며 살았던 곳이다. 이들의 양식으로 비들기를 길렀다한다. 

* 괴뢰메에는 벌룬 투어라고 열기구를 타고 30분동안 상공에 머무는 투어가 있으나 가격은 1인당 25만원이다.  고작 상공에 머무는 시간은 30분이 채 되지도않는데, 생명보험비용치고는 너무 비싸다.  열기구 대신 비행기타고 외국 나오는 것으로 만족하련다.  


데린구유 지하도시 : 

              터키어로 ‘깊은 우물’이라는 뜻으로, 환기구 역할을 하는 직경 1m 규모의 구멍이 도시를 수직으로 관통하고 있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전성기는 동로마 제국 시대로, 당시 그리스도교도들이 무슬림 아랍인튀르크족의 습격을 받자 피신처로 이용했다. 14세기 티무르가 공격할 때는 정교회 원주민들의 피신처로 이용되었다. 심지어 20세기까지도 카파도키아의 그리스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탄압을 피해 피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튀르키예 전쟁 이후 1923년 그리스와 튀르키예의 주민 교환으로 버려졌다가 1963년 재발견되었다한다.  이 데린구유는 2만 명이 살 수 있는 크고 아름다운 규모이다. 방과 방은 통로로 이어졌고, 총 11개 층이 있고 지하 85미터 지하 7층 규모인데, 안전상의 문제로 지하 30m 까지만 공개 중이라고 한다.  곡물창고, 포도주와 기름 착유기, 식당, 학교와 예배당이 있었다고 한다. 빛도 공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지하동굴에서 사람들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중앙에 있는 수직 환기구와 주위의 보조 환기구들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를 절망과 실망에 빠뜨린 것은 20년전에 보았던 데린구유가 아니었다.  많은 관람객이 땅을 밟고 지나다니는 동안 자연 마모로 데린구유가 무너져내리고 있었지만, 무너진채로 그대로 방치해두었고, 우물에는 온갖 쓰레기가 쌓여있었다.  가이드 귈렌은 내 실망스런 모습에 어쩔줄 몰라했다.  에르도안 정부가 들어서고나서 모스크는 한국의 교회처럼 100미터마다 하나씩 세워졌지만, 초기 기독교도 박해시대때 유적지는 일부러 파괴했는지 다 망가졌고, 프레스코화는 다 지워버렸다.  특히 20년전 괴뢰메에서 보았던 프레스코화는 하나도 남아있지않았다.   이곳에서 사진은 한장도 찍지않았다.  


셀리메 수도원 : 

             기독교 박해를 피하고자 으흘랄라 끝자락에 바위산을 깎아 만들었다.  8세기 수도사들이 사용했던 예배당과 주방 및 홀 터가 있었다.  20년전에는 희미했지만, 벽화와 문자가 남아있었고, 천장에는 프레스코화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지워버렸다.  많은 관람객이 땅을 밟고 지나다니니 자연 마모로 진흙더미가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에르도안이 이슬람 세력을 등에 업고 정치를 한다지만, 이건 아니다.  세계문화유산을 독재자 한사람의 명령으로 지워버리다니.   나의 실망감을 가이드 귈렌은 눈치채고 미안해했다.  자신은 소시민이라 정부에 어떻게 건의할 수 없으니, 날더러 한국에 돌아가면 한국 주재 터키 대사관에 글로 써서 이런 얘기를 전하라고 부탁했다. 

                                                셀리메 수도원 입구

20년전 방문했을 당시에는 천장과 벽면에 프레스코화 있었으나 에르도안이 몽땅 지워버림


점심식사 : 

             으흘랄라 계곡 멜렌디즈 강을 따라서 계곡물이 흐르는 곳에 레스토랑들이 늘어서있다.  계곡물 옆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그린투어 60불은 비싼 값이지만, 그나마 점심식사를 맛있게 해서 그 섭섭함이 상쇄되었다.  다행히 미트볼은 짜지않았다.  여행와서 제대로 식사를 못했기에 점심은 너무 맛있었다.  그러나 한국처럼 한그릇 더 서비스는 없었다.   

으흘랄라 계곡 트랙킹 :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니 계곡을 따라 나있는 오솔길을 1시간 정도 걸으며 트레킹을 즐겼다. 계곡 양옆에는 비잔티움 시대에 은둔 생활을 하던 수도사들이 만든 100여 개의 교회와 수도원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지만, 그린투어 일정에 그런 교회와 수도원 방문이 들어있지않았다.   계곡물이 흐르는 양쪽에는 포풀러 나무가 우거져있었다.   그 오솔길을 1시간 트랙킹하고 되돌아나오는 것이 전부였다.   트랙킹 후에는 관광상품매장을 방문하여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오전에는 데린구유 들렀다가 보석을 파는 매장에도 들렀었다.  오후 마지막 일정으로 관광상품매장을 들르는 일정이 들어있으며, 이곳에서 터키 커피를 비롯하여 로쿰(젤리의 일종), 말린 과일, 차, 수공예품 등을 팔고 있었다.  나는 괴뢰메에 너무 실망하였기 때문에 이런 것들은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않았다. 

그린 투어를 다 마치고 아침에 출발했던 장소로 돌아오니 6시가 되었다.  외국인에 대한 바가지 요금과 유적지 파괴를 생각할수록 괴뢰메가 정이 떨어졌다.  더 이상 괴뢰메에 머물고 싶지않았다.    밤 8시에 이스탄불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그동안 저녁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식당을 찾아보니 마침 한국 식당 2군데가 눈에 띄였다.  문 입구에 “한국인이 직접 운영합니다”라는 문구가 붙어있어서 2층으로 올라갔더니 김치찌개 및 순두부 찌개를 비롯하여 음식값은 평균 3만원 정도였다.  타국에서 폭리를 취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에 더욱 정떨어졌다. 옆집 한국 식당은 가격은 조금 싸지만, 한국인이 직접 요리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터키 종업원에게 나는 식사를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지금 손님이 없으니 이곳에서 샤워 좀 하고 가면 안되겠느냐고 했더니 그러라고 한다.  24시간 씻지를 못했는데 샤워를 하고나니 날아갈 것 같았다. 터키 목욕탕(하맘)에 가서 씻고 싶었지만, 이용료가 25,000원이다.  샤워 한번에 25,000원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약간의 팁을 주고 나왔다.  이제 7일 남은 일정인데, 그동안 피로가 너무 쌓여서 어서 이스탄불에 가서 쉬고 싶었다.   


이스탄불 도착 : 드디어 물건을 도둑맞다. 

             괴뢰메에서 12시간 걸려서 아침 8시에 이스탄불 오타가르(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너무 피곤하고 쌀밥과 김치가 먹고싶어서 한인민박에 가서 쉬고 싶었다.  인터넷에서 아주 훌륭한 한인 민박이라는 블로그를 읽고 그곳으로 가려고 버스 카운터 직원에게 사진으로 찍은 주소를 보여주고 교통편을 알려달라고 물어보는 사이에 보조밧데리, 충전케이블, 콘센트를 배낭에서 빼갔다.  값으로 치면 2만원 정도된다.  트라브존에서 잃어버린 트렁크를 운좋게 삼순에서 되찾았으나 결국은 시시한 물건으로 대신 도둑맞았다.   


한인 민박 : 터키사람처럼 변해버린 민박들  

             민박집에 도착했더니 몹시 배가 고파서 숙박비를 더 낼테니 밥이 없으면 우선 라면에 김치만 먹어도 된다고 했더니, 겨우 귀리밥 5숫가락에 시어터진 오이 절임을 내놓는다.  너무 황당했다.  민박에 도착하기전 문의했을 당시 조식을 먹으면 49,500원, 잠만 자면 41,500원이라고 했는데 다음날 조식이 어떻게 나올지 뻔해서 잠만 자겠다고 했다.  주인은 귀리밥 5숫가락 먹은것을 500원으로 계산하여 42,000원 달라고하여 받아챙겼다.  이 민박집 남자에게 트라브존에서 트렁크 도둑맞았다가 다시 삼순에서 돌려받은 얘기, 민박집 도착하기전 보조밧데리, 충전케이블, 콘센트를 배낭에서 누군가가 빼갔다고 했더니, 민박집 남자 왈, “너무 쉽게 보여서 그런거 아녜요” 그러니까 내가 너무 쉽게 보여서 도둑을 맞았다는 소리인데, 이상한 민박집을 박차고 나오고 싶었지만, 너무 피곤하여 한발자국도 옮길 수 없어 그날밤은 민박집에서 묵기로 했다. “이건 건드리지 마라, 화장실 바닥에 물떨어뜨리면 안된다, 설거지를 반드시 해라, 심지어는 숙박객들을 위해서 이스탄불 맛집을 프린트해놓은 것이 있는데, 이 프린트물이 외부로 새어나가면 법적 조치를 하겠다”는 등 이성이 빗나간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인터넷에서 어떤 여자가 아주 훌륭한 민박집라고 선전하고 있다.  다른 한인민박집에 묵으려고 이스탄불 외곽에 있는 집을 직접 찾아갔다.  이집 민박 주인은 터키에 관한 책을 썼고, 터키 남자와 살면서 민박집과 투어를 같이 운영한다는 곳이다.  찾아갔더니, 터키 남자가 자기 마누라는 한국으로 갔다고 한다.  그렇게도 터키가 좋다면 왜 다들 한국으로 돌아가겠는가?   민박집 남자에게 터키가 이상하게 변해버렸다고 했더니, “터키가 그렇게 나쁘다면 자신들이 터키에서 왜 살겠느냐”고 했다. 그렇지만, 터키가 좋다면 당신 마누라는 왜 한국으로 가버렸느냐고 한마디 하려다 말았다.   한인민박 숙박비가 현지 숙소보다 비싼데도 가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현지 정보도 알고 쌀밥과 김치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겠는가?


이스탄불의 지리 : 

             이스탄불은 보스포로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이 나뉜다.  20년전 이미 토카프 궁전을 비롯하여 유명한 곳은 다 다녀봤으니, 터키 국민의 6배에 해당되는 바가지 입장료를 지불하면서까지 다시 방문하고 싶지는 않았다.  도착한 첫날은 흑해와 보스포로스 해협이 처음 마주하는 곳으로 갔다.  흑해를 가만히 보면 갇힌 내해같으나, 흑해는 보스포로스 해협 - 마르마라해 - 다르다넬스 해협 – 에게해로 흘러들어가 지중해와 합류한다.     


탁심 광장 :

             이스탄불에서 가장 핫한 곳은 역시 탁심 광장이다.   탁심은 팽이처럼 생겼는데, 팽이 꼭대기에 광장이 있고, 팽이 아래쪽을 향해 가파른 언덕길에 주거지가 형성되어있다.  언덕길과 골목의 경사가 아주 극심하다.   팽이 아래쪽은 보스포로스 해변이다. 광장은 여러나라에서 모인 관광객들로 하루종일 붐빈다.  아침에 탁심 광장에서 한국 목사님을 만났는데, 150리라의 식사를 했는데, 850리라를 청구했다고 한다.  그래서 경찰까지 불렀는데, 경찰은 터키 식당 주인편을 들어주어서 할 수 없이 850리라를 물어주었다고 한다.   20년전과는 달리 이제 터키는 아주 이상한 나라로 변해버렸다.  너무 피곤해서 당장이라도 귀국하고 싶었다.  일정대로 한다면, 아직 6일이나 남았다.


불친절한 이스탄불 공항 직원들 :

             다음날 아침 민박 주인에게 일찍 귀국할 수 있는지 공항에 직접가서 알아보겠다고 공항 가는 교통편을 물어봤다. 터키에 8년이나 살고있다는 민박 주인은 토요일에 항공사 직원들이 근무하지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임에도 내가 직접 공항에 가서 알아보겠다는 것을 말리지않았다.  대충 교통편을 알려주면서 오늘이 토요일인데…라면서 얼버무렸다.  물론 사전에 아시아나항공이 일주일에 몇편이나 이스탄불에 취항하는지 물어보지않았던 내 잘못이 컸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처럼 생각하고 무작정 공항에 가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줄 알았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와이파이존에 가서 1시간짜리 무료 와이파이 이용권을 받아 와이파이를 열었다.  그리고나서 인포메이션센타로 가서 아시아나 항공 사무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모른다고 한다.  그럼 아시아나 항공사 이스탄불 지점에 전화 좀 해줄 수 없겠느냐고 했더니 해줄 수 없다고 한다. 공항내에 공중전화는 없으니 심카드를 사서 전화해야한다.  난 오늘이라도 떠나려고 하는데, 단 한번 전화하려고 900리라나 하는 심카드를 사고 싶지는 않았다.  이스탄불 공항에 동양사람 조차도 보이지않았다.  이스탄불을 취항하는 항공사들 대부분은 중동지역 항공사들이었고, 아시아쪽을 취항하는 항공사는 매우 드물었다.  공항에서 2시간을 방황하는데, 마침 북경으로 떠나는 중국 남방항공 카운터에 중국인들이 보였다.  젊은 중국 남자에게 상황을 설명했더니 아시아나 항공 이스탄불 지점으로 전화를 걸어주었으나, 아무도 전화를 받지않았다.  그 사람이 다시 아시아나 항공 한국 전화 1588-8000으로 전화를 걸어주었다.  수신 대기 시간이 오래걸려서 더 이상 미안해서 끊으라고 하고 고맙다고 말하고 공항을 나왔다.  내일은 일요일이니 어차피 내일까지는 떠날 수 없음을 알고 체념하고 숙소를 노스탈지 호스텔로 옮겼다.  


노스탈지 호스텔 : 러시아 젊은이들과 우크라이나 젊은이들의 피난처

             노스탈지 호스텔 하루 숙박비는 200리라(약 12,000원)에 조식과 석식을 제공한다.  조식은 아침 9시에, 석식은 저녁 6시에 준다.  이 호스텔에 머무는 사람들은 대개 러시아 젊은이들이다. 우크라이나 젊은이도 있다.  러시아인들중에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은 이미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로 떠났다.  돈많은 사람들은 조지아와 카자크스탄에 몸을 피하고 있다.  그축에도 끼이지못하는 러시아인들은 터키에 숨어들었으나, 터키가 워킹비자를 주지않으니 바깥에서 일할 수도 없고, 어서 빨리 전쟁이 끝나서 고향으로 돌아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있다.   곤궁한 러시아인들은 하루 12,000원으로 9시에 아침을 아주 든든하게 먹고 하루종일 숙소에서 빈둥거리다가 6시에 저녁밥을 먹고 배를 채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인들은 싸우지도않고 서로 위로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저분하고 낡은 숙소이지만, 이들에게는 그나마 아늑한 피난처이다. 


한국을 사랑하는 터키 청년 :

             아침에 민박집 주인에게서 자신의 충전기와 충전케이블을 가져갔으니 가져오라는 카톡이 왔다.  이스탄불에 와서 급하게 충전기와 케이블을 사서 민박집에서 충전시켰는데, 모양이 비슷하니 나도 모르게 바꿔가지고 나왔다.  내것을 대신 가지면 되지않겠느냐고 했더니, 자신의 것은 삼성 정품이니 가져와야한다고 했다.   탁심 광장에서 민박집까지 언덕을 다시 내려가기가 힘들었고, 민박집 주인 남자 얼굴도 마주치기 싫었다.  그래서 탁심광장 코너에 있는 탁심 힐 호텔 카운터에 맡기겠으니 찾아가라고 했다. 과연 이 호텔에서 숙박하지도 않은 사람의 물건을 맡아줄지 걱정을 하면서 탁심 힐 호텔로 들어서려는 찰나 안녕하세요 하고 누군가가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이 호텔에서 일한다는 30대의 젊은이 젬이었다.  5년전에 한국에서 1년동안 가구공장에서 일했다고 한다.  한국어가 유창했다.  젬이 호텔 조식을 제공해주었다.  젬에게서 그동안 터키에서 일어나 사건들을 얘기했더니, 내가 죽을 수도 있었는데 참으로 운이 좋았다고 했다.  20년전의 터키가 아니라고 한다.  터키에 아는 사람이 없으면 혼자서 여행하기 힘든 나라가 되었다고 했다.  며칠전에도 탁심 광장에서 술취한 러시아 젊은이가 칼에 찔려서 죽었다고 한다.  한인 민박집 남자도 이미 터키 사람이 다 되었네 라고 젬이 말했다.  오늘이 일요일이라서 당장 항공사에 연락할 수가 없으니 내일 아시아나 항공 이스탄불 지점에 전화해주겠다고 하여 다음날 호텔 로비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에드리네 : 터키, 불가리아, 그리스 국경 접경도시

             젬과 헤어지고나서 터키, 불가리아, 그리스 국경도시인 에드리네로 가서 돌무쉬를 2번이나 갈아타고 불가리아 국경앞에까지 왔다.  국경 앞에서 세관원이 걸어서는 국경 못넘는다 차량으로만 갈수있다고 막았다.  마침 이스탄불에서 소피아로 향하는 버스가 국경 앞에서 대기하고 있기에 사정해서 첫번째 관문을 통과했다. 총5곳의 관문을 통과해야하는데 터키쪽이나 불가리아 쪽 세관원들이 걸어서 국경 통과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라면서 통과시켜주었다. 아, 그런데 터키 국경 앞까지는 돌무쉬를 타고왔는데 불가리아 쪽으로 나오니 아무런 교통 수단도 없고 오로지  대형 트레일러 짐을 실은 차량들만 줄지어 서있었다. 불가리아 쪽으로 30분을 걸어가니 트레일러와 트럭 기사들 집합소인 레스토랑과 슈퍼 마켓만 있었다.   어떤 운전기사에게 버스 타는 곳이 어디냐고 물어보니 이곳에서 12키로 떨어진 터미널에 가야만 시내버스와 불가리아 각처로 나가는 버스가 있다고 한다.  더 이상 불가리아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슈퍼마켓에서 치즈 4덩어리를 사서 배낭에 넣고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가고자 국경 관문을 통과하고 있는데 어떤 부부가 탄 자가용이 다가오더니 터키쪽 에드리네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최종 목적지가 어디냐고 묻기에 이스탄불 탁심이라고 했더니 자신들도 이스탄불로 가니 이스탄불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오는 도중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고, 서로 얘기도 하고 싶었으나 이 50대 부부는 전혀 영어가 통하지않았다. 간신히 쿠르드족 이라는 사실만 알아들었다.  이스탄불 버스 정류장에 내릴때도 햄버거와 먹을 것을 챙겨주었다.  하루속히 쿠스디스탄 이라는 독립된 국가를 가지기를 기원한다고 말해주었다.  내 몸짓과 말투로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한다. 


아시아나 좌석 확보 :

             다음날 아침 아시아나에 전화해달라고 잼을 찾아갔더니 잼이 또 호텔 조식을 제공해주었다.  마침내 예정보다 이틀 먼저 들어가는 좌석을 확보했다.  아시아나가 수, 금, 토에만 취항을 한다.  오늘이 월요일이니 수요일 저녁 6시 비행기로 돌아갈 수 있었다.  즉시 호스텔부터 옮겼다.  탁심 광장 근처 레반트 호텔로 옮겼다.   


프린세스 아일랜드 : 

             점심때가 되어 보스포로스 보트 투어를 하려고 에미노누로 갔다.  여러 보트들이 보스포로스해협 보트 투어를 호객하고 있었다.  1시간반동안 투어 요금이 250리라라고 해서 50리라를 깎아서 200리라에 올라탔다.  막상 배에 오르니 중국인 4명은 1인당 100리라, 필리핀 이스라엘 영감 커플에게는 500리라, 내게는 200리라.  안타겠으니 요금 돌려달라고 하니 돌려주었다.  내려서 눈을 돌려보니 옆에 긴 줄이 있어서 물어보니 프린세스 아일랜드 간다고 한다. 운항시간은 1시간 20분.  가만히 생각해보니 보스포로스해협을 일주하는것보다 아일랜드로 가는게 가성비가 훨씬 좋을것 같아서 프린세스 아일랜드로 간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섬이었다.   여의도만한 크기였고, 언덕에 아름다운 집들이 줄지어 있다.  걸어다니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자전거를 빌리려고 했다.  렌트 요금은 시간당 50리라.  그런데 문제는 자전거가 하나같이 브레이크가 말을 안듣거나 제동기가 없거나 하는 것들뿐이었다.  어떤 애들은 잘도 타고 다니지만, 사고날 것만 같아서 결국은 빌리지않고 3시간을 걸어다니다가 저녁때 다시 이스탄불 시내로 돌아왔다. 


레반트 호스텔 :

             옮긴 숙소는 골목안에 있어서 찾기는 좀 어려운 위치였다.  비록 엘리베이터는 없지만 5층에 5인실을 혼자 쓰도록 배려해주었다.  말로는 남녀 혼용실을 주겠다고 했지만 결국은 5층을 이틀간이나 나혼자 묵게 되었다.  이 호스텔은 특징이 있었다.  그 흔한 러시아인 손님도 없었고, 아예 저개발국에서 오는 손님 자체를 받지않는다.  내가 길에서 만난 네팔 여자를 이 호스텔에 소개했더니, 호스텔측에서 이 손님을 거절했다.  

             마지막으로 도둑을 맞았다.  내일이면 집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가벼운 기분으로 저녁을 먹고 탁심 광장을 산책했다.  어떤 아가씨가 내 배낭이 열렸다고 알려주었다. 그래 얼른 배낭을 열어보니 사용중인 칫솔과 마지막 몇방울 안남은 치약과 치간칫솔 고리를 훔쳐갔다.   이런것까지 훔쳐가다니 너무 허탈했다.  훔쳐간 사람은 터키 사람은 아니고 짚시나 난민일 것으로 추측해본다.   에르도안이 이번 재선에 성공한 것은, 난민들 덕택이라고 한다.  에르도안을 지지하는 국민은 사실 얼마 안된다고 한다.  다른나라에서는 안받겠다는 난민을 에르도안은 돈(선진국들이 난민을 수용하는 대가로 준 지원금) 때문에 받고있으니, 난민들은 에르도안을 좋아할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에르도안은 이 난민들에게 선거권을 주었다.  그렇게하여 당선되었다고 한다. 


             아,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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