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해 청정 예능으로 할머니들을 추억하다
'단무지 없는 김밥, 단팥 없는 찐빵'
없으면 어딘가 허전한 것들을 일컫는 말이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단무지와 단팥이 있는데, 내 경우는 커피의 크레마가 그렇다. 거품처럼 몽글몽글 올라온 자태하며, 기분 좋은 황금빛 색깔까지. 특히 쓰디 쓴 커피의 맛을 묘하게 중화시켜주는 느낌이 있어, 내게 크레마 없는 커피는 '단무지 없는 김밥'과도 같다. 최근 씁쓸한 소재를 크레마처럼 포근히 덮어낸 예능을 봤다. <가시나들>,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들이란 뜻으로 MBC에서 방영된 파일럿 예능이다. 일제 강점기, 대동아 전쟁을 거치며 한글을 배우지 못한 할머니들의 한글 공부 도전기를 다룬 이 프로그램은 참으로 정겹다. 할머니들은 짝꿍 연예인과 함께 홈스테이를 하면서 숙제를 하고, 때로는 소풍을 나가기도 한다. 우리가 익숙하게만 생각했던 유년기의 추억 여행은 할머니들에게 잊지 못한 선물이 됐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예능이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는지. 몇 가지 키워드로 <가시나들>의 매력을 알아보자.
'익숙하지만 편안한, 시골길 가는 길'
시골 테마의 예능은 나영석 PD의 성공으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1박 2일>과 <삼시세끼> 시리즈는 바쁜 도시인들의 여행과 시골 판타지를 채우기에 충분한, 활발하면서도 여유로운 예능이었다. <가시나들>의 주무대도 시골이다. 할머니들의 사랑이 가득 담긴 집밥 냄새, 시장에서 들리는 활기찬 목소리, 훌쩍 떠난 소풍의 벚꽃잎까지. 그리운 시골의 풍경이 <가시나들>에서 고스란히 재현돼 있다. <1박 2일>, <삼시세끼>와의 차별성은 '주민들의 생동감'이라고나 할까. <패밀리가 떳다>, <1박 2일> 등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했던 주민들이 메인 캐릭터로 부상하게 되면서 편안한 그림이 그려졌다.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시리즈 같은 익숙하고도 안정적인 시골의 풍경이 일품. 랜선 시골 나들이를 갔다온 것 같다.
'해학으로 풀어낸 시니어 세대의 슬픔'
시니어 세대의 새로운 도전을 주제로 한 이 예능에서 어르신들은 하루하루 늙어가는 신체를 한탄한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다. 짝꿍과 함께 숙제를 하고, 꾸벅꾸벅 낮잠을 이겨내고 복습을 하기도 한다. 그들의 노력은 '여성시대 라디오 사연'이라는 에피소드로 클라이맥스를 찍는다. 한글을 익혀 라디오에 손편지로 사연을 보낸 것. 배우지 못해 아들에게 전화도 걸지 못하고, 주소도 찾지 못한 채 지하철만 수십번을 갈아탔다는 할머니의 사연에 교내는 울음바다가 됐다. 재미 또한 놓치지 않았다. 손주들이 사주는 물건을 보고 손사레를 치면서도 씨익 웃는 할머니들의 모습은 자극적이진 않지만 건강한 웃음을 준다.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들, 가시나들'
이 예능은 시작에 중점을 뒀다. 할머니들의 새로운 도전에 중점을 둔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글 학습 이외에도 할머니들이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체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미션이 등장한다. 문학을 배우고, 봄 나들이를 가면서 할머니들은 유년시절 충족하지 못했던 교육과 추억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게 된다.
캐스팅은 드라마, 영화 뿐 아니라 예능에서도 중요하다. 모든 예능에는 기획의도가 있고, 기획의도에 따라 캐스팅이 이뤄진다. 배우가 드라마에서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시청자들이 극에 몰입할 수 있듯, 예능에서도 적절한 캐스팅은 프로그램 몰입도를 높인다. 그런 의미에서 <가시나들>의 캐스팅은 상당히 파격적이다. 메인 MC롤에 배우를 캐스팅하고, 출연진의 대다수를 아이돌로 채웠다. 구심점이 될 인물이 없다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낯섦은 신선함을 다르게 이르는 말이라고 했다. 신선한 출연진의 등장으로 '시골 홈스테이'라는 소재가 조금씩 달라보이기 시작했다.
'퍼펙트 캐스팅, 문소리 선생님'
주목할 만한 출연진은 학교 선생님 롤의 문소리다. 문소리 배우는 성균관대 교육학을 전공한 엘리트로, 지적이면서도 소탈한 이미지가 시골학교의 선생님과 퍽 어울린다. 인상적이었던 건 할머니, 어머니, 자식의 3대 구성이었다. 노년세대와 MZ세대를 이을 수 있는 중장년층 어머니의 역할을 문소리가 훌륭히 소화해냈다. 문소리는 공부에 서툰 할머니께 친절히 설명을 하고, MZ 출연진들의 부모세대를 향한 그리움을 경청했다. 시대감 또한 뒤쳐지지 않았다. 청일점 짝꿍 장동윤의 눈물에 '남자도 울죠 사람인데'라며 시청자들과 할머니들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자연스레 제시했다. 문소리는 할머니에게 한글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세대 간 소통과 이해를 돕는 교량의 역할을 <가시나들>에서 톡톡히 해냈다.
'어디서 이렇게 손주 삼고 싶은 사람들만 골랐을까?'
타 출연진의 약진도 돋보였다. 중국 출신의 아이돌 우기가 할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저도 함께 배워가는 거예요'라고 말했던 장면. 저런 손녀딸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할머니들께 살가웠던 최유정. 백내장 수술을 한 할머니께 사비로 비싼 안경을 선물해줬던 장동윤. '쑥을 먹으면 기분이 좋으니까 눈웃음이 들어가죠?' 부산 출신 아이돌 이브의 상냥함까지. 손주 같은 짝꿍들의 모습으로 입꼬리는 내려갈 줄 몰랐다.
[개인적 경험]
- 고등학교 시절, 할머니들께 한글을 가르쳐드리는 멘토링을 했는데 그 때 생각이 많이 났다. 특히 노래 가사를 적으며 할머니들과 함께 공부를 했는데, 요즘도 <모르시나요>라는 노래를 들으면 그 때의 생각이 나게 된다.
- 할머니께서 레슬링을 애청하는 장면을 통해 할머니에 대한 편견이 사라졌다. 나이에 국한되지 않고, 재밌는 취미를 가질 수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 우리 엄마도 쇼미 비오 팬이시니까!
[에피소드 요약]
- 간략한 회차 요약
한글 수업 → 짝꿍 결정 → 홈스테이 → 문학 → 소풍 → 보이스 피싱/안전 교육 → 졸업식 → 에필로그
[연출]
- 중간챕터를 넘어가는 애니메이션, CG가 아쉽다. <유퀴즈>나 드라마 오프닝처럼 시골의 한적한 장면을 찍고 제목을 설정하는 것이 좋았을 것 같다.
- 시를 읊는 연출이 좋았다. 현대자동차 광고 느낌이 물씬났다. 특히 마지막회 에필로그, 문소리의 자작시 <눈물을 먹는다>는 <가시나들>에서 볼 수 있었던 모성애의 끝판이라고 생각된다.
[리모델링 기획안]
- 짝꿍들이 하나의 고민을 가지고 와서 시골에서 홈스테이를 하고, 할머니들과 고민상담을 하는 주제로 넘어가는 포맷으로 넘어갔다면 어땠을까 싶다. 학교에서는 짝꿍이 할머니를 가르치지만, 집에서는 할머니가 짝꿍을 가르치는 느낌으로. 영화 <인턴>과 전달하고자하는 메시지가 분명하며, <가시나들>의 의미인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들과도 일맥상통할 것 같은데
[아이디어]
- 외국 노인들이 등장하는 예능은 왜 없을까?
- 할머니, 할아버지가 좋아할 것 같은 영상을 만드는 '영상 제작기' 예능,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반대로 손자들이 좋아할 법한 영상 제작. 남녀, 노소, 외국인 내국인, 교사와 학생, 스님과 목사 등등으로 확장 가능
안타깝게도 <가시나들>은 4부작 파일럿 방송을 끝으로 종영됐다. 시청자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공익성과 수익 사이에서 방송사들은 오늘도 갈등한다. 개인적 생각으로, 이런 예능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하하' 집 떠나가듯 웃는 것도 웃음이지만, 기분 좋은 미소도 웃음의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가시나들>처럼 포근한 크레마 같은 예능을 만들고 싶다.
덧, 가시나들의 뒷이야기는 권성민 PD님의 브런치 글에서 더 볼 수 있다.
https://brunch.co.kr/@kwsungmin/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