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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리왕 Apr 14. 2023

세상이 무너질 땐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directed by  천카이거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우리 곁을 떠난 스타, 장국영. 이 표현이 진부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는 정말 그렇게 떠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장국영의 영화를 감상할 때 영화의 안과 밖을 구분하여 감상할 수 없다. <아비정전>의 ‘아비’, <해피 투게더>의 ‘보영’, 그리고 <패왕별희>의 ‘청뎨이’는 모두 배우와 배역의 층위가 달라붙은 채 관객에게 다가온다. 그 중 <패왕별희>는 앞서 언급한 두 편의 영화와 비교했을 때 완전히 다른 성질의 영화처럼 보인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속 ‘아비’와 ‘보영’은 모두 장국영이라는 ‘개인’을 반사하는 초상이다. 반면 <패왕별희> 속 ‘청뎨이(장국영 분)’는 개인이라기보다 하나의 범주로 볼 수 있다. ‘청데이’라는 인물은 외부 세계에 의해 정체성이 공격당한 사람들, 때에 따라 예술가, 또는 소수자이기도 한 그들 모두를 아울러 이르는 한 명칭에 가깝다. ‘청뎨이’의 얼굴이 되어 관객 앞에 현현하는 장국영은 몸소 세상 모든 ‘청뎨이’들의 대표가 된다. 이는 그가 단순한 스타를 넘어 시대의 아이콘으로 회자되는 이유임이 분명하다.



  많은 관객이 오래도록 <패왕별희>를 사랑하는 까닭은, 역사와 예술 같은 거대 담론 사이 깊숙한 곳에 무척이나 사적인 감정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뎨이’는 애태우고, 질투하고, 욕망하며, 좌절하는 인물이다. 현실의 관객도 마찬가지로 일상에서 이런 감정들을 경험한다. 다만 자신조차 쉽게 들여다보지 못하고 덮어둔 채 살아갈 뿐이다. 반면 ‘청뎨이’에게 분장은 무언가를 감추는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쉽사리 꺼내지 못할 날 것의 내면을 자유롭게 발산하고 외면과 일치하도록 돕는 도구에 가깝다. 더 나아가 ‘청뎨이’는 예술을 통해 영원함이 가능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의미를 찾기 힘든 한 줌의 시간을 살고 있는 현실의 관객에게 그의 순진한 태도는 감동을 준다. 한마디로 ‘청뎨이’는 관객을 대신해 초월을 꿈꾸고, 끝내 파멸을 맞는 인물이다. 이는 차마 초월하지도, 파멸하지도 못하는 유약한 현실의 객석을 위한 일종의 희생 제의다. <패왕별희>는 이렇게 예술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감화를 제공한다.



  그러나 <패왕별희>는 오직 장국영 한 사람에 대해서만 논하기엔 무척 방대하고 또 위대하다. 영화는 중국의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사료(史料)이며, 동시에 무대 예술을 영상화한 모범적인 사례이고, 또 진한 정서의 멜로 드라마이기도 하다. 영화가 다루는 시대는 1926년 북양 정부 시대부터 문화대혁명 11년 뒤인 1977년까지 정확히 반세기다. 시대가 변하면 두 주인공의 경극을 감상하는 관객도 바뀐다. 이를테면, 그들은 국민정부 시대에는 국민당 앞에서, 일제강점기엔 일본군 앞에서 공연한다. 따라서 시대는 곧 관객이고, 그 관객은 항상 두 인물을 향한 폭력의 주체다. 최초의 관객인 ‘장 내관’이 저지른 성폭력을 시작으로 모든 시대의 관객들은 무대를 부수고 배우들을 감금한다. 대중은 예술의 수혜를 누리지만 동시에 예술가들을 공격한다. 이러한 폭력 앞에 배우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최고의 무대를 선보이는 것뿐이다. ‘청뎨이’와 ‘단샬루(장풍의 분)’가 마지막으로 ‘초패왕’과 ‘우희’로 분해 대중 앞에 서는 순간은 다름 아닌 홍위병의 조리돌림이다. 대중의 광기가 폭발하는 곳에서 두 사람은 다시는 없을 최고의(혹은 최악의) 연기로 서로를 ‘비판’한다.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 형체 없이 두 주인공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는 곧 극장 스크린 앞 객석에 앉은 모든 시대 관객의 목소리다. ‘저도 경극의 굉장한 팬’이라고 말하는 우리는, 어떤 시대의 어떤 관객으로 살고 있는가. 공석으로 비워둔 바로 그 자리가 이 영화를 역사적이고 또 시의적으로 만든다.



  <패왕별희>가 세상에 나오고 올해로 딱 30년이 지났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장국영은 세상을 떠났고, 천카이거 감독은 공산당 선전 영화를 제작했다. “이제는 좀 세상이 괜찮아졌죠?”라고 묻는 체육관 관리인의 물음이 무색해지는 부분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우리 곁에는 영화가 남았다는 사실이다. 무대는 순간이지만 영화는 영원하다. 지금보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세상이 곱절은 더 변해도, 두 사람의 순간은 ‘1분 1초’도 빠짐없이 화면 안에 그대로일 테다. ‘평생 함께하자’는 ‘청뎨이’의 부르짖음은 비록 이뤄지지 못했지만, 바람으로나마 영원히 남았다는 점이 우리의 슬픔을 상쇄한다. 아마 내년 4월에도 우리는 다시 그의 바람을 관람할 것이다.


아트나이너 17 강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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