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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리왕 Jun 07. 2023

각각의 레인에는 각각의 맥박이 뛴다.

스프린터 (2023) directed by 최승연

스포츠 명경기를 두고 사람들은 흔히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정해진 시간 동안 그 내용이 변화무쌍하고, 여러 명의 인물이 합을 이루며, 또 많은 관중 앞에서 펼쳐지는 종목들이라면 드라마가 될 법하다. 그 때문에 우리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듯 축구나 농구, 야구 경기를 관람하러 경기장을 찾는다. 그러나 살면서 육상경기 직관을 가본 사람은 몇이나 될까. 새삼스러운 말이다. 우리는 100m 달리기나 창던지기 경기에서 드라마를 기대하지 않는다. 육상은 너무 많은 개인이 너무 짧은 시간 동안 기량을 펼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이야기 없는 개인은 없다. 각각의 레인에는 각각의 맥박이 뛴다. <스프린터>는 선수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주목한다.


 <스프린터>의 구조는 흥미롭다. 가장 먼저 No. 4 ‘현수(박성일 분)’의 경기를 보여주고, No. 3 ‘준서(임지호 분)’, No.1 ’정호(송덕호 분)’의 이야기를 순서대로 제시한다. 그러나 <스프린터>는 단순히 단편 영화를 나열한 옴니버스 영화가 아니다. 영화 절반 가까운 시간을 각 인물을 설명하는데 할애한 뒤에야 ‘스프린터’라는 타이틀을 화면에 띄운다. 이는 지금부터 관객에게 어떤 기록이나 비디오가 아닌 진짜 ‘영화’를 보여주겠노라는 배짱 어린 선언이다. 그리고 그 기대에 걸맞게 영화는 복잡한 욕망과 드라마의 세계를 풀어나간다.


 30대의 ‘현수’, 20대의 ‘정호’, 그리고 10대의 ‘준서’는 같은 시합에 참여하지만 태도는 각자 다르다. ‘현수’는 바람은 선수로서의 죽음을 조금이라도 유예하는 것이다. 그는 한 때 국가대표에 한국 신기록 보유자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기량은 떨어지고 선수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30대의 ‘현수’의 전략은 정공법이다. 그는 본인이 옳다고 믿는, 그리고 경험을 통해 체득한 방법을 우직하게 밀고 나간다. 대신 일체의 도움을 거부한다. 이는 그의 장기인 동시에 한계다. 육상은 혼자 하는 스포츠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혼자 할 수 없는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반면 20대 ‘정호’의 전략은 편법이다. 그는 이미 상당한 실력자지만 국가대표 선발전을 앞두고 기량이 생각만큼 나오지 않자 금지약물을 사용한다. ‘정호’란 인물은 성과주의와 긍정성 과잉에 경도된 세태의 한 극단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정호 혼자 저지른 비행은 혼자의 책임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잘못된 선택은 그의 팀 전체를 뒤흔든다.


 10대 ‘준서’는 아직 자신만의 방법론을 구축하지 못한 어린 세계다. 그에겐 코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어른의 사정’은 그가 문자 그대로 ‘혼자’ 달리도록 몰아넣는다. ‘준서’가 육상을 계속하기 위해선 육상부가 필요한데, 육상부를 유지하면 그의 코치 ‘지완(전신환 분)’이 정규직 교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생존이 최우선이 된 세계에서 학생들의 꿈은 가장 먼저 포기된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연달아 목격했다. 육상은 혼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준서’도 결국 혼자로선 대회를 준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체감한다.


 따라서 <스프린터>는 선수만큼이나 그들의 조력자를 주의 깊게 다룬다. ‘현수’의 아내 ‘지현(공민정 분)’은 ‘현수’의 그 닫힌 세계를 깨고 들어가 조력자를 자처한다. ‘정호’의 실업팀 코치 ‘형욱(최준혁 분)’은 ‘정호’의 욕망에 동조한다. 그리고 ‘준서’의 코치 ‘지완’의 내적갈등은 영화의 장력을 더욱 팽팽하게 만든다. 


 이처럼 영화는 한 줄의 레인이 품고 있는 무수한 곁가지를 포착한다. 결말에 이르면 국가대표선발전 2차전은 종료되고 승패는 결정된다. 하지만 관객 누구도 이야기까지 여기서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는 결승선 너머, 경기장 밖까지 이어지는 레인의 자취를 암시한 채 막을 내린다. 때문에 ‘네 인생이 달렸어. 10초 안에’ 라는 ‘지완’의 대사는 일종의 반어법처럼 들린다. 영화는 오히려 그 10초를 제외한 모든 시간에 어떻게 달릴 것인가를 질문하기 때문이다. 혼자 달릴 것인가, 똑바로 달릴 것인가, 끝까지 달릴 것인가.


 아트나이너 17기 강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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