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흉추(2023) directed by 박세영
김도훈 평론가는 한국 독립 영화의 경향으로 크게 ‘홍상수 스타일’과 ‘다르덴 스타일’이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양자 모두 일상적 공간에서 현시대를 바탕으로 하는 리얼리즘 영화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전자는 개인과 예술을, 후자는 사회 문제와 소외 계층을 탐구한다는 점이 이 둘을 가르는 특징이다. 김도훈 평론가는 단순 분류로서 이 예시를 들었지만, 나에게는 한국 독립 영화의 몰개성을 비판하는 말처럼 들렸다. 홍상수와 다르덴은 최소한의 인물과 카메라로 깊이를 빚는 거장들이다. 따라서 돈 없는 창작자에게 그들을 벤치마킹하는 건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주목할 성취가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한국 독립 영화에 꼭 나오는 대사들’ 같은 빈정거림 섞인 밈도 함께 생겨났다.
<다섯 번째 흉추>는 이러한 한국 독립영화 이분법에서 완전히 자유롭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마지막까지 영화 속 시간과 장소를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언뜻 중요해 보이는 이 정보들은 적어도 영화 내적으론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영화는 강북구, 노원구 등 실존하는 지명을 들어가며 영화 속 공간을 명시한다. 그러나 영화 속 동네가 어디인지 몰라도 감상에 지장이 없을 만큼 영화의 공간은 우리의 일상과 무관하다. 몇 년 몇 월 며칠까지 일러주는 날짜도 아무 의미 없으며 영화는 시대적이지도 않다. 이 정보들은 그저 영화가 가진 강력한 직진성, 그리고 그 직진의 방향을 가르쳐줄 뿐이다. 이 영화의 직진은 시작도 끝도 없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쉼 없이 진행 중이다.
화면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건 사람이 아닌 매트리스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닌 곰팡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곰팡이를 설명하는 많은 정보 중 크게 두 가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곰팡이가 죽음과 공생한다는 사실이다. 살아있는 것 위에는 곰팡이가 피지 않는다. 무생물 위에 붙어 분해자 역할을 하는 균류에게 죽음은 필요 조건이다.
영화의 초반 ‘결(문혜인)‘은 집 밖을 나서려는 남자친구 ’석 (함석영)‘에게 ’너 지금 가면 죽어‘라고 엄포를 놓는다. 이때 ’죽어‘라는 그녀의 말은 곧 ’나와 함께 살아‘라는 의미이다. 뒤이어 ’결‘은 길 위에서 악에 받쳐 ’죽어‘라고 외친다. 그녀의 저주, 즉 삶과 죽음이 서로 등을 맞댄 지점에서 우리의 주인공 매트리스 곰팡이가 탄생한다. 영화 중후반부 같은 매트리스 위에 한 번은 살을 맞댄 연인이, 한 번은 죽어가는 환자가 몸을 누인다. 이처럼 곰팡이는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모두 포괄하는 존재이고 배경이다.
이 곰팡이는 인간이 되기 위해 인간 뼈를 취하고, 그 과정에서 언어도 습득한다. 이때 그것이 반복하는 말은 ‘추워’ 와 ‘죽어’의 중간쯤으로 들린다. 둘 다 눈 내리는 바깥에서 한참을 기다렸을 매트리스 안에 강하게 자리 잡았을 말로 어울린다. ‘추워‘라는 말도 결국 살고 싶다는 의지 표명이다. 영화는 균류를 통해 삶과 죽음을 동시에 경험하는 실존적 체험을 풀어나간다.
반면, 이 영화의 조연인 인간들이 하는 대사는 이상할 정도로 아무 의미가 없다. 이야기를 진행하는 대사도 아니고 정보를 전달하는 대사도 아니다. 인간 인물의 대화만으로는 그들이 정확히 어떤 상황이고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영화조차도 인간들 사이의 일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태도다. 결국 영화 속 인간들의 말은 어떤 방식으로도 영화를 운반하지 않는다. 오직 곰팡이의 말인 ’죽어‘, 그리고 마지막 시퀀스 속 읊조리는 편지가 유일하게 의미 있고 영화를 추동하는 대사다.
영화가 주목한 또 다른 곰팡이의 특징은 바로 아주 오래된 존재라는 사실이다. 곰팡이는 인간보다, 공룡보다,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이 행성에 존재해 왔다. 따라서 곰팡이를 이야기한다는 건 아주 오래된 것들에 대해 논하겠다는 의지다. <다섯 번째 흉추>는 곰팡이를 통해 오래된 욕망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곰팡이를 스쳐 가는 인간들은 모두 무언가 욕망한다. 연인들은 상대를 욕망하고, 부모는 자식의 안녕을 소망하고, 외로운 이는 함께이길 갈망한다. 이 세 가지 바람은 모두 이 행성에서 인류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따라서 <다섯 번째 흉추>는 곰팡이가 오래된 만큼이나 우리 안에 케케묵은, 그러나 여전히 유효한 마음을 다룬다는 점에서 알 수 없는 공감과 서정을 느끼도록 만든다. 곰팡이가 남기는 마지막 말은 자녀에게 ‘비타민 챙겨 먹어’라는 당부다. 따라서 <다섯 번째 흉추>는 ’죽어‘로 시작해 ’살아‘로 끝나는 여정이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것을 담은 그릇의 모양이다. <다섯 번째 흉추>는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디자인의 성취를 보여준다. 피와 살을 이뤄가는 곰팡이를 표현한 연출은 데이비드 린치가 <이레이저 헤드>에서 보여줬던 야심을 연상케 한다. 또한 몽환적인 분위기의 모텔과 용달차 내부 디자인은 단숨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다섯 번째 흉추>는 이미지에 뒤지지 않는 사운드로 이 세계를 완전하게 만든다. 영화의 가장 첫 장면, 이삿짐센터 직원의 윽박과 다른 직원의 중얼거림, 그리고 핸드폰 넘어 들리는 ’결‘의 목소리는 마치 3부 합창처럼 오디오를 물 샐 틈 없이 채운다. 이어서 영화는 음소거, 음성 변조, 곰팡이가 내는 굉음까지 현실에 없는 소리를 찾아 이리저리 조합하며 이 세계를 빚어나간다.
결말에 이르면 곰팡이는 서울에서 연천에 이르고, 시간은 21세기에서 34세기에 다다른다. 정확한 지명과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이 곰팡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먼 곳에 도착했구나, 라는 감각이 중요하다. 그러나 연천 북쪽에도 여전히 세계가 있고 34세기보다 먼 미래도 존재한다. 영화는 끝나도 영화가 품은 직진은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이 곰팡이의 여정에 동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극장 밖을 나서며, 이 기상천외한 독립세계가 사실 우리 세계와 얼마나 닮았는지 체감하는 것.
아트나이너 17기 강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