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파이어 (2023) directed by 크리스티안 페촐트
모든 영화는 시작점이 다르다. 막이 오르고 인물과 대사가 등장해 일련의 예열을 거치고 나서야 ’아, 이제 영화가 시작하는구나‘ 라고 절로 느끼는 순간이 찾아온다. 때에 따라 어떤 영화는 안타깝게도 이 순간이 러닝타임이 다 끝나도록 오지 않는다.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최근작들은 이 시작점이 놀랍도록 빠르다. 어두운 밤,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차 안에 담긴 <피닉스(2014)>의 첫 쇼트. 그리고 고뇌에 찬 ‘파울라 비어’의 얼굴에 멈춘 <운디네(2020)>의 첫 쇼트. 그에게는 단 한 장면만으로 영화를 펼치고 관객을 끌어당기는 솜씨가 있다.
따라서 그의 신작 또한 강렬한 첫 장면으로 관객을 사로잡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어파이어>는 변칙을 시도한다. 영화는 이미지를 유보하고 모든 장면에 앞서 음악을 먼저 들려준다. ‘In my mind’라는 반복되고 고혹적인 선율은 관객의 머릿속에 질문을 심는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고 있는가? 스크린에는 차창에 기대 잠을 청하는 ‘레온(토마스 슈베르츠)’의 얼굴이 대답으로 떠오른다.
‘레온’과 ‘펠릭스(렝스톤 우이벨)’가 함께 별장으로 향하던 중 길에서 차가 멈춘다. ‘이상하다’며 차의 고장을 감지한 펠릭스와 달리 레온은 이상을 느끼지 못하고 둔감하게 반응한다. 차를 세워두고 걸어서 도착한 별장에는 이미 ‘나디아(파울라 비어)‘라는 여자가 머무르고 있었다. 레온은 소설 작업을 마무리할 조용한 장소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나디아의 존재를 고까워한다. 그러나 타고 온 자동차는 고장 난 데다 산불까지 일어 도로가 막혔기 때문에 그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함께 별장에 머문다. 해수욕장 인명구조원 ‘데비트(엔노 트렙스)’까지 합세해 이들이 젊고 뜨거운 여름을 보내는 동안, 레온은 무리를 겉돌며 점점 더 신경증적으로 변한다.
페촐트는 <어파이어>를 소개하며 ‘에릭 로메르의 여름 영화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여름 이야기(1996)>보단 <바톤 핑크(1991)>에 더 가깝다. 레온은 소설을 쓰기 위해 별장에 왔지만, 작가의 장벽(Writer’s Block)에 봉착한 상태다. 이미 써놓은 글은 형편없으며 더 나은 글이 떠오르지도 않는다. 그가 조바심에 젖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주변인들은 여름휴가를 만끽한다. 그들은 ‘레온’에게 거듭 ‘수영하러 가자’고 청하지만 그는 ‘일을 해야 한다’며 한사코 거절한다. 다른 인물들이 수영도 하고, 지붕도 수리하고, 심지어 섹스도 하는 동안 레온은 말 그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의 몽니와 부적응을 단순히 레온 개인의 부박함 때문으로 볼 순 없다. 그는 팬데믹을 거치며 고장이 나버린 사람들의 사회성, 또는 관계망을 투영한 인물이다. 산불로 인해 도시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는 상황은 팬데믹 기간 유럽에서 실시했던 락다운을 위시한 설정처럼 보인다. 나디아와 레온이 창문을 사이에 두고 처음 대면한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가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또 고립된 야외 데크에서 작업을 하는 건 한 마디로 그가 ‘자가격리’ 중이기 때문이다. 일몰 후 레온을 뺀 세 사람이 마당에서 배드민턴을 치는 시퀀스는 이 자가격리의 이미지를 더 정확히 보여준다. 레온은 집 안에 숨어 창을 통해 그들을 바라본다. 세 사람은 야외에서도 빛을 내지만, 레온은 실내에서도 암전 아래 놓여 있다. 이 하나의 장면은 관객에게 아름다움, 우스움, 처량함 등 다양한 감정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이때 흐르는 ‘In my mind’는 관객이 눈앞의 이미지를 넘어 레온의 내면까지 추측하도록 층위를 덧댄다.
그가 고립을 견디는 방법은 우월감을 탑재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 별장의 멤버를 꽤 노골적으로 구성한다. 펠릭스는 흑인, 나디아는 여성, 그리고 데비트는 동독 출신이다. 반면 레온은 이 세 부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무의식에 저들은 ‘이등 시민’, 자신은 ‘일등 시민’이라는 이분법이 자리매김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선다. 반면 ‘글 쓰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거냐’는 레온의 역정은 이 우월감이 얼마나 위태로운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일, ‘글쓰기’에 문제가 생기면서 그의 기반은 흔들리고 자아는 타인과 충돌한다. 이를테면, 레온은 데비트와 처음 겸상한 자리에서 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꾸며내자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 펠릭스의 포트폴리오 아이디어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기 소설을 혹평한 나디아에 대해선 그녀의 직업을 낮잡으며 분개한다. 별장의 동거인들은 이처럼 악의 없이 레온의 불안에 기름을 붓고 부채질한다.
타들어 가는 건 레온의 속뿐만이 아니다. 산불은 영화의 초반부터 언급되지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바람이 바다에서 육지로 불어 이곳은 안전하다’는 태평한 소리에 가려진 탓도 있다. 영화의 절정은 레온의 무능과 그 ‘이등 시민’들의 진면모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출판사 사장 ‘헬무트(마티아스 브란트)’는 레온의 소설 ‘클럽 샌드위치’가 형편없는 작품이라고 확신한다. 반면 그는 펠릭스의 포트폴리오와 나디아의 문학적 소양에 큰 흥미를 느낀다. 이제 레온에게 노동은 불가피하다. 영화 내내 아무 일도 하지 않던 레온은 주방에 홀로 남아 설거지한다. 이 장면은 그의 가장 큰 추락의 순간이자 영화의 절정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바로 뒤이어 언급으로만 존재하던 산불이 그들의 눈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파이어>는 처음부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외부의 사건과 내부의 사건을 연결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었다. 감독은 양자를 잇는 방법에 대한 문학적 고민에 영화적 해법을 내놓는다. 따라서 외부의 산불은 곧 레온 폐부의 천불이다. 내면에 타오르던 불안과 질투, 욕망의 불길이 외부의 산불이라는 사건과 랑데부한다. 면허가 없어 운전하지 못하는 레온의 초라함이 이 모든 소동에 화룡점정하는 것은 덤이다.
결말에 이르러 인물들을 기다리는 건 고르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다. 앞서 나디아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아스라>를 암송한 바 있다. 이 시 속 ‘사랑을 하면 죽는 부족’은 <어파이어> 속 인물들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죽음이 두려워 사랑을 직시하지 못하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사랑에 빠져 죽음을 감수하는 인물도 있기 때문이다. 레온의 자가격리와 독선을 함께 통과한 관객의 눈에 후반부 레온의 사랑 고백은 꼭 뜬금없기만 한 건 아니다. 오히려 이제껏 보아온 영화를 빠르게 되감아 얼마나 많은 기회와 시그널을 그가 차버렸는지 깨닫도록 만든다.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고여있던 레온의 사랑은 실패가 두려워 밖으로 나오지 못하다 허무하게 휘발해 버린다.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사랑과 죽음이 한 몸이라는 뼈 아픈 가르침이 남았다. 모든 것이 타버린 후에야 비로소 레온은 글을 쓰고, 나디아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어파이어>가 페촐트의 전작들과 눈에 띄게 다르다는 건 그를 아는 모두가 공감하는 부분이다. 베를린을 벗어났다는 점, 그리고 전쟁과 분단의 자장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그렇다. 대신 페촐트는 팬데믹이라는 신생 위협, 그리고 그 위협에 놓인 청년에게 주목한다. 그 결과 <어파이어>라는 세태에 민감하면서 동시에 개인의 내밀한 부분을 포착하고, 또 영화가 줄 수 있는 아름다움과 즐거움도 놓치지 않는 빼어난 텍스트가 탄생했다. 특히 영화는 산불을 통해 레온 내면의 불길을 가늠하듯, 레온을 통해 우리의 고장난 내면에 불을 지른다. 불이라는 파괴의 이미지를 통해 더 나은 미래와 더 나은 인간을 기대하도록 만드는 이 영화, <어파이어>는 가히 물 셀 틈이 없다.
아트나이너 17기 강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