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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리왕 Oct 22. 2023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여덟개의 산 (2022) by 샤를로트 반더히르미, 펠릭스 반 그뢰닝엔


 도시에서 찾아온 ’피에트로(루카 마리넬리)‘와 산에 사는 소년 ’브루노(알렉산드로 보르기)‘는 여름 동안 깊은 우정을 나눈다. 그러나 여름이 끝나면 피에트로는 다시 토리노로 돌아가야 하고, 브루노와 십여년 동안 만나지 못한다. 피에트로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고인의 부탁에 따라 무너진 산 속 오두막을 함께 다시 짓는다. 산사람 브루노는 오두막을 지키며 농장을 운영하고, 피에트로는 네팔로 떠나 작가로서 삶을 이어나간다.


 <여덟개의 산>은 비범하다. 관객의 뻔한 기대를 위해 봉사하지 않고 무쇠의 뿔처럼 나아가기 때문이다. 영화는 알프스의 광활함을 고되게 찍어놓고 1.37:1이라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비율로 잘라서 보여준다. 우리는 이런 결정의 이유를 영화 안팎으로 찾을 수 있다. 영화 외적으로 좁은 비율은 인물 한 사람과 그의 내밀함을 보여주겠다는 약속이다. 따라서 <여덟개의 산>은 제목과 달리 산에 대한 영화라기보단 사람에 대한 영화로 봐야 옳다. 영화 내적으론 ‘브루노’의 말마따나 산과 들을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도시인들의 유희거리로 삼으려는 태도를 배격하려는 목적으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영화는 <리틀 포레스트>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같은 한가함을 거부한다. <여덟개의 산> 속 타지(또는 타문화)는 치열하게 배우고 행해야하는 공간이다. 경치를 보고 싶다면 영화관이 아닌 밖으로 나가야한다. 이런 감독의 의지에 따라 극장은 인간과 드라마의 각축장이자 몸을 쓰는 수행의 장소로 기능한다.


 브루노와 피에트로의 역학은 꼭 자전과 공전을 닮았다. 산사람 브루노는 제자리에서 자전하고, 세계를 유랑하는 피에트로는 공전 주기에 맞춰 그를 찾아온다. 따라서 브루노와 피에트로 사이에는 갈등이 아닌 인력이 작용한다. 그 적당한 긴장감은 두 인물이 삶의 문제에 튕겨나가지 않도록 잡고 있으며 동시에 관객을 드라마 안으로 끌어당긴다. 특히 그 인력이 빛나는 순간은 어둠이 깔린 오두막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탁월한 풍경을 자랑하던 낮의 시퀀스와 달리, 이 때는 컴컴한 화면에 눈동자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눈빛이 전하는 진심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무장해제 시킨다. 우리 모두는 인생이라는 산행 중 짐을 내려놓고 벌거숭이로 휴식을 취해도 거리낌 없을 베이스캠프가 필요하다.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가, 영화 밖 관객에겐 영화가 바로 그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이들의 관계가 확실한 모티프를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점도 눈에 띈다. 성경 인물 ‘베드로’와 동명인 피에트로에게 브루노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격이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게바’라는 이명을 주는 것처럼, 브루노는 피에트로를 종종 방언으로 부른다. 그러나 신격이 없는 인간이 예수처럼 살기란 쉽지 않다. 브루노에겐 처자식이 있고, 은행에 갚아야할 빚이 있기 때문이다. 피에트로는 십자가를 만류하던 베드로처럼 브루노에게 타협할 것을 설득한다. 그러나 이 피차 인간인 설득하는 쪽이나 거절하는 쪽이나 무력하긴 마찬가지다.


 영화의 후반부 지붕을 뜯고 줄을 내려 들어간 브루노의 오두막에는 (성경과 달리) 브루노가 없고, 구원도 없다. 다만 그가 이 산 어딘가에 존재하리라는 가능성, 또는 산 그 자체가 되었으리나는 순진무구한 희망이 남았다. 네팔에서 아이들과 축구를 하는 피에트로의 모습은 내내 두 남자에만 밀착했던 영화의 톤과 사뭇 다르다. 그러나 영화 저변에 깔려 있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굴레를 통해 이 아이들이 브루노의 윤회의 파편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아버지가 아들이 되고, 겨울이 녹아 봄이 오듯. 피에트로가 여덟개의 산을 빙빙 돌듯.


아트나이너 17기 강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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