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투성이 연인 (2023) directed by 유지영
여성이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연 500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1928년 버지니아 울프는 강단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이후 이 문장은 하나의 선언, 또는 금언이 되어 전 세계 모든 여성 작가의 의식 가장 안쪽에 자리했다. 그리고 약 100년이 지난 지금, 그때보다 훨씬 많은 것이 가능해진 오늘, 유지영 감독은 묻는다. 이 질문은 느닷없을진 몰라도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 방이란 대체 어디에 있는가?
영화의 첫 쇼트는 재떨이와 양주병, 그리고 무언가를 출력하고 있는 프린터가 올려진 책상이다. 이 이미지는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던 사전적인 의미의 '자기만의 방'이다. 영화는 이 방을 나서며 시작한다. 그 방의 주인은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한 소설가 '재이 (한해인)'의 것이다. 방 밖에는 아침을 차려주는 연인 '건우 (이한주)'가 있다. 그들은 비혼, 비출산을 전제로 각자의 커리어에 몰두할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는 파트너다. 또한 재이는 꽤 오랫동안 비건으로 살아왔다. 이런 괄호 안의 정보들은 재이가 '나'라는 존재를 최대한 타성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가를 설명한다. 그가 이렇게 삶의 모든 요소를 통제하는 이유는 단 하나,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다.
이 커플이 유지하던 균형은 외부가 아닌 내부의 침입으로 금이 가기 시작한다. 재이가 예상치 못한 임신을 했기 때문이다. 임신 중절도 할 수 없어 재이는 배 속의 아이와 함께 세 번째 작품을 집필한다. 이제 '자기만의 방'에는 총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생체 리듬과 호르몬의 변화는 재이의 작품활동을 점점 더 방해한다. 한편 건우는 일하고 있는 영어학원에서 분점의 원장직을 제안받아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업무를 수행한다. 항상 과로에 시달리는 건우는 전만큼 재이를 돌볼 수 없는 상황이다. 이처럼 평행하던 두 연인의 삶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점점 더 벌어진다. 평범하게 사느냐, 창작자로 사느냐. 오직 나로서 사느냐, 누군가의 무언가로 사느냐. 답이 없는 문제에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날은 경과하고 재이의 배는 불러온다.
그 과정에서 눈에 띄는 점은 바로 재이가 쓰고 있는 세 번째 작품이다. 그 소설의 제목은 <Birth>로, 이 영화의 원제와 같다. 줄거리를 묻는 말에 재이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자의 이야기'라고 답한다. 재이가 쓰고 있는 소설은 곧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다. 이처럼 영화는 안팎이 모호한 뫼비우스의 띠 같은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는 곧 현실과 픽션의 관계에 대한 감독의 주관이기도 하다. 어떤 픽션은 곧 누군가의 일상이며 그 둘은 완전히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눈앞에 상영 중인 <나의 피투성이 연인> 또한 그저 하나의 지어낸 이야기로 국한해서 볼 수 없다. 영화는 실존적인 고민으로 현실에 발붙인 채 자꾸만 화면 밖으로 튀어나와 관객 개인의 어떤 영역들을 건드린다. 그렇게 삶을 녹여 써 내려간 재이의 세 번째 작품 <Birth>는 전과 달리 출판사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 이는 마치 재이가 배 속 아기의 출생을 거부하는 상황과 겹쳐 보인다. 재이가 저지른 일은 다시 재이에게 돌아온다. 영화는 이처럼 어느 한쪽을 두둔하지 않고 모든 인물이 과오 속을 방황하도록 그저 풀어놓는다. 더불어 누군가의 탄생, 또는 삶 자체가 기능과 필요에 따라 거부될 수도 있다는 문제의식은 영화가 가진 서늘한 통찰이다.
영화가 말미에 이르면 재이는 글을 쓰기 위해 건우에게 호텔을 잡아달라고 요구한다. 여전히 그는 '자기만의 방'이라는 신화에 사로잡혀 있다. 호텔이라면 모든 생활의 문제에서 벗어나 오로지 '좋은 글'에만 정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끝내 재이는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다. 카메라는 호텔 방에서 황혼의 빛을 받으며 한 손에 양주를 쥔 채 졸고 있는 만삭의 재이를 오랫동안 응시한다. 이 장면은 올해 한국 영화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만큼 도발적이다. 우리에게 주인공은 사랑스러운 호감형 인물이어야 한다는 압박이 존재한다. 그 때문에 재이처럼 한눈에 봤을 때 이기적이거나 불친절한 인물이 주연으로 등장할 때 관객은 극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런 소격 효과는 어쩌면 불완전한 우리가 가상의 인물을 통해 가상의 완벽함을 체험하고 싶은 이기심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현실의 관객은 (재이와 같이) 우리를 닮아 불편하고 위태로운 주인공이 더 필요하다. 영화 속 인물들은 우리의 천박함을 뒤집어쓰고, 그 죗값을 위해 대신 죽고, 감옥에 가고, 파멸해 주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재이와 건우 커플의 추락을 본 관객이라면 불쾌를 넘어 동질감에서 비롯한 어떤 찔림을 느껴야 마땅하다. 이것이 바로 사랑스럽지 않은 예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이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마치 수미상관처럼 막을 내린다. 다시 방에서 홀로 글을 쓰는 재이를 비추며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의 재이와 끝의 재이는 완전히 다르다. 영화는 단순히 임신을 둘러싼 여성주의 담론에만 그치지 않는다. 더 거시적으로 봤을 때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우리 삶에서 완전한 독립은 가능한가?'라는 질문까지 넓어진다. 우리는 누군가의 가족, 친구, 연인, 또는 국가와 경제의 구성원이라는 셀 수 없는 맥락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모든 요소에서 벗어나 단일한 예술가를 꿈꿨던 재이가 맞는 결말은 그다지 이상적이지 못하다. 또한 영화가 끝나면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라는 제목은 누구를 가리키는 걸까, 라는 질문도 떠오른다. 그것은 폭력을 저지른 건우일 수도, 생리와 출산으로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재이일 수도, 그 피를 뒤집어쓰고 태어난 아기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해선 잔인해질 수밖에 없다는 피 묻은 결론이다. 인큐베이터 바깥의 삶은 어른에게도 녹록지 않다.
아트나이너 17기 강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