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영화를, 그래도 미국을 한 번 더 믿어보고 싶은

<히어> directed by 로저트 저메키스

by 편리왕

“저 성당도 언젠간 사라질 거야. 저 자리엔 원래 다른 성당이 있었어.”


센 강을 가로지르는 배 위에서 제시(에단 호크)는 노트르담 성당을 보며 말한다. 2004년 작 <비포 선셋>이 정말 그 성당에 불이 날 거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우리는 지금도 파리에 가면 노트르담 성당을 볼 수 있지만, 그건 영화 속 성당과 다르다. 영화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2004년의 노트르담을 영영 잃었을 것이다.


영화는 크게 두 가지 기능을 가진다. 하나는 현실을 기록하는 능력, 다른 하나는 현실을 재현하는 능력이다. 전자는 눈앞에 있는 것이 사라지기 전에 포착하는 힘이다. 후자는 이미 사라진 것을 눈앞에 다시 불러오는 힘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사라진다’는 전제다. 영화는 시간의 예술, 흐르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비포 선셋>은 때맞춰 2004년의 노트르담 성당을 박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앞으로 나올 과거 파리 배경의 영화들은 어떡해야 할까. 새로운 노트르담 성당을 보여주고 ‘이것은 화재 이전의 노트르담 성당이다’라고 주장해야 한다. 관객은 믿어야 한다. 이 믿음은 영화가 시간이라는 불가역한 한계를 이겨내도록 돕는 유일한 끈이기 때문이다.


기술은 로버트 저메키스가 오랜 시간 벼려온 무기다. 대표작 <백 투 더 퓨처>는 물론 언뜻 CG와 연관 없어 보이는 <포레스트 검프>마저 신기술의 산물이다. <폴라 익스프레스>는 그가 모션 캡처와 3D 애니메이션 등 당시 불모에 가까운 기술에 몰두하기 시작한 분기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그의 커리어가 꺾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폴라 익스프레스>는 개봉 당시 ‘불쾌한 골짜기’라는 오명과 함께 박한 평가를 받았다. 이후 연달아 내놓은 작품들도 애매한 평가와 성적을 거뒀지만, 그의 실험은 멈추지 않았다. 그 때문에 동시대 감독들인 제임스 카메론, 스티븐 스필버그의 위상이 나날이 높아지는 동안, 저메키스의 이름은 ‘괴짜’나 ‘기인’처럼 치부되곤 했다.


저메키스의 신작 <히어> 역시 마찬가지로 저메키스다운 실험적인 기획이다. 영화 전체에 걸쳐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 그리고 AI를 이용한 디에이징 기술이 개봉 전부터 주목을 받았다. 이쯤에서 질문이 떠오른다. 왜 그는 이토록 기술에 매료되어 있는가? 물론 그에게 직접 물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다분히 시네필스러운 관점으로 그의 속내를 추측해 보려 한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여전히 영화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현실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으며, 여전히 이를 믿어줄 관객이 남아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여기’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면서 공룡이 뛰어다니는 중생대 풍경으로 영화의 운을 뗀다. 오직 영화만이 영겁의 시간을 다룰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인간의 노화다. 우리는 분장으로 누군가를 80살처럼 보이게 만들 순 있지만, 8살처럼 보이게 만들 순 없다. <포레스트 검프> 같은 그의 구작들은 때맞춰 젊은 톰 행크스를 박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2024년에 개봉할 영화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 저메키스는 갈고 닦아온 칼을 뽑아 든다. 우리가 모두 젊은 톰 행크스를 사랑한다는 사실도 염두에 둔 채로. 여기까지가 그의 CG 고집에 대한 나의 변호다.


송경원 편집장은 <아마겟돈 타임>을 논하며 ‘감독들이 과거나 미래로 가는 이유는 바로 지금을, 정글이나 우주로 가는 이유는 바로 여기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주장에 <히어>보다 적합한 영화가 또 있을까. ‘히어’라는 단어는 단일한 지시어지만 영화에서는 그 위로 여러 층위가 겹쳐 있다. 적극적인 영화 감상을 위해서는 이 레이어를 뜯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는 크게 두 개의 ‘여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는 어디인가.


첫째로, 당연히 ‘여기’는 극장이다. 고정된 카메라는 곧 객석에 고정된 관객의 시야다. 우리가 눈을 돌리지 않고 스크린을 바라보는 행위를 영화가 직접 재연하고 있다. 영화는 중생대에서 시작해 빙하기를 거쳐 선사시대, 식민지 시대, 그 이후까지 차례로 보여준다. 모두 빠짐없이 할리우드 영화가 다뤄온 시간들이다. 우리는 극장에 앉아 <쥬라기 공원>을, <포카혼타스>를, 이외에도 유수의 영화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히어>가 하나의 거대한 회상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회상이 아닌 극장 스크린의 회상이다. 오프닝 시퀀스는 극장 벽면 흰 천이 스스로 이제껏 상영해 온 영화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는 과정이다.


둘째로, ‘여기’는 가족이다. 영화의 모든 장면은 실내에서 진행된다. 하지만 몇몇 장면에서 우리는 실외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집 길 건너에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자민 프랭클린의 혼외자 윌리엄 프랭클린의 생가가 있다. 영화의 시간대가 18세기로 바뀌면 윌리엄 프랭클린이 등장해 ‘미래에 벤자민 프랭클린을 아는 사람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투덜거린다. 한국의 관객에게도 이 장면은 유효한 농담이다. 그만큼 벤자민 프랭클린은 역사에 남은 유명인이기 때문이다. 반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이 집, 그리고 이 집에 사는 가족들은 모두 무명이며 기록되지 않은 역사다. ‘행복한 가정은 비슷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가지각색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톨스토이의 말처럼, 공간을 관통하는 각 가정의 모습은 유사하면서도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영화가 기록한 ‘여기’는 타인이 알지 못하는 내밀한 역사다.


셋째로 ‘여기’는, 미국이다. 영화가 제시하는 ‘여기’를 거쳐 간 사람들의 면면은 가감 없다. 콜럼버스 이전의 원주민, 흑인 노예와 식민지배자들, 독립전쟁과 세계 1, 2차 대전까지, 시간은 영화를 관통한다. 세계 2차 대전 참전 용사 ‘알 (폴 베타니)’은 이 집에 입주하고, 본격적인 영화의 메인 플롯이 펼쳐진다. 이 시점은 우리가 아는 미국, 또는 (저메키스의 나이를 고려하면) 감독이 아는 미국의 시작이다. 이 집의 바닥은 전쟁 트라우마고 지붕은 대출 이자다. 이 두 가지 덕분에 ‘알’과 ‘로즈 (켈리 라일리)’ 부부, 그리고 가족들은 집을 얻었지만 동시에 집을 떠나지 못한다. 이 두 가지가 가족들을 보호하지만 동시에 짓누른다. 집과 사람의 관계는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축소한 은유처럼 보인다. 이런 기틀 안에서 사는 구성원들이 겪는 일들은 마냥 사적이지만은 않다. 베트남전에 참전하고, 인종 차별의 희생자가 되고, 코로나19에 걸리기까지. 집은 미국에게 닥친 사건의 현장이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이 집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모두 보통 가족의 양태를 띄고 있다는 점이다. 남녀 한 쌍의 부부, 그리고 자녀. 마치 이 집에서 살 수 있는 조건인 양 이 기조는 팬데믹 시대까지도 유효하다. 대안적이거나 비주류성을 띄는 인물은 이 집에 살지 않는다. 이것을 누구의 의지로 보아야 할까. 감독이 수구적인 태도로 비주류를 이 집에서 배제했다고 보는 건 지나치게 피상적이다. 부동산 시장의 악재와 부의 유리천장이 맞물려 이제 번듯한 주택은 서울의 아파트처럼 언감생심이 되었다고 보아야 옳다. 따라서 ‘여기’를 미국으로 상정할 때, 이처럼 편협한 거주자들의 모습은 문제적이다. 어떤 이들은 집에서, 또는 미국에 살 수 없다고 시인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히어>에서 확인하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은 <노매드랜드 (2016)>에서 찾을 수 있다.


고정된 시점을 중심으로 단발적인 에피소드를 비선형적으로 이어 붙인 영화, <히어>는 마치 숏폼 영상을 2시간으로 이어 붙인 느낌을 준다. 긍정적인 의미에선 짧게 치고 빠지는 상황들이 손쉽게 관객의 흥미를 견인한다. 부정적인 의미에선 정보와 감정을 압축하여 전달하다 보니 상투적인 대사와 상황이 잦아 영화가 납작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히어>가 영화인 까닭은 마지막 순간 움직이는 카메라 때문이다. 카메라가 움직일 땐 우리의 마음도 움직인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 ‘마가렛 (로빈 라이트)’의 얼굴은 AI로 새긴 노화 탓에 어색한 느낌을 준다. 카메라가 인물에게 다가가지 못했던 건 형식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이유도 있었던 걸까. 카메라는 인물을 지나쳐 창밖을 나와 비슷한 주택이 들어선 마을 전체를 보여준다. 감독은 이 모든 집마다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고 말하고 싶었을 테다. 또는 스튜디오가 늘어선 할리우드를 비유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짓궂게도 내 마음엔 저 모든 집이 빈집일지 모른다는 허무함, 그리고 그럼에도 내가 살 수 있는 집은 없으리라는 박탈감도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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