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된 천일야화, 영화가 되어 쏟아진다.

<더 폴: 디렉터스 컷> directed by 타셈 싱

by 편리왕

<더 폴>의 오프닝 시퀀스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야심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명확한 흑백 대비와 선명한 슬로 모션, 그리고 장엄한 베토벤 교향곡은 이를 보조하는 수단일 뿐이다. 첫째로, ‘추락’을 의미하는 제목 <더 폴>과 정면으로 배치하는 이미지가 야심이다. 영화는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로이 (리 페이스)’의 모습으로 막을 연다. 그리고 뒤이어 그를 구조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몽타주로 보여준다. 영화는 그의 사고, 그의 추락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치 그리스도교의 침례처럼, 머리끝까지 물속에 잠긴 ‘로이’가 죽음에서 살아 돌아오는 모습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무언가를 파괴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파괴된 것을 다시 복구하는 것은 어렵다. 감독은 그 어려운 일을 해내겠노라는 선언으로서 오프닝 시퀀스를 제시한다. 로이가 내몰아 쉰 물을 뒤집어쓴 관객도 마찬가지로 이 세례식의 당사자로서 동참할 수밖에 없다.


둘째로, 고화질의 슬로 모션 이미지가 야심이다. ‘영화는 1초당 24번의 진실’이라는 고다르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영상이란 여러 장의 사진을 빠르게 보여주는 기술이다. 슬로 모션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초당 훨씬 더 많은 수의 사진이 필요하다. 감독 타셈 싱은 인터뷰에서 ‘2008년에 4K로 제작된 영화는 <아이언맨>과 <더 폴>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초고화질의 슬로 모션을 위해선 초당 수백 장의 프레임을 기록할 고성능의 카메라, 그리고 수백 장의 프레임에 담길 실존하는 피사체가 필요하다. <더 폴>은 ‘활동사진’으로서 영화에 천착하며 그 극단을 시험한다.


<더 폴>은 ‘로이’가 ‘알렉산드리아’에게 날마다 설화를 들려준다는 점에서 세헤라자데의 ‘천일야화’를 연상케 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세헤라자데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이야기를 지었고, 로이는 목숨을 버리기 위해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로이의 죽음이 서린 이야기는 알렉사드리아를 거쳐 영화로 치환된다. 이때 흥미로운 ‘번역 중 손실’이 발생한다. 바로 로이가 아메리카 원주민이라는 의미로 말한 ‘인디언’을 알렉산드리아가 문자 그대로 ‘인도 사람’으로 이해하고, 이야기의 배경도 인도로 상정하는 점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영화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당연히 당대 서부 영화의 맥락도 알지 못한다. 이는 백인 중심의 할리우드 영화사를 다시 쓰고 싶은 감독의 수정주의적 의지처럼 보인다. 인도 출신 영화감독으로서 ‘인디언’이라는 단어의 오용을 바로 잡고 싶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 이는 최근 20세기 남성 중심 영화들을 오마주해 페미니즘의 언어로 탈바꿈한 <서브스턴스>의 사례와도 연결된다. 두 편의 영화 모두 주류 바깥의 지지를 통해 자생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공교롭다.


더 나아가 CG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더 폴>의 제작 비화는 오늘날 영화계 AI 사용이라는 화두와도 맞닥뜨린다. 누군가는 이를 윤리의 문제로 여기고, 누군가는 자본의 문제로 접근한다. 하지만 일개 관객으로서 영화 속 AI 활용은 결국 사랑의 문제로 보인다. 오늘날 기술로 만들어낸 정교하고 아득한 이미지가 만연하지만, 그중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것은 극히 일부다. 대중문화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몸으로 부딪쳐 얻어낸 영화 <더 폴>은 대중의 사랑이 향하는 지점을 정확히 지시한다. 이야기와 영화를, 찰나를 담으려는 순전한 열정을 원하는 관객이 남아있다. 그리고 감독은 이 열망을 구원으로 연결한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모든 문제가 소강하고 사람들은 모여 앉아 로이가 참여했던 영화를 감상한다. 다 함께 모여 영화를 보는 것이 구원이다. 로이가 사고를 당한 추락 장면에 이르면 카메라는 마른침을 삼키는 로이의 얼굴을 긴 호흡으로 비춘다. 영화를 진실이라 믿으며, 인물의 액션이 성공하길 바라는 모습은 우리가 잃어버린 관객성이다. 우리는 영화를 신뢰하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믿음직스러운 영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우리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까. 영화는 말미에 이르러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믿음직스러운 영화들을 연달아 보여주며 이 문제의 해결을 돕는다. 우리는 알렉산드리아처럼 저 무수한 영화들 속에 ‘로이’가 있다고 믿으며 스크린을 바라본다. 이제 이 영화는, 알렉산드리아의 말처럼,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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