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어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제도, 그제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서러움에 북받쳐 눈물이 났다.
그럴 만도 하다. 나는 4일 전, 남자친구와 헤어졌으니까. 하지만 그저 이별의 아픔에서 오는 눈물이라기보다는 좀 더 복잡했다. 가장 짙게 느껴지는 감정은 '두려움'이었고, 이 세상에 혼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무서웠다. 나의 가족과 친한 친구들은 모두 해외에 있고, 그나마 한국에서 종종 만나고 연락하는 친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리고 또 나는 현재 무직이다. 올해 5월에 퇴사하고, 계속 이직을 위해 노력 중이지만 생각보다 이 과정이 오래 걸리는 중이다. 시간이 많으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도 하는 거라곤 가만히 누워서 생각하는 것이고, 그렇게 나의 상황을 되짚다보다.. 그렇구나. 이제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구나. 이제 더 이상 매일 나의 안부를 묻는 사람도 없고, 내가 밥은 먹었는지 오늘은 뭐 할 건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구나.
아침마다 이런 결론을 내리다 보면 마음이 저릿저릿하다. 생각이 몸으로 퍼져 증상으로 올라오는 느낌이랄까. 감기에 걸리면 기침과 콧물이라는 증상으로 나타나듯이, 슬픔, 무서움, 두려움,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이런 증상으로 나타나는구나 싶었다.
마지막 연애를 시작하기 전, 나는 연애를 하기엔 아직 준비가 안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에 있는 가족을 떠나 혼자 한국에 온 지 이제 일 년 반쯤 되었지만 아직 내 상황은 안정되지 못했기에, 심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넉넉하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 연애는 사치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종종 찾아오는 외로움도 철저히 무시했다.
하지만 인연은 준비가 되어있을 때 찾아오는 건 아닌 것 같다.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생각지 못한 곳에서 이렇게 만날 줄이야. "상황이 완벽히 안정되지 않을 때 까진 연애하지 않을 거야"라는 다짐을 한순간에 무너뜨릴만한 어떤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이런저런 상황 따져볼 새도 없이 순식간에 빠져들었고, 역시 인연은 예상치 못한 시기에 찾아오는구나, 라며 나를 설득했다. 이 사람이랑은 오래 만날 것 같아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그 남자는 나와 많이 달랐다.
나는 꽤나 감정적인 사람이었고, 그는 본인의 감정은 최대한 절제하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인사이드 아웃 2를 보며 벅차오르는 감정에 눈물을 참고 있노라면, 옆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울어?"라고 묻던 그였다.
무엇보다 그가 담배를 피우고 술을 좋아하는 것이 싫었고,
고기를 좋아하는 그에게 맞춰 일주일에 몇 번이고 고깃집에 가서 몇 시간을 보내는 것이 힘들었고,
운동과 산책을 좋아하는 나와는 달리, 쉬는 날이면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그에게 서운했다.
우리는 공유하는 취미활동이 없었고,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다른 시각과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서 보이는 단점이 장점을 상쇄하는 날들이 많아지고, 이를 점점 무시하기가 힘들어졌다.
우리는 정말 많이 달랐고, 매 만남마다 다름을 느끼다 보니 마음의 거리가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았다. 사랑한다는 말, 보고 싶다는 말 한 마디면 금방 행복해지는 난데, 그는 이런 표현이 낯간지럽다며 회피했다. 연인으로서 받아야 할 당연한 관심을 구걸해야 되나..?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고,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마저 들자 결국 "더 이상은 안 되겠어, 아무래도 헤어져야겠어."라는 결심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와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무섭고 두려웠다.
'혼자 = 두려움'은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렇기에 처음엔 낯설었고, 그래서 피하고 싶었다. 혼자가 익숙한 나였지만 한 번 '우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니까 다시 혼자가 되는 것이 싫었다. 이미 우린 연인으로서 수명이 다했고, 헤어지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관계를 꾸역꾸역 붙잡고 있었다.
우리는 만나는 동안 4번의 이별과 다시 만나기를 반복했다. 4번이나 헤어지고 다시 만날 때, 모든 헤어짐에서 나는 마지막을 결심했다. "이젠 정말 끝이야, 우린 정말 안 맞아." 하지만 다음날이면 사무치는 그리움과 외로움 그리고 두려움에 펑펑 울었고, 이 감정을 이기지 못해 먼저 연락을 하거나, 걸려오는 연락을 무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은 이전의 헤어짐과 달랐다. 정말 끝이 보였다. 이제 이 관계 속에 있을 바에야 혼자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난 4번의 헤어짐을 반복하는 동안 헤어지고 난 후, 어떤 감정이 들지 충분히 겪었으니까 이젠 괜찮겠지 싶었다. 이번에 헤어지면 이전처럼 펑펑 우는 일은 없을 거야, 난 마음의 준비가 됐어라며 스스로 다독였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가 됐어도 이별은 이별인지 힘들긴 하다. 그래도 이제는 더 이상 이 사람과 나는 안 되는 관계고 헤어지는 것이 옳다는 건 안다. 지금 이 힘듦을 이겨내지 못해 그에게 다시 돌아가도 조만간 똑같은 결론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 이 감정을 배울 수 있었음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 자리에 누워 멍 때리지 말고 바로벌떡 일어나기.
이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직도 알아가는 중이지만, 이 한 가지만큼은 지키려고 한다.
평일에도 출근할 필요 없는 백수지만, 아침형 인간인 나는 알람을 듣지 않고도 6시면 눈이 절로 떠진다. 계획도, 약속도 없는 하루의 아침에 이렇게 빨리 눈을 뜨고 나면 좀 더 이불속에서 밍기적대고 싶은데 더 이상 잠들기는 글렀고, 그러면 가만히 누워 할 수 있는 거라곤 생각하는 거다. 별의별 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오고, 나는 그 생각들에 완전히 압도되어 버린다. 겉에서 보기엔 가만히 누워 꽤나 평온해 보이겠지만, 속에서는 미친 듯이 소리 지르는 내가 보인다. 그리고 왈칵 서러운 눈물이 쏟아져 버린다.
오늘은 아침에 눈뜨자마자 울고 싶지 않았고 눈을 뜨자마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생각할 겨를을 주고 싶지 않았는데 역시 생각은 통제가 안되는지 자동적으로 떠올라서 이불을 개는 와중에 또 울컥했지만. 그래도 적어도 궁상맞게 엉엉 울지는 않았다.
샤워 싹 하고 나와서 오랜만에 화장도 하고, 노트북을 챙겨 집 근처 카페로 왔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도 많이 없고 무엇보다 (나에겐 꽤나 정신없는...) 아이돌 노래가 아닌 가사 없는 재즈 음악이 나오는 게 좋았다. 따뜻한 커피 마시면서 멍도 때리고, 팔로잉하고 있는 다른 브런치 작가분들의 글도 읽고, 그러다가 내 얘기도 썼다. 좋은 글을 읽으니 좋은 생각을 하게 되고, 내 생각을 글로 정리하다 보니 생각도 정리되는 기분이다. 글을 쓰는 와중에는 오롯이 쓰는 행위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 지금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전남친도, 백수라는 나의 상태도, 괴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자주 이런 루틴을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