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가 홍수입니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평소 안 하던 사과들을 참 열심히 합니다. 덜미가 잡힐 것 같으면 납작 엎드립니다. 지지율 떨어질까 봐.
어쨌거나 사과하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마나 ’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가 됩니다. 최악은 역효과 사과입니다.
대선후보 TV토론에 나온 윤석열 후보의 사과는 듣는 귀를 의심케 할 정도입니다. 최악입니다. 왜 사과를 저렇게 할까요. 욕을 먹으려고 작정을 했나 싶을 정도입니다.
그는 심상정 후보로부터 “(윤 후보 배우자 김건희 씨) 녹취록 공개로 2차 가해 등 여러 고통을 받는 김지은 씨한테 이 자리를 빌려서 사과할 용의가 있나”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과하겠다. 그렇게 마음에 상처를 받으셨다면, 제가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지만, 하여튼 그런 걸로 인해서 상처를 받으신 분에 대해서는 김지은 씨를 포함해서 모든 분들에게, 하여튼 공인의 아내도 공적의 위치에 있으니까 사과를 드리겠다. “
사과를 할 때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렇지만’이라고 토를 다는 것도 그렇고, ‘기분이 상했다면’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등의 가정문을 붙이는 경우도 그렇습니다. 성의도 없어 보일 뿐 아니라 왜 사과하는지 알고나 있는지 심히 의심케 하는 사족들입니다.
김지은 씨가 안희정 전 지사의 성폭행 관련 폭로 후 엄청난 2차 가해를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윤 후보의 아내 김건희 씨는 지난해 11월 이명수 ‘서울의 소리’ 촬영 기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김지은이 웃긴 얘 아니야? 지가 (성폭력이 일어났을 때) 소리를 질렀어? 뭐했어? 둘이 합의하에 했으면서"라며 "나랑 우리 아저씨(윤 후보)는 지금도 안희정 편이야"라고 말했습니다. 명백한 2차 가해지요.
윤 후보는 이에 대해 사과하면서 조건을 여럿 붙입니다. 1.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면 2. 내가 한 것은 아니지만 3. 김 씨를 포함해 모든 분들께 4. 하여튼 아내도 공적 위치에 있으니까라고.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도, 아내 대신 사과하면서 ‘내가 한 것은 아니지만’이라고 조건을 다는 것도, 김지은 씨에게 사과하라니 모든 사람에게 라며 포괄한 것도, ‘하여튼 아내도 공적 위치에 있으니까’라며 마지못해 말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모두 부적절합니다. 네 가지 중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는다면 사과를 하지 않겠다는 뜻인가요. 왜 사과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습니다. 오마이뉴스가 곧바로 ‘윤석열의 사과법’이라고 비판한 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재명 후보의 부인 김혜경 씨도 최근 사과를 했습니다. 김 씨의 측근인 경기도청 5급 공무원 배 씨가 같은 사무실 7급 공무원 A 씨에게 김 씨의 시중을 들도록 했다는 이른바 '황제 의전' '공무원 시중'의혹 때문입니다. A 씨가 다른 일은 거의 안 하고 김 씨를 위해 음식 배달, 옷장. 냉장고 수납, 병원 대리처방 등 잡일을 도맡아 해줬다는 겁니다. 거기다 경기도청 법인카드를 소고기나 초밥 등을 사 먹는데 써왔다는 의혹까지 나왔습니다.사실이라면 이 후보와 김씨 모두 공금 횡령에 직권남용등 실정법 처벌 대상입니다.
김 씨는 A 씨의 폭로가 나오자 입장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타이밍과 내용이 문제입니다. 사과문이 아니라 입장문이라고 배포한 자료는 한 방송에서 의혹이 나온 지 닷새만에 발표됐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내용도 이상합니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있었다. 그동안 고통을 받았을 A 모 비서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아린다. 모든 것이 저의 불찰이다. 공과 사를 명료하게 가려야 했는데 배 씨와의 친분이 있어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상시 조력을 받은 것은 아니다. 다시 한번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린데 대해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
김 씨는 측근인 배 씨를 10년 이상 알고 지낸 사이입니다. 배 씨와 함께 도움을 준 사람이 공무원이라는 것쯤은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공무원이 지사 부인의 심부름을 하는 게 법적으로 문제 될 것이라는 것도 알았을 겁니다. 그런데도 김 씨는 ‘배 씨와 친분이 있어 도움을 받았다’고 이상한 말을 합니다. 상시 도움을 받지 않았다고 발뺌도 합니다.
이 후보도 부인 김 씨 일을 사과하면서 ”지사로서 직원의 부당행위는 없는지 꼼꼼히 살피지 못했고, 저의 배우자도 문제가 될 수 있는 일들을 미리 감지하고 차단하지 못했다 “고 말합니다.
김 씨나 이 후보나 모두 사과는 하면서도 잘못은 측근인 배 씨의 몫이라고 돌리고 있습니다. 배 씨도 "잘 보이려고" 자신이 과잉 충성하면서 벌어진 이라고 해명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과나 해명이 과연 국민들에게 먹힐까요. 모든 잘못을 부하들에게 돌리는 리더에게 표를 줄까요. 저는 법적 책임은 면할 수 있어도, 선거에는 오히려 독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만약 김 씨라면 처음부터 이렇게 사과하겠습니다.
”모든 것이 공사를 구분하지 못한 저의 불찰입니다. 이 후보가 성남시장이었을 시절부터 이런저런 이유로 배 씨와 다른 공무원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시장 부인으로서, 경기도지사 아내로서 소속 기관 공무원들의 도움을 받는 게 부적절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쁜 일정 때문에 배려라고 생각하고 지나쳤습니다. 배 씨가 그동안 법인카드를 썼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런 것까지 세심하게 챙겼어야 하는 데 제 불찰입니다. 직권 남용이나 공금 횡령 사실 여부에 대해 비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에 응당한 책임을 지도록 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린데 대해 죄송합니다. “
김 씨가 이렇게 잘못을 인정하고 죽여달라며 목을 길게 빼고 칼을 받는 심정으로 나왔다면 어땠을까요. 그렇게 나갔어도 언론이나 상대당이 지금처럼 벌떼처럼 달려들었을까요. 아마 법적 심판은 나중에 받아야겠지만, 당장 돌아서서 떠나는 여론은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사과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진심이 전달돼서 상대의 판단과 행동을 움직여야 하는 교감의 게임입니다. 본인에게 유리한 사과는 반드시 상대에게 그만큼의 노림수를 읽히게 돼 있습니다. 사과할 때는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는 게 좋습니다. 자존심의 여지를 남겨두는 순간 '하나마나'한 '안 한만 못한' 사과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