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부모의 서러움

존재 자체로 미움받는다는 것의 서러움

by wisdom

회사를 다닌지 10년이 되었다. 물론 우리회사는 별 거지같은 팀장들이 수두룩해서 맘고생을 하지만, 그래도 업무 강도가 높지 않고 잘릴 위험이 없는 좋은 회사다. 고용 안정이 주는 안락함은 직장인의 삶의 질을 높인다. 안잘리니까 무사안일 하겠다는 각오보다는, 경력개발은 어떻게 할까, 순환보직인데 다음번에는 어떤 일을 해볼까, 정년까지 든든하니 40세,50세에는 이런저런 취미나 공부를 시작해볼까 등등 미래를 그릴 수 있게 된다. 정년 보장 고용 안정이 잘 되어있던 일본이 결국은 장기경기침체의 늪에 빠져버렸다는 식으로 서술되어있는 행정학 책을 찢어버리고 싶고, 복지국가가 되면 모두가 탱자탱자 놀면서 세금을 갉아먹어서 나라 망할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을 꿰매버리고싶다. 모든 일에는 역기능이 있게 마련이지만, 순기능을 최대한 살리도록 제도와 문화를 만들 생각은 안하고 그저 그 증명되지않은 역기능에만 초점을 맞춰서 사람들을 고용불안으로 내몰고, 내일을 그리지 못하고 오늘만 보고 살게 하고, 아무리 버텨도 낭떠러지 끝으로 내몬 뒤 그 밑에 사회안전망도 쳐주지 않는다.


이런 사회분위기 속에서 회사는 나를 보호해주니 나 뿐만 아니라 직원들 대다수가 회사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

그렇지만 역시나 무수히 많은 또라이들, 일하는 척을 하기위해 모두가 뽐내는 나날들, 승진이나 연수 기회를 잡기 위해 너나할것없이 노조의 끈을 부여잡으려 애쓰고, 그 위에서 군림하는 노조전임자 등등이 꼴보기싫어 애사심이 도무지 쌓이기 어려울 즈음. 만5세미만자녀를 둔 부모에게 하루 2시간의 육아시간을 부여해주는 육아단축근무제도가 생겼다.

그동안 아침 8시반에 아이를 회사 근처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오후4시반쯤 친정엄마가 하원시켜 친정집으로 데려가면 내가 6시에 퇴근해서 엄마집으로 가서 아이와 저녁을 먹고 씻긴 뒤에 집으로 데려오는 패턴이었는데, 친정엄마는 몸으로 일하는 직업인데다 연세도 꽤 있으셔서 퇴근 후 육아와 식사준비를 매우 버거워하셨다. 하루가다르게 더욱 늙어가는 엄마를 보며 죄송함을 금치 못할 무렵 이 좋은 단축근무제도가 생겼으니, 10년동안 안쌓이던 애사심이 한순간에 하늘끝까지 치솟았다.

난 이제 4시에 퇴근을 해서 아이와 어딘가를 놀러가기도, 맛있는걸 먹으러가기도 하고, 아가를 보고싶어하는 가족친지들과 평일에도 저녁을 즐길수가 있다. 아무 일과가 없다 하더라도 내가 직접 아이를 하원시켜서 집으로 데려와 내 손으로 음식을 만들어 아이를 먹이고, 아이와 대화하고 저녁이 넘치는 삶을 살고있다. 워킹맘으로서의 삶의 질은 단축근무 이후 아주 많이 높아졌다.


물론 하루 2시간 업무시간을 단축했다고 해서 회사에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회사가 이런 배려를 나에게 해준것 만큼 나도 회사에 보답을 해야 했다. 우선 내 2시간으로 인해 업무공백이 생기거나 팀원들 중 누군가가 일이 늘어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난 예전과 똑같은 업무량을 6시간동안 해야했고, 즐거운 마음으로 좀 더 바쁘게 일하며 보냈다. 공교롭게도 단축근무를 시작할 즈음 육아휴직대체인력으로 채용된 1년짜리 계약직 직원이 기간만료로 퇴사를 했고, 그 일을 나머지 팀원들이 나눠가지면서 하필이면 가장 상시적이고 양이 많은 업무를 내가 가져오게 됐다. 육아휴직자가 생기면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대체인력을 뽑아주는것까진 아주 좋은데, 그 대체인력이 나가고 나면 왜 그 뒤의 인력보강은 없는것인가, 육아휴직을 장려하기 위한 아주 좋은 제도지만 그 이후의 공백은 모두가 나몰라라 하는 허점이 있는 제도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불평하지 않았다. 나에게 단축근무라는 배려를 해주는 회사에 그 어떤 불평도 하고싶지 않았고 오히려 부족함없이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일들도 꾸역꾸역 도맡았고, 종종 일에 허덕였다. 그래도 펑크 하나 안내려고 기를 쓰고 일을 했다. 4시에 퇴근한다는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있으니 힘든 내색을 전혀 할수가 없었고, 내 입에서 '일이 너무 많다.' 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기다렸다는듯이 '그럼 6시까지 일해.' 라는 대답이 돌아올까봐, 업무분장이 조금 과하다 생각이 들어도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혼자 바쁘게 살고있는데, 얼마 전 미혼인 동기가 짜증스럽게 말하며 단축근무자들을 비난하는걸 들었다. 회사에 어린자녀를 둔 직원들이 너무 많아 전화만 걸면 다들 없다는 거였다. 자기는 급한데, 5시에 전화걸면 퇴근했다 하고, 자료를 받아야하는데 다음날로 미뤄지고 그러다보니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우리회사는 24시간 운영되는 특성상 야간당직자가 워낙 많아 하루에도 비번자가 수두룩하고, 휴가나 교육이 자유로워 자리에 없기 일쑤다. 그 뿐인가, 현장 나간다 하고 두문불출하는 자, 병원갔다온다고 몰래 외출하는 자, 반반차 제도가 생긴 덕분에 이래저래 들쑥날쑥 출퇴근 하는 자 등등 공석인 사람이 너무 많아 오죽하면 회의나 회식을 잡기가 꽤 어려울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기는 육아단축근무자에게만 그 화를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물었다. 그리 급한거면 4시 이전에 전화를 하지 그랬냐고. 그렇다면 그 직원은 분명 '아, 나는 4시퇴근자라 그걸 못하겠다' 라고 답을 하지 않고 4시반이나 5시까지 남아서라도 해줬을거라고. 설령 그 직원이 단축근무자인걸 까먹어서 4시 이후에 전화를 했다 하더라도 어차피 다른직원들도 4,5시면 하루 마무리하는 분위기라 회신은 그 다음날 오전에야 이뤄질텐데 유독 단축근무자에게 짜증낼 일은 아니지않냐고.


그러자 돌아온 대답이 명언이었다.

"나는 그냥 그 단축근무 제도 자체가 싫어."


그렇다. 아무리 기를 쓰고 일을 해도, 4시가 넘어서 생겨나는 일도 커버하려 노력하느라 아이의 하원이 주구장창 늦어지고 결국 친정엄마에게 도움을 청하면 넌 왜 이제 말하냐고 오히려 불호령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빨리 마무리해보려 안간힘을 쓰는데도, 일의 수준이 떨어지면 단축근무자라 일에 소홀하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한번 더 꼼꼼하게 실수는 없나 체크를 해도, 업무량이 8시간근무자보다도 훨씬 많지만 싫은 내색 하지않고 오히려 더 잘해내려 노력을 해도... 그냥 단축근무자 자체가 싫다는 말에는 대책이 없었다. 너가 무슨 짓을 해도 그냥 너가 싫어. 라는 말로 들렸다.


갑자기 그동안 아등바등 한 내가 서러워졌다. 워킹맘인게 죄는 아닌데, 배려받았다 해서 미움도 한몸에 받아야 한다는 게. 사회는 점점 더 출산을 장려하지만 그 장려와 배려를 아니꼽게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는게 서럽다. 마치 임산부 배려석이 생기자 임신한게 유세냐 는 막말을 더 많이 듣게된 것 처럼.

지난 10년동안 그랬던것처럼 회사를 싫어하고 업무를 지겨워하다가 그런 소리를 들었으면 덜 억울했을텐데, 모처럼 애사심을 갖고 일도 기쁘게 열심히 해왔던 터라 더 서글펐다. 나는 나를 배려해준 회사가 너무 고맙고 좋았는데 그 안에 이렇게 매서운 비난의 눈초리가 있는줄도 모르고 나혼자 좋아했다는게 마치 짝사랑한테 매몰차게 거절당한 느낌이다.


좋은 제도와 배려는 불성실했던 직원도 성실하고 착실하게 만든다. 생각보다 개인은 좋은 제도 속에서 게을러지거나 안주하지 않고 더 발전한다. 이 사실을 제발 믿어줬으면 한다. 괜한 트집이나 상처를 퍼부을 게 아니라 더 큰 동력을 만들어주는 방향으로 회사도 사회도 나아갔으면 한다.

(이 무슨 공익적인 끝맺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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