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낯은 위기상황에서 드러난다

너무 쉬운 의사결정

by wisdom

시작은 ‘퇴직금 누진제 폐지’ 라는 불운한 제도변경이었다. 퇴직금 지급방식이 그동안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변화해 온건지 잘은 모르겠으나, 회사측에서 설명하기를 2000년도 이전 입사자의 경우 퇴직금누진제를 적용받는 세대이고 그 이후 입사자는 원래 적용받지 못하는 제도라고 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다시피 퇴직금 누진제는 퇴직금 산정시 근속연수에 일정비율을 다시 곱하는 산출방식으로 퇴직금 산정에 유리한 제도다. 2000년도 전에 입사한 사원은 이 제도로 퇴직금이 2000년 이후 입사자보다 많은 구조였다.

그런데 공기업인 우리회사는 정부 정책을 따르지 않으면 경영평가에서 감점을 받고, 이는 성과급 지급률과 직결이 되는데 2013년 정부에서는 퇴직금 누진제 폐지를 내세웠다. 폐지하지 않는 공기업은 경영평가 감점을 주겠다고 했으니, 당장 폐지하지 않으면 성과급이 뚝 떨어질 판이었다.

여기서 노노 갈등이 시작되었다. 2000년 이전 입사자들은 성과급 감소분보다 퇴직금 누진제 폐지에 따른 퇴직금 손실이 더 크므로 차라리 성과급이 깎이더라도 퇴직금 누진제를 폐지하지 말자는 주장을 했고, 2000년 이후 입사자들은 어차피 구경도 못한 퇴직금 누진제 때문에 내 소중한 성과급이 깎이는게 싫었다. 게다가 폐지하지 않으면 매년 경영평가 감점 점수가 커져서 성과급은 바닥을 치게 되어있었다.

노노 갈등을 유발해서 니들끼리 싸우라고 내던지는 정부도 싫었지만, 별수없이 모두가 진흙탕 싸움으로 빠져드는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선택은 노동자의 몫이었다. 자연스레 노동자를 대표하는 노동조합이 결정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노조전임자인 노조위원장과 사무국장은 다방면으로 연구하고 따져보고 의견수렴을 했고, 모두에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다며 드디어 입장을 발표했다.

그런데 참으로, 모두에게 좋은 방향인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이런 저런 의구심이 드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퇴직금 누진제 폐지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데에 대다수의 직원들이 동의하고 공감하고 있어서 퇴직금누진제는 폐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다만, 퇴직금누진제를 폐지한건 온전히 2000년 이전 입사자들이 후배들의 성과급과 미래를 위해서 희생한 결과이므로 그 희생에 걸맞는 보전을 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우선 그 희생의 가치가 잘 가늠이 되지 않았고 입사연차에 따라 다 다를것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 희생의 가치를 정확히 측정하지 못한채 그들을 보상하는 방안에 대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그들은 무지막지한 희생을 했기 때문에. 오로지 후배들을 위해서. 그래서 뭐로도 보상이 안되겠지만 최대한 보상을 해줘야하니까.


우선 현실 가능한 보상은 2000년 이전 입사자들의 복지비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임금총액제와 복지총액제에 묶여있는 구조에서 임금을 손대기는 어렵고 만만한 복지가 손질의 대상이 됐다. 선택적복지비의 상당부분이 2000년 이전입사자들의 몫이 됐고, 향후 몇년간 차곡차곡 더 몰아드리는 방안이 채택됐다. 그 재원은 하위직원들의 복지를 삭감해서 마련하는 수 밖에 없었으므로, 육아보조비, 배우자의 출산병원비 실비보험료 등이 없어졌다. 묘하게도 어린 자녀가 있는 직원들이 제일 큰 손해를 보게 되었지만, 그들은 발언권이 미약했으므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노조위원장과 사무국장 본인들이 2000년 이전 입사자였고, 임금이나 복지를 협의해야하는 노무부장, 총무팀장도 2000년 이전 입사자였다. 2000년 이전 입사자들의 손해를 보전해주기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그리 순수해 보이지 않았지만 설마, 직책들이 있는데 설마, 하고 넘겼다. 중고등학생 자녀들에 대한 지원도 계속 확대됐다. 그들의 자녀가 그 나이쯤이었다. 그래도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제대로 민낯을 보이는 사건이 드디어 터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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