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낯은 위기상황에서 드러난다-2

외면하고 싶은 타인의 권리

by wisdom

퇴직금누진제 폐지의 희생양들에게 복지비로 최대한 보전을 해줬지만,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았던 것 같다. 복지비 손질은 한계가 있으므로, 임금을 건드리기로 결정한 듯 했다. 총액인건비에 묶여있기 때문에 티가 나게 누군가의 임금을 빼앗아 채워줄 수는 없었으므로 대대적인 손질을 통해서 보이지않게 빼앗아 가야만 했을 것이다.

우리회사는 기본급은 낮고 수당이 많이 붙는 구조의 임금체계를 계속 가져왔다. 하지만 기본급을 많이 올려놓는 것이 무엇보다도 유리하므로 그동안 꾸준히 기본급을 올리려는 노력을 해왔다. 그 덕분에 형편없던 월급이 조금씩 높아진것에 늘 감사할 정도로 임금 체계가 좋아졌다. 이번에도 기본급을 손질해서 전반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회사는 24시간 운영되는 시설물을 관리하는 곳이므로 야간근무가 필수적이었다. 각 분야별로 2~3명씩 야간근무를 매일 서야했고 그에 따른 수당이 많았다. 이 수당들을 기본급화 해서 기본급을 탄탄하게 높이고 수당은 점차 쪼그라드는 추세였는데, 이 야간근무는 남자직원들만 서게 되어있었다.

야간근무를 남직원들만 서게 된 연유는 간단했다. 회사가 설립되었을 당시부터 야간근무를 했을텐데, 그때는 사내에 여직원이라곤 타이피스트나 비서 뿐이었다. 이후 점차 여직원이 입사했지만 야간근무라는게 밤이라 위험하기도 했고 관리대상 시설의 이용자들이 조금 거친 남성 위주여서 여직원의 야간근무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점차 시대가 바뀌면서 야간근무는 그리 위험하지 않아졌다. 우선 기초질서를 전담하는 자회사나 용역직원들이 있었으므로 공사직원이 직접 그 거친 남성위주의 이용자들을 상대할 일이 적었고 그 이용객들도 점점 시민의식이 좋아져 그리 거칠게 행동하지 않았다. 야간근무의 고단함은 점점 줄어들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관리감독자의 위치에서 민원전화를 받고 근무일지를 쓰고 그러는 수준이 되었다. 그즈음 나는 회사에 입사를 했고, 여직원은 왜 근무를 서지 않는가에 대해 궁금해했더니 이제는 그 이유가 여직원당직실이 없어서, 모성보호를 위해 본인동의 없이는 세울수가 없어서 등으로 옹색해졌다. 시설은 만들면 되고 동의야 받으면 되는건데 왜 그게 여직원은 야간근무를 설 수 없는 이유가 되는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 회사에서는 야간근무 또한 하나의 기득권이었던거였다. 야간근무를 해보지 않으면 회사의 핵심을 모르는거라서 주요업무를 줄 수 없다며 여직원은 주요 보직에서 배제되기 일쑤였고, 야간근무를 하고나면 익일 비번을 쓸 수 있으므로 개인적인 볼일이 있는 경우 야간근무를 조정하면서 휴가 대신 비번을 이용할 수 있는 편의성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남직원은 힘들고 고되게 일을 하니 이것저것 이해해주고 보상해주는게 당연하며 여직원은 그 힘든 야간근무도 하지 않고 편한 부서에만 배치되니 지속적으로 하찮은 존재로 여겨지는 문화가 만연했다. 이런 우월적 지위를 포기하기 싫고 나눠갖기 싫으니 여직원의 야간근무를 도입하기가 싫은거였다.


그런 와중에 기본급 손질 방안이 마련됐다. 역시나 각종 야간근무 수당과 횟수를 조정해서 기본급화 하는 방안이었는데 야간근무를 하지도 않는 여직원들까지 같이 기본급이 오르게 되니 그건 싫었는지 기본급을 올리되 여직원의 호봉을 1호봉 강등하자는 결론이었다.

그동안의 숱한 차별과 멸시는 참는다 해도, 경력으로 인정되는 호봉이 이런 이유로 강등되는건 정말 참을수가 없었다. 화가 나서 여직원들과 공론화를 해보니 연차 높은 여선배들 말이 그동안 두어번 이런일이 이미 있어왔다고 했다. 이렇게 계속 편하게 여직원의 호봉을 손질해왔다는 말에 더 화가 났다.

당장 여직원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여직원도 야간근무를 서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노동조합과 총무팀에 의견을 전달했다. 그랬더니 황급히 노무부장이 여직원들을 소집해서 사측의 의견을 전달했다. 너희들은 몸이 약하니 너희들의 건강을 생각해서 야간근무를 안세우는거로 회사에서 결정했다고.

정말 대꾸할 가치도 없는 기가막히고 코가 막히는 발언이었다. 다시 노조위원장을 찾아가 얘기했다. 야간근무 서겠다고. 노조위원장은 앞에서는 그래그래 잘 생각해보마 라고 얘기하고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여선배에게 이런말을 했다고 한다. 여직원들 자꾸 이러면 다 계약직으로 돌려버리겠다고.

여직원이 전체의 15%쯤 되는 회사였다. 대다수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너무 적은 인원도 아니었으며, 본인들의 이득을 나눠준다 해서 크게 손해볼 정도도 아닌데다 계속적으로 무시하기도 어려운 인원이었다. 이런 오묘한 위치의 여직원에게 회사는 그 추한 민낯을 드러내버리고 말았다.


노사 양측의 결사반대 속에서 여직원들은 규합했다. 여직원의 야간근무를 시행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강한 의지를 표출하자 반대의 명분이 없는 노사는 결국 미적미적 꾸물꾸물대면서 뭔 근무체계를 개편하고 통폐합하고 그런 뒤에나 도입하자고 하면서 1년 넘게 질질 끌다가 결국 도입했다. 물론 여직원의 급여를 깎아내리고픈 소기의 목적을 달성 안할 회사는 아니었으므로, 야간근무를 하지 않는 직원을 대상으로 기본급의 일정부분을 삭감하는 ‘조정수당’이라는 신박하고도 듣도보도 못한 마이너스 수당을 만들어서 여직원 야간근무가 전면 시행되기 전까지 악착같이 월 30만원 가량을 월급에서 제했다. 또한 여직원 호봉삭감이 불발되자 갑자기 군호봉 50% 인정 규정을 100% 인정으로 고쳐서 군필자 남직원들의 호봉을 1호봉 올렸다. 사실상 완벽한 목적달성이었으며 이 절묘한 시기의 규정 개정에 감탄할 지경이었다. 남직원들은 천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군경력 인정 확대에는 불만이 없다. 당연히 인정하는게 맞지만 시기가 참 완벽했다는 생각이 들 뿐.

여직원 근무가 시작된지 지금 약 4년이 흘렀다. 여직원이어서 대응이 부족했던 사건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고 꽤 많은 남직원들은 여직원들도 함께 근무를 서서 대폭 줄게 된 야간근무 횟수에 만족했다. 그간의 차별을 상상할 수 없을정도로 현재는 꽤 동등한 수준으로 남녀직원이 대우를 받아서, 신입 직원들에게 그 사건을 말해주면 깜짝 놀랄 정도다. 이렇게 문화는 바뀌어지지만, 기득권을 내려놓게 하는 과정은 참으로 순탄치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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