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꼰대가 되어간다
경험과 연륜이 꼰대로 전락하는 아쉬움
생후 5개월짜리 둘째를 키우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오랜만에 술자리에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혼자서 저녁나절에 아이 둘을 돌보다가 재우기까지 하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아는 나는 웬만해서는 저녁 외출을 안하려고 했으나, 매우 친한 회사 선배의 연락이기도 했고 남편도 흔쾌히 오랜만에 기분전환 하고 오라며 보내주기도 해서 기분 좋게 집을 나섰다.
술자리에는 회사 선배 두명이 더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은 거의 입사 초에 보고 10년가까이 제대로 보지도 못했던 선배였다. 무척 반갑긴 했으나 사실 서로 아는거라곤 이름과 얼굴, 그리고 좁디 좁은 회사에 퍼져 있는 평판 정도였다.
평판에 따르면 그는 유명한 애주가에 골초, 그리고 마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나 외모는 호리호리하고 수려하며 명문대 출신이었는데, 뭐랄까, 버터왕자 라는 별명을 가진 그 학교 출신의 유명한 가수가 딱 연상되는 사람이었다.(그 가수를 비하하려는 목적은 절대 없다. 대신 비슷한 나이대에 같은 학교 출신, 그리고 왠지 대학시절 여대생들에게 인기도 꽤 있었을거같고, 그러나 익히 널린 소문에 따른 이미지대로 약간 나쁜남자 이미지가 있다는 점에서 유사한 느낌을 받았을 뿐이다.)
여하튼 그도 오랜만에 보는 날 매우 반갑게 대해줬다. 다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우리는 빠른 속도로 취해갔다. 90년 후반~00년 초반 학번인 우리는 싸이갬성이 넘치는 시절에 대학을 다녔던 같은 세대 사람이었다. 또한 가족(?)같은 회사에서 서로의 사생활을 매우 침범하는 문화속에서 신입~대리 시절을 함께 보낸 사이였다. 이제는 나이가 40이 넘어가고 차장, 과장이 되어있다는게 서로 놀라운, 더이상 젊지 않은 세대. 몰려오는 90년대생이 조금 불편하고 이해가 안되지만 이해하는 척을 하는 낀세대다. 특히 그는 그게 매우 적성에 안맞는 눈치였다.
술이 얼큰하게 취하자 그는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 자리엔 눈치봐야하는 90년대생이 없으므로 "우리끼리 하는 얘기지만~" 이라며 거침없이 속내를 표현했다.
그는 예쁜 여직원에게 예쁘다 라고 말하지 못하는 지금의 현실을 개탄했다. 서로 매력적이라고 느끼는건 남녀의 본성이고, 예쁘다는 말은 칭찬이므로 비하하려는 의도가 절대 없으며, 외모의 장점을 칭찬하면서 분위기도 부드럽게 만들고 딱딱한 관계에서 벗어나고자 함인데 왜 자기 맘을 몰라주느냐는거다.
그의 억울함을 알 것 같긴 하다. 지금은 시선처리만 조금 잘못해도 영락없이 징계위원회에 회부되는 시대 아닌가. 자유롭게 여후배들에게 술을 권하고 예쁘다고 칭찬하며 술자리 분위기를 왁자지껄하게 이끌어가던 명문대생 오빠이자 훈훈한 이미지의 대리님으로 십수년을 살아온 그가 이 삭막해진 시대에 숨이 막히는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대가 삭막하게 변한게 아니라 그동안 그가 무심하고 경솔했던 것을 경고하고 바로잡아가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성의 매력적인 부분에 끌리는 것은 남녀의 본성이 맞다. 마치 음식을 보면 군침이 돌듯, 매력적인 이성을 보면 시선이 머무는 것은 본능적인 행위다. 나도 마찬가지로 젊은 남자후배들을 보면 그 신체적 매력에 눈길이 저절로 간다. 170cm를 넘는 사람도 눈씻고 찾아봐야 하던 이 회사에, 180cm를 훌쩍 넘고 어깨가 떡 벌어진,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후배들을 보노라면 그 키와 어깨너비를 감상하느라 나도모르게 시선이 머문다. 어깨를 다 편건지 접고있는건지 모르겠는 등산복 차림의 후줄근한 차장 과장들보다야 그런 훤칠한 신입사원이 눈에 들어오는건 이성을 향한 당연한 본능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본능을 누르고 이성을 앞세운다. 내 시선을 불쾌하게 느낄 수 있으므로 눈길을 거두어야 한다. 예전같았으면 노골적인 눈길+와 너무 예쁜데? 무슨 좋은데 가나봐~ 같은 멘트를 세트로 결합하여 내던지곤 했겠지만, 시선 거두긴 어려워도 입 틀어막기는 쉽지 않은가. 우선 쓸데없는 발언을 하지 않도록 입을 다물고, 부적절한 시선도 빨리 거두어야 한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그리고 아무리 "예쁘다, 잘생겼다" 가 칭찬이라 할지라도 때와 장소에 맞는 칭찬이 아니면 그 또한 하지않는게 맞다. 예쁘고 잘생긴건 소개팅이나 썸타는 사이에서 하는 칭찬이지 직장상사와의 대화에서 나올 단어는 아니다. 아빠가 딸에게 '섹시하다' 라고 평가하지 않듯, 어떤 관계에서는 사용하지 않아야 할 단어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일하는 공간에서 만난 사이고, 서로의 업무능력을 평가해서 성과급을 책정하는 관계에서 예쁘다 잘생겼다 참하다 등등의 평가가 오가는건 어울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와 친밀함을 쌓기 위해서 그런 말이 하고싶다면, 과연 상대방도 내 발언에 부드러움을 느끼고 친밀감을 느끼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특히 아이스브레이킹을 위하거나 호의를 표시하기 위해 외모 칭찬을 하는 경우가 있다. 아이스브레이킹을 해야하고 호의를 말로 표현해야 알 수 있는 사이라면 약간 서먹한 사이라는 뜻인데, 그런 사이에서 갑자기 외모를 언급하면 더 어색하지 않을까.
그 선배는 실컷 아쉬움을 토로하더니, 마무리는 본인 업무성과 자랑으로 맺었다. 대리 시절에는 누가봐도 자유로운 영혼으로, 조직의 경직성을 혐오하고 조직에 충성하거나 조직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가당치않게 여기던 사람이었는데 어느새 그도 나이가 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저 그런 월급쟁이가 되어있었다. 그 모습이 나쁜건 아니나, 자격증 준비와 아이 둘을 낳느라 휴복직을 반복하고 있는 날 조금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그의 태도는 불쾌했다. (넌 왜 조직에 헌신하지 않니? 네 개인사정으로 그렇게 회사를 들쭉날쑥 다녀서야 승진은 하겠니?) 라는 말을 겨우 삼킨 듯한 눈빛으로 "역시 여자들은 일을 안해" 라고 말하는 그를 보며, 누가 그를 이토록 전형적인 꼰대로 만들었나 탄식이 나왔다.
그날 술자리에 나가지 않았다면, 난 그 선배를 나이가 좀 들었어도 여전히 시크하고 준수한 사람, 회사에 목을 매고 다니지 않았음에도 출중한 능력이 감춰지지 않아 주요 보직을 골라 맡으며 승승장구 중인 사람으로 알고 지냈을텐데. 조금 씁쓸했다. 그리고 나 또한 어느날 한동안 못보고 지낸 후배를 만났을 때, '헐 저선배 완전 꼰대됐네.' 라고 느끼지 않도록 항상 나를 다듬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