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에서 얼마나 힘든 역할을 하고있는가
공기업을 평사원으로 13년을 다니다가 소규모 기업으로 이직을 했다.
공기업은 수직적이고 경직적인 문화였고,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 사장-팀장-팀원으로 이어지는 소통 구조였다. 사장과 팀장 사이에 본부장이 있었으나 실무에서 벗어나있고 퇴임을 앞두고 있으니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지 않았고, 팀원들은 물론 차장-과장-대리-주임-사원 의 수직적 구조를 이루고 있긴 하나 업무 담당자 위주로 책임을 지는 구조여서 팀장과 각자 다이렉트로 소통하였다.
사장은 임명제로 외부에서 선임되고, 임기제여서 3년 재직 후 떠나게 되어있었다. 그래서 사장의 스타일에 따라 회사 분위기는 3년마다 휙휙 바뀌곤 했는데, 정치적 야망이 많고 이루고자 하는 바가 많은 사장은 임명되자마자 팀장들을 닦달하며 사업을 벌려놨고, 다음 사장이 오면 그 일은 흐지부지 되면서 새로운 사장의 역점 사업에 다시 3년을 끌려다녀야했다.
문제는, 팀장은 수십년을 이 회사에 근무하며 조직의 특성과 경영환경, 회사의 입지와 처한 상황 등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인데, 신임 사장의 거창하고 신선한 바람들을 수행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사장 입장에서는 직원들이 고루한 우물 안 개구리처럼 보이고, 직원들 입장에서는 3년 뒤면 물러날 사람이 앞뒤 사정도 모르고 일을 벌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팀장은 어떻게 조율해야할까?
새로운 회사로 이직하고 몇개월만에 팀장이 되었다. 해당 업종 관련된 전문 자격증이 있어서 취업은 했으나 업무 경험이 미천했다. 직원들은 경력이 5~6년 정도는 되는 나름 베테랑들이었다. 사장은 팀장을 겸해서 한 팀을 꾸려가고 난 나머지 한 팀의 팀장을 맡았다.
사장은 심지어 몇년을 알고지낸 지인이었다. 업무가 미숙한 나를 차근 차근 가르쳐줬지만, 그렇다고 몇개월만에 팀장을 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혼자 끌어가기에 피로도가 높았던 사장은 무턱대고 팀을 꾸려 나에게 맡겼고, 나를 아주 신뢰하고 있으니 네가 원하는 대로 팀을 이끌어가라, 너의 팀 문화를 만들어라, 고객에 대한 거의 모든 권한도 다 줄테니 너의 결정대로 다 끌어가면 된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장은 언행과 달리 행동은 그렇게 쿨하지 못했다. 말로는 모든 권한을 다 준다고 했지만 고객 응대 하나하나에도 첨언을 했고, 미숙한 네가 실수를 저지를까봐 그러는거다 라고 말은 하지만 사장이 원하는대로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특히 팀원들을 통솔하는건 내 몫이라고 했지만 누가 근태가 좋지 않은데 뭐라고 좀 해봐라, 누가 이런 민원이 들어왔는데 일을 어떻게 하는건지 체크좀 해봐라, 누구 고객 응대 말투가 별로던데 네가 잘좀 가르쳐봐라 등등, 나는 그냥 사장의 의중을 직원들에게 전하는 도관 같은 존재가 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팀장이랍시고 직원들과 교감도 하고 소통도 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사장과 직원 가운데에서 점점 허수아비가 되고 나니,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알수가 없었다. 어떤 일을 팀원과 상의해서 결정해도, 사장이 이거 아니라고 해버리면 팀원한테 굉장히 민망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급기야는 팀원들이 나한테 얘기하느니 사장한테 직접 묻는게 한번에 해결되니까 내가 화장실 간 틈을 타 몰래 사장에게 물어본다던가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팀원들은 나에게 민망해했고, 나도 애써 태연한 척 하지만 늘 쥐구멍에 숨어있고 싶었다. 사장은 내가 팀을 잘 다루지 못해서 팀원들이 사장에게 자꾸 찾아온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 난처한 상황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1년 가량 버티다가 퇴사를 했다. 내 경력이 부족해 팀장을 맡기기에 불안했다면 좀 더 기다렸다가 팀장을 달아줬으면 좋았을 걸, 나를 믿어보겠다고 팀장을 맡겼으면 권한을 좀 넘겨주는게 더 좋았을 걸, 업무를 위임했지만 사장 스타일로 이끌어가고 싶었다면 나를 허수아비로 만들지 않는 방법을 좀 고민해주었다면 좋았을 걸 등등의 많은 생각을 뒤로 하고, 창피하고도 창피한 내 첫 팀장 경력을 마무리했다.
그러고보니, 공기업에서의 팀장들은 얼마나 고되었을까 생각이 든다. 담당자와 이리저리 상의해서 만든 보고서를 들고 사장에게 들어가, 온통 깨지고 돌아나와서 담당자에게 전부 수정을 지시할 때, 팀장은 얼마나 쥐구멍에 숨고 싶었을까. 나야 경력이 미천했지만 팀장들은 그 회사에서 수십년의 경력을 갖고 있었다. 담당자의 업무 방향을 잡아주고 팀장의 견해로 완성된 보고였을터다. 누구보다도 그 분야의 베테랑으로서 팀원들의 조타수가 되어 이끌어가고 있는데 사장의 의견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냥 좌초된다. 중년의 지긋한 팀장들이 머쓱하게 웃으며 '다시 하자' 라고 말하던 그 속내가 어땠을까.
지나고 나니 왜 그렇게 보고서 한줄 한줄에 팀장이 묻고 확인하고 자료를 요구했는지 이해가 된다. 사장에게 최대한 깨지지 않고 승인받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거였다. 난 그것도 모르고 쪼잔하게 한글자 한글자에 집착한다고 우습게 생각하곤 했다. 배려없는 독단적인 사장 아래에서 팀원들을 보호하고 자신의 위치를 보전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던거다.
큰애는 호기심이 많고 활발하다. 친구들이 놀러오면 친구들과 동생을 우르르 끌고다니며 놀이에 푹 빠진다. 나는 어른들과 대화하다가 무심코 돌아보면, 베개를 다 끄집어내서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다던가, 절대 허용하지 않았던 베란다 타넘기 등을 진두지휘하며 놀고 있다. 이렇게 놀지 말라고 큰애에게 호통을 치면, 재빨리 뒤돌아서 자신을 따르고 있는 무리에게 상황을 설명한다.
"얘들아, 이건 안된대. 왜냐면 이건 위험하기 때문이야. 자 그렇다면 우리는 저쪽에 가서 저 놀이를 하자"
하고 다시 우르르 끌고 새로운 놀이를 진두지휘한다. 큰애를 따르던 아이들은 다시 반짝반짝한 눈을 하고는 큰애를 종종종 따라간다.
그런 모습을 보니, 열정 넘치는 팀장이 팀원들에게 이런 저런 규칙과 방법을 지시하며 놀이를 신나게 진행하고 있는데, 독단적인 사장이 나타나 (본인들은)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좌초시키는 꼴이었다. 그 순간 좌절된 놀이보다는, 뒤를 따르고 있는 팀원들을 다시 설득하고 다른 방향을 제시하는게 먼저인거다. 팀장만 따라가다가 영문도 모르고 중단된 놀이를 팀원들한테 다시 설명해야하는 큰애는 얼마나 머쓱했을까?
앞으로는 위험한 놀이가 아닌 이상 어느 정도의 권한을 위임하고, 안되는 상황이라면 대놓고 팀장에게 호통치기보다는, 팀원들까지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유를 차분하고 예의있게 전달해줘야겠다. 내가 받고 싶었던 팀장 대우, 우리 큰애에게 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