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시선 의식하지 않고 살기
장롱면허로 살다가 아이가 생기자 더는 버틸 수 없어서 몇년 전에 차를 샀다.
첫 차로 고른건 무난하고 편하게 쓸 수 있는 준중형 SUV였다. 국산 차에 대한 불신이 컸던 남편은 외국 브랜드 중에서 튼튼하고 내구성이 좋으며 가격도 합리적인 차를 눈여겨 봐두었고, 별다른 고민없이 그 차를 선택해서 열심히 몰고다녔다. 별일 없으면 10년 정도 타다가 아이들 덩치가 커지면 좀 더 큰 차로 바꿔야지 하고 생각하고있었는데, 만 5년이 안되어 사고가 났다.
사고는 어처구니없게도 남편의 졸음운전이었다. 둘째가 차에서 잠들어서 조금 더 깊이 재운다고 한적한 주차장을 뱅뱅 돌다가 남편이 졸았고, 천만다행으로 주차장 기둥에 갖다박아 다른 차나 인명피해는 없었다. 졸다가 차를 박았다는 남편의 전화를 받고 허겁지겁 주차장으로 내려가보니, 차 범퍼와 보닛이 기둥 모양대로 콕 찍혀있었다. 그래도 남편은 다친곳이 없어보였고 둘째도 무사해서 안도하며 차를 살펴보니 내부에 에어백이 다 터져있었다. 그리 큰 충격이 아닌것같은데 에어백이 터졌다니 왠지 안전함에 신뢰가 갔고, 에어백 덕분에 남편이 다치지 않은건가 싶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야 뭐 고치면 그만이지, 하고 보험사를 불러 차를 보냈다.
다음날 수리센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견적을 내봤는데 재료비만 2천만원이 드네요. 부가세는 별도구요."
"....네...?????? 엔진이 다 망가졌나요??"
"엔진은 괜찮아요."
"그럼 뭐땜에 2천만원이 나왔죠..? 범퍼랑 보닛만 갈면 될것같은데요.?
"에어백이 터졌잖아요. 에어백은 터질때 좌석 시트를 다 찢고 나오는거라 전부 다 교체해야해요."
오마이갓. 에어백이 터지는게 그렇게 큰 일인 줄 미처 몰랐다. 에어백은 안전하게 터져야만 하는거고, 터지고 나면 다시 접어서 고이 넣을 수 있는건줄 알았지, 이렇게 시트를 다 찢어발기면서 나와서 비싸게 교체해야 하는건줄 누가 알았겠는가. 고작 콩 하고 박은 졸음운전에 에어백이 터진걸 원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에어백은 아주 중요하긴 한데, 웬만한 사고에는 안터지길 바래야 하는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보험사에서는 수리비가 너무 비싸서 차량 잔존가 이상의 금액은 내가 부담해야 한다고 했다. 자부담만 천만원 넘게 들 터였다. 보험사에서도 보통 이런 경우 돈들여서 고치느니 그냥 폐차하고 차량 잔존가를 보상받아 새 차 사는데 보태는게 낫다고 했다. 에어백 없이 타고다니거나 드물게는 에어백을 재활용하는 방안도 있다고는 하는데 둘 다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아이들을 태우고 다니는 입장에서는 고려할만한 대안도 아니었다.
울며 겨자먹기로 새 차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차량 잔존가를 받을 수 있으니 수리했다면 들었을 자부담액+잔존가 하면 국산 중형차 한대는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국산차도 얼마나 비싼지 그 금액으로는 준중형 승용차도 살까말까였다. 이돈이면+기왕이면 을 시전하다보니 어느새 유명한 외제차 브랜드까지 기웃거리고 있었다. 마침 올뉴체인지를 코앞에 두고 있어 기존모델을 대폭 할인하는 행사도 한다길래 갖고 있던 예적금을 탈탈 털어 그 차를 사기로 했다.
그러고보니 평소 유명한 외제차들에 대해 동경이 꽤 컸던 것 같다. 길거리에는 외제차가 왜 그렇게 많은지, 다들 부자인건지,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외제차를 턱턱 사던데, 막상 나는 너무 부담스러워서 도무지 지출할 수 없는 금액이던데, 그런 차를 드디어 나도 타고 다니는건가 싶어서 처음에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물론 아무리 할인폭이 컸다 해도 보험 잔존가를 받지 않았다면 결코 사지 않았을 금액이지만, 남들은 내가 보험비를 받았다는 것을 모를테니까. 내가 능력이 있어서 외제차를 산 줄 알겠지.
아이들은 새로운 차를 타게 되어 신이 났다. 클래식했던 기존 차와 다르게, 이 차는 디스플레이도 멋들어지게 크고 내부조명도 쫙 들어오는게 애들이 보기에도 더 좋아보였나보다. 큰 애가 이 차의 이름은 뭐냐고 물었고, 남편은 아무렇지않게 브랜드명을 알려줬다.
그런데 거기서부터가 문제였다. 수다스러운 성격인 큰애는 누굴 만나든 새로운 차에 대해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큰 소리로 '우리 차는 OOO이에요!' 라고 외치고 다니는데, 아차 싶었다. 예전에 읽었던, 아이들이 하도 차 브랜드 얘기를 해서 집에 온 아이가 '엄마 왜 우리는 벤츠 없어?' 라고 했다는 기사가 떠오르면서, 갑자기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차 이름을 외치고 다니는 큰애를 보면서 다른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저 부모는 외제차를 사고 얼마나 자랑을 하고 다녔으면 애까지 저러고 다니느냐고 생각하지 않을까.
사실 나는 유명 브랜드나 명품에 대해 반감이 좀 있는 편인데, 그 이유가 '무리해서 샀다는 티가 날까봐' 인 것 같다. 돈이 아주 많아서 푼돈이라고 여기며 사는건 상관없는데, 그 정도로 부유하지 않으면서 수백만원의 물건들을 사서 걸치고 다니면 남들이 '쟨 저거 하나 어렵게 장만해서 자랑하려고 들고다니는구나' 라고 생각할것만 같았다. 지금 차를 산 모양새도 딱 그렇지 않은가. 능력도 안되는데 저 차를 사느라고 얼마나 돈을 모았을까, 보험 잔존가를 받았다고? 그럼 그 돈 없었으면 사지도 못할 애 아냐?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로고가 박혀있는 차 키를 들고다니는것도, 남들 앞에서 차에 타고 내리는것도, 누굴 태우러 간다거나 데려다 주는것도, 다 자랑질로 여겨질까봐 주저하게 되었다. 아는 사람들을 주차장에서 마주치면, 다 지나갈때까지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숨어있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남들은 아주 놀라울만큼 나에게 관심이 없을것이다. 애초에 내가 차에서 내릴 때 나에게 그런 시선을 보낼 만큼 나에게 관심들이 있을까. 남들은 아무생각 없는데 어멋, 들키면 안되는데! 하고 관종짓을 하고있는 것 아닌가. 게다가 더 중요한건, 애초에 주목을 받을만큼 비싸고 좋은차도 아니다. 나 혼자 호들갑 떨면서 남의 시선이 어쩌고 하고 있는거다. 이래도 남의 시선에 연연하고, 저래도 남의 시선에 연연하는, 전형적인 주체성을 상실한 인간의 본보기이지 않은가.
이효리가 오랜만에 신곡을 냈다고 한다. 노래는 아직 못들어봤는데, 인터뷰 기사를 보니 '다른 사람의 기준에 따르기보다 자신이 생각하는 길을 걸어가자'는 메세지의 곡이라고 한다. 각자의 삶은 자기 생각대로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내용을 담아 편하게 발매한 곡이라던데, 난 언제쯤 이효리처럼 나 편한대로 후디에 반바지를 걸치고 내 생각대로 살아가게 될까. 아직도 멀고 먼 미생의 삶인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