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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sdom Sep 20. 2023

P와 P의 여행

누가 더 대책없는가의 대결

남편과 아이들과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가기로 했다.

남편은 해외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데다, 둘째가 36개월은 되어야 비행기 타는게 좀 수월할것같다는 판단 하에 그동안 해외여행을 엄두도 내본 적 없는데, 이제 둘째도 어느정도 컸겠다, 아이들과 가기 만만하다는 대표적인 휴양지를 가기로 결정했다.


가기 전부터 남편은 툴툴댔다. 더위를 싫어하는 남편인데 더운 나라를 굳이 찾아가는 점, 비행기 타는것도 싫어하는데 비행기를 5시간은 타야한다는 점(생각해보면 그동안 비행기는 둘째보단 남편때문에 못탄듯 하다) 등이 불만사항이었지만, 더이상 불만을 가졌다가는 제명시켜버릴 것 같은 내 눈빛을 읽었는지 얌전히 따르기 시작했다.


문제는 나도 남편도 P성향이라는 점. 패키지가 아닌 자유여행인데, 누군가는 꼼꼼하게 일정을 짜야 했다. 국내여행이야 일단 내비 찍고 목적지까지 간 뒤에 지나가면서 보이는 북적대는 식당에 들어가거나, 현지에서 '아이와 가볼만한 곳' 등을 검색해서 대충 돌아다니면 되는데, 해외는 그렇지는 않지 않은가(물론 자주 해외여행을 다니면 결국 해외도 네이버+구글지도 검색 조합이긴 하겠지만 해외여행 초보로서는 모든게 막막했다).


일단 해외여행을 결정하고 여행지를 정하는데에는 나의 의견이 100%였으므로, 울며 겨자먹기로 내가 준비를 시작했다. 아이들과 말도 안통하는 낯선 곳에서 헤맬 수는 없다는 절박함이 내가 더 크기도 했고. 4박5일 일정에 맞춰서 방문할 곳, 먹을 곳을 정하고, 리조트에서의 휴식과 관광의 일정을 조화롭게 배정하고, 지루하거나 질리지 않도록 먹을것과 놀것을 배치해야했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P도 해낼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동선과 이동수단과 길찾기, 하루중의 시간 안배 등은 촘촘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길바닥에서 헤매기 십상이었다. 택시를 타고 A관광지 갑시다. 한다고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A관광지 어느 위치에서 내릴 것인지, A에 가면 뭐가 유명하다는데 그걸 찾아갈 수 있는지, 걸어갈 수는 있는지, 돌아올때는 어디서 다시 택시를 잡을 수 있는건지 등등도 미리 어느정도는 알아놔야 양손에 아기들을 붙잡고 생고생 하지 않고 수월한 여행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도 남편은 1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항상 어디에 놔둬도 날 쳐다보며 "이제 뭐해? 이제 어디가? 이제 뭐먹어?" 만 남발하는데 정말 분노가 치밀었다. 모든걸 내가 계획했다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의견이라도 낼 수 있는 것 아닌가. 오늘은 A에 갈거야? 그럼 나도 좀 찾아봤는데 A에는 이런 맛집이 있대. 오늘은 이걸 먹어볼까? 이 나라에 왔으니 이 메뉴는 먹어보고싶어. 등의 의견과 참여는 해주길 바랬다. 7세와 4세인 아이들조차도 시장에 가면 장난감을 살래! 더우니까 수박주스를 시켜줘! 정도의 의견을 내는데, 남편은 맥주 하나조차 고르지 못하고 다 나에게 내밀었다. 자긴 뭐든 좋고 상관이 없어서 라고는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무성의해 보일 뿐이었다. 유일하게 하는 일이라곤, 구글 지도를 던져주면 길을 찾는 일 뿐이었다(길이라도 잘 찾아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계획짜는데 1도 일조하지 않은 사람 입장에서는, 100%를 계획한 사람이 헤매기 시작하면 그걸 원망한다는거다. 이것도 안알아보고 뭐했어? 이걸 알아왔어야지. 나야 모르니까 알수가 없잖아. 라고 하는데 정말 발로 뻥 차서 지구 밖으로 날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싶은 심정이었다.


그러고보니 그동안의 나의 모습이 또 떠올랐다. 친구와의 약속에서도 항상 뭐먹을래? 하면 아무거나. 그래 네 의견대로 하자. 그래 거기서 보자. 그래 그 시간에 만나자. 친구들과 다닌 여행에서도 항상 그래, 거기서 묵자. 그래 거길 가보자. 그래 네가 좋다니까 그렇게 하자. 

그게 배려인 줄 알았다. 난 다 좋으니 너 원하는대로 하자. 네가 좋으면 다 좋아! 라는 입장이었는데, 상대방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특히 상대방이 파워 J였다면?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P를 데리고 촘촘하게 계획 세우고 결정하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J인 지인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 오늘저녁에 야경 볼래 아님 놀이공원 갈래? 라고 물어보면 야경볼래! 정도의 결정은 해주면 좋겠다고. 그래야 알아본 보람도 있고 의견도 모을 수 있어서 좋다고. 그리고 최악인건, 야경볼래 놀이공원 갈래? 물었는데 뭐야, 둘다 덥고 피곤해서 싫은데? 라던가, 아무거나 하자 해서 야경으로 골랐는데 뭐야, 고작 이거보러 나온거야? 라는 식의 반응이라고 했다. 니가 계획을 세우던가! 아님 따라오기로 했으면 군말말고 따라오던가! 를 해야하는거다. 


다행히 남편은 택시 승강장을 못찾아서 잠깐 헤맸을때 망언을 한 것 빼고는 대체적으로 잘 따라왔다. 덥고 힘들어도 아무 내색 안했고, 유치하거나 대수롭지 않은 일정이었어도 불평하지 않고 잘 다녔다. 그리고 지도를 주면 길을 잘 찾았고, 그놈의 "뉴욕에서 1년 어학연수" 한 경력은 영어 소통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내가 말문이 막힐때마다 그놈의 "외국인 두려워하지마 다 별거아냐" 마인드로 손짓발짓으로 소통을 해냈다. 그리고 아무것도 적극적이지 않았던 남편이 유일하게 면세점에서 양주를 굉장히 적극적으로 고르는 모습에 심상한 것 빼고는.... 대체적으로 괜찮은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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