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쟁이도 유전이 되나요?
날씨는 점점 추워지는데, 마땅히 입을 만한 코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패딩만 뒤집어 쓰고 다니는 아줌마로 늙고싶지는 않은데, 이 참에 멋들어진 코트를 장만하고 싶어졌다. 게다가 나만 명품 코트가 없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또 뭔가. 그래서 다짜고짜 남편에게 선언했다.
"자기야. 나도 멋진 명품 코트 하나 살래."
"명품코트? 그래 사! 근데 너만 멋진 코트 없는게 아니야. 나도 멀쩡한 코트가 없어. 내 코트 10년도 더 된 코트야. 그런데도 그냥 입고다니잖아."
"무슨소리야 자기야. 자기 코트가 얼마나 멋있는데!! 난 진짜 코트가 없다니까?"
내가 코트를 사겠다 하니 남편도 이참에 따라서 사려고 하는 것 같아 말려보고자 그냥 내뱉은 말이었다. 그리고 애들이 치근덕대서 과일을 깎아주려 주방으로 향했고, 분주히 일을 하고 있는데 남편이 쓱 다가와서 물었다.
"그런데 무슨 코트가 그렇게 멋있어? 검정색? 갈색?"
그렇다. 남편은 내가 진정으로 본인을 멋있다고 말하는 줄 알았던거다. 그렇지. 폼생폼사 인간인데, 그냥 한 소리도 흘려듣지 않는 사람이지.
남편은 키가 187cm에 탄탄한 몸매를 가졌다. 자세히 뜯어보면 얼굴이 너무 크고 각이 졌지만, 멀리서 보면 눈에 띌 정도의 체격이긴 하다. 얼굴은 부리부리하게 생겨서 젊은 사람들이 호감을 가질 만한 생김새는 아니지만, 중년 또는 노년의 할머니들에게는 인기가 많을 인상이다. 젊었을때부터 식당에 가면 "잘생긴 총각 많이 먹어!" 하면서 반찬 하나 더 내어줄법한 외모랄까. 결혼하고 같이 어딜 다니면 "잘생긴 신랑 둬서 새댁 좋겠네~" 라는 말을 심심치않게 들었다. 내 친구들은 그런 반응에 약간 의아해하고, 우리 엄마는 끄덕거리며 인정하는걸 보면, 확실하게 남편은 중년층의 로망인 듯 하다.
신혼 시절, 어느날 술을 한잔 하고 들어온 남편이 설거지 하고 있는 내 옆에 털석 주저앉아 나지막히 나를 불렀다.
"자기야.."
그 순간 나는 왠지 마음이 철렁 했다. 무슨 사고를 쳤나? 회사에서 잘렸나? 안좋은 일이 생겼나? 왜 저렇게 부르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설거지를 중단하고 뒤돌아서서 대답했다.
"왜...?
"나..... 장동건 닮았어...?"
"....?????"
남편은 술을 마시고 온 밥집에서 주방 아주머니로부터 '장동건 닮았다'는 소리를 듣고 온 것이었다. 그걸 그렇게 진지하게 얘기하다니, 난 정말 무슨 사연을 고백하려는건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남편도 그렇게까지 극찬은 처음 들어봐서 감동스러웠던 날이었나보다.
결혼하겠다고 인사드렸을때도 우리 엄마의 첫 반응은, 외모 잘난 남자 만나면 인생이 피곤하다는 거였다. 잘생긴 사람은 잘생긴 값을 할거라며 너 속 끓이면 어쩌냐고 걱정을 했는데, 나는 남편이 우리 또래에게는 먹히지 않는 얼굴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미 중년인 엄마 눈에는 그렇지 않았나보다. 그 걱정을 남편이 이미 중년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아직도 하고 계시다.
"네 남편 허튼짓 하지 않게 단속 잘해."
"엄마, 아직도 그소리야? 이제 저사람도 많이 늙었어."
"아냐. 아직도 눈에 얼마나 띄는데. 엄마가 저번에 길을 걷는데 어떤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가길래 어? 하고 다시 쳐다봤는데, 글쎄 그게 김서방이었다니까."
맙소사. 도대체 언제까지 남편은 인기가 많을것인가.
그런데 남편도, 비록 동년배에게는 딱히 인기가 없었지만 표현력이 뛰어난 중년 이상의 아주머니들께 인기가 많다 보니 본인이 좀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젊은 사람들은 잘생긴 사람을 본다 해서 어머 잘생기셨어요! 왜이렇게 멋있어요? 하진 않을테지만 아주머니들은 다르지 않은가. 아이고 총각 훤칠허네~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연배인 분들의 장동건이니, 얼마나 칭찬을 많이 받고 살았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집 앞 슈퍼를 가도 머리에 왁스를 바르고 가야 하는 사람이다. 동네 경비아저씨, 부동산 사장님, 편의점 사장님 등등 지나가는 경로에 존재할 중년들의 시선을 의식해야하기 때문에.
그런 본인에게 늘 시큰둥한 나에게, 남편은 항상 말한다. 너도 나한테 빠질 날이 머지않았다고. 너도 중년 이상으로 나이가 들게 되면 자기를 잘생겼다고 생각할거라고. 몇년만 더 있으면 잘생긴 남편을 둔 부인이 될테니 기다려보라고.
그런데 멋쟁이도 유전이 되는건지, 큰아들이 점점 멋을 내기 시작한다. 지금 일곱살인데, 5살 무렵부터 헤어스타일을 완성하지 않으면 유치원을 가지 않았다. 그 애의 헤어스타일이란, 물을 발라 2:8로 머리에 딱 붙게 가지런히 빗는 건데, 귀여운 펌을 해주고 싶어도 본인 헤어스타일에 맞지 않는다고 고집을 부려 한번도 해보지 못했다. 친구들과 1박2일 여행을 가면 아침 일찍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시각에 호다닥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온다. 쉬가 마려웠나 싶었는데, 머리가 축축해져서 돌아오길래 이게 뭐지, 하고 보니 어느새 단정한 2:8 스타일을 세팅해놓고, 머리가 헝클어질까 베개에 대지 못한 채 엎드려 있다가 다시 잠이 든다. 왁스바른 머리가 헝클어질까 잠시 자는 낮잠은 반드시 엎드려서 자는 남편과 똑 닮았다.
멋에 대한 욕구가 넘치는 부자와 살고 있는 나. 외출하려 하면 번갈아 가며 헤어스타일을 만져대는 통에 현관에서 죽치고 기다려야 하는 내 인생. 피곤하지만 어쩌겠는가. 가꾸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 대신 외모에 집착을 하거나 외모지상주의 인간이 되지 않게 아들을 잘 키워야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