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이 넘쳐 흐르는 아들

딸같은 아들이 정말 있네요

by wisdom

아들만 둘이라 딸 없는 설움을 문득문득 느낄 때가 있다.

아직은 아기자기한 인형놀이 대신 자동차 레고놀이를 해야한다는 것, 예쁜 머리핀을 봐도 살 명분이 없다는 점, 오종종 하게 땋은 머리 대신 헝클어지고 땀에 절은 머리카락을 마주해야 한다는 점 등 약간 하찮은 서러움이지만, 나이가 들면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가 필요한 소소한 물건들을 알아봐주고 사다줄 딸래미가 없다는게 얼마나 서러울지.


우리 엄마만 봐도 딸만 둘이라, 무슨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딸들이 배송을 시켜대서 말 하기가 두렵다 했다.

걷기 운동을 하려는데 신발이 딱딱하더라, 하면 세상에서 가장 워킹하기 좋다는 운동화를 검색해서 대령하고, 얼굴 주름이 자꾸 늘어난다, 하면 피부를 보들보들하게 유지해 줄 타입의 화장품을 리필용까지 딱딱 맞춰 대령을 하니, 엄마는 인터넷 쇼핑도 할줄 모른채 살아도 된다.


반면 우리 시어머니는 해외직구도 스스로 하실 만큼 각종 분야를 섭렵하고 계시다. 처음에는 뭘 배송받고 싶은데 할줄 모르겠다고 나한테 연락이 왔었다. 귀찮긴 해도 몇번 해드렸는데, 직장에서 일하는 며느리한테 매번 연락하기도 그렇고, 아들놈은 전화를 받지도 않으니 그까이꺼 배우고 만다, 하고 통관번호까지 부여받아 혼자 터득하신 듯 하다.


나도 최대한 시어머니께 잘 해드리고 싶지만, 엄마를 대하는 마음과 시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이 다를 수 밖에 없다. 딸 같은 며느리가 절대 될 수 없듯이 엄마같은 시어머니는 있을 수 없다. 나도 아들만 있으니 앞으로 내가 받을 대접인가 싶어 시어머니께 잘해드리려 노력하게 된 게 그나마 개선점이랄까.


그렇지만 아들만 둘이면 그 중에 딸 노릇하는 애가 한명 있을거라고 했다. 딸 노릇을 해주는 아들이 있으면 좋겠지만, 아마도 그 애가 장가를 가면 시어머니를 향한 남편의 살가움은 와이프의 눈엣가시가 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래서 그 살가움을 누리는 것도 미혼인 아들에게나 바래야할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 짧은 기쁨이 우리 첫째 덕분에 그나마 찾아왔다.


첫째는 남자애 치고 표현력이 좋고 눈치가 빠르다. 사랑표현에 적극적이고 스킨십도 풍부하다. 엄마인 나를 매우 사랑해주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애정을 듬뿍 표현한다.


그 장점에 친정식구들 모두 사르르 녹았던 적이 있었는데,

재작년쯤 베트남 여행을 갔을 때였다. 이미 그곳을 다녀와본 적이 있는 언니가 여행지를 추천해주었는데, 배를 타면서 소원을 담은 종이배를 강가에 띄우는 곳이었다.

큰애에게 소원이 뭐냐고 물었더니, 고질라 에볼루션 리미티드 에디션 투 를 갖는게 소원이라는거다.

그래서 그런거 말고 좀 더 중요한 소원을 말해봐라, 너가 좋아하는 사촌누나(언니의 딸)는 예뻐지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그런게 진짜 빌 만한 소원이다, 라고 말해주었다.


사실 우리 조카는 우리 눈에는 굉장히 귀엽지만 본인은 외모가 맘에 안드는 눈치다. 눈이 작고 볼은 통통한데, 눈이 너무 작아서 아침에 찍은 사진을 언니가 보내오면, 친정식구들 모두 '많이 졸린가봐, 눈도 못뜨고 밥먹네.' 라고 얘기하지만, 언니는 저게 다 뜬거라고 말한다. 자세히 사진을 확대해보면 정말이지 눈을 뜨고있는 사진이긴 했다.

볼이 통통해서 손으로 몰랑몰랑 만지고 싶고, 작은 코는 맨질맨질하니 귀여운데, 어린 마음에 더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예쁜 공주님같은 아이가 되고 싶었겠지. 평소에는 그런 말을 하지 않던 아이였는데, 소원을 빌라 하니 냉큼 예뻐지게 해달라고 했다길래,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안쓰러우면서도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누나의 소원을 전해 들은 큰애가, 눈이 커다래지면서 말했다.

"우와, 그럼 이 강은 진짜로 소원을 들어주는 강이네요! 누나는 정말 예쁘잖아요!

고질라 에볼루션 갖게 해주세요 제발제발!!"


그 순간 그 평범한 강이 굉장히 신비로워보였달까. 아이의 철썩같은 믿음을 바탕으로 우리는 정말로 소원을 이뤄주는 신비로운 강에다 새삼 각자의 소원을 진지하게 빌며 경건한 시간을 보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친정식구들은 크게 감동하고, 특히 조카에게 들려주며 자신감을 마구마구 심어주게 된 계기가 될 수 있었다.


한번은 어느 여름날, 아이 친구들과 함께 수영장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엄마들 중 나이가 있는 편이기도 하고 물을 워낙 무서워하는지라, 수영장 끝자락에서 발만 담그고 아이들 노는걸 구경하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어리고 운동선수 출신이라 힘도 센 엄마 한명이 나를 물에 빠트리기로 주변 엄마들과 작당을 하고 나에게 다가왔다.

마치 죠스가 다가오는걸 보는것 마냥 난 공포에 질렸고, 피할 수 없는 그들의 체력에 발버둥을 쳐봤자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물 속에 담겼고 허둥지둥 빠져나오자 어느새 다가온 큰애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엄마 괜찮아?"

"응 괜찮아~"

"엄마 물에 빠질때는 코를 꽉 잡아. 그래야 물을 안먹어!"


내가 비명을 지르며 물에 빠지자 걱정이 되서 냉큼 다가온 큰애는 잠수할때의 노하우를 나에게 알려줬다. 내가 물에 빠지는걸 둘째는 쳐다보지도 않았고, 남편은 오히려 저 멀리서 놀려대며 구경하고 있는데, 우리 큰애만 날 걱정해주는게 아닌가.


뒤이어 나도 반격을 가해보았지만 다시 그 체력 좋은 엄마에게 처참히 무너지며 두번째 잠수를 당했는데, 다시 비명을 지르다 물속에서 올라온 나에게 다가온 첫째.


"엄마엄마! 괜찮아??"

"응~ 괜찮아. 다들 장난치는거야~"

"장난이 너무 심한거 아니야??"


큰애는 정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노려보았다. 이렇게 엄마를 지켜주려 하다니, 엄마가 무서워하는걸 느끼고 엄마가 다칠까봐 걱정하는 우리 큰애. 혹시라도 애가 불안이나 공포를 느낄까봐 물장난을 그만두고 물 밖에서 놀았다.


언젠가 아이 친구와 함께 놀이공원에 간 적이 있었다. 친구와 그 엄마, 그리고 나와 큰애 넷이서 후룸라이드 대기줄을 기다리고 있는데, 평소 겁이 많고 예측되지 않은 상황을 매우 싫어하는 아이는 놀이기구가 어떤 형태의 놀이기구인지를 재차 확인하고 있었다.


"엄마, 이 놀이기구는 어떻게 타는거야?"

"응, 배에 네명이서 한줄로 앉으면 배가 움직이면서 높은곳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그런 놀이기구야."

"얼마나 높은데서 떨어지는데?"

"저기 봐봐. 지금 떨어진다!"


아이는 꽤 높은데서 떨어지는 배를 보고 놀랐다. 저걸 탈 수 있을지, 어디에 타야 가장 안무서울지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엄마! 어느 자리가 가장 무서워?"

"글쎄. 맨 앞자리가 떨어질때 밑이 내려다보이니까 제일 무섭겠지? 그리고 배가 떨어지면 물이 많이 튀어서 맨 앞자리에 앉으면 많이 젖을 수 있어"

"그럼 맨 뒤가 가장 안무서울까?"

"그런데, 엄마 경험상 맨 뒤에 타면 떨어질때 좀 더 확 떨어지는 느낌이라 더 무서웠어."

"그럼 어디에 타야 안무서울까? 세번째 자리?"

"엄마 생각에는 너가 무서우니까 앞에 앉은 엄마의 등에 안길 수 있게 엄마 뒤에 타는게 좋을 것 같아."


여기까지 따져보자 애가 탈만한 자리는 두번째 자리밖에 남지 않았다. 나도 맨 앞에 타는게 무섭지만 두좌석씩 칸막이가 되어있는 배의 구조상 내가 맨 앞, 내 등 뒤에 큰애가 타야 제일 덜 무서울테니까. 내가 세번째 자리에 타버리면 애는 제일 느낌이 무서운 네번째 자리에 앉아야하고, 애가 세번째 자리에 앉으면 안고 갈 엄마 등도 없이 손잡이만 잡아야 하니까.


아이는 신중히 생각해보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엄마. 그럼 내가 네번째에 탈래!"

"왜? 그 자리가 가장 무섭다니까? 그냥 엄마가 첫번째, 너가 두번째에 타서 엄마 등 꼭 껴안아."

"아냐. 그럼 엄마한테 물이 다 튀잖아. 우리 엄마는 예뻐서 물에 젖으면 안돼. 맨 앞은 이모(친구 엄마) 앉으라고 그래."


졸지에 그 이모는 물이 튀어도 되는 못생긴 사람이 되어버렸다. 황당해진 표정으로 그 엄마는 자신의 아이를 바라보며 넌 엄마가 물에 튀어도 괜찮겠느냐 물었는데, 아이는 아무 생각 없는 표정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떨어지는 놀이기구를 쳐다보며 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엄마를 끔찍하게 여기는 아들 둬서 좋겠다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 친구 엄마를 보며, 민망하기는 했지만 아이의 넘치는 사랑에 행복한 느낌이 든 건 사실이었다.


이렇게 다정하고 감성이 풍부하고 애정표현을 듬뿍 하는 우리 첫째.

너무너무 예쁘고, 딸이 없어도 덜 서럽긴 하지만,

난 알고있다. 이 애정과 사랑은 앞으로 나타날 아이의 여자친구들에게 고스란히 향할거란걸.

무뚝뚝한 남편을 만나 연애도 결혼도 그럭저럭이었던 나로서는

달콤하고 감성이 뚝뚝 묻어나는 남편을 만나 평생을 다정한 말을 들으며 온실 속 화초처럼 보살펴질 미래의 며느리가 부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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