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포자 엄마는 할말이 없다

아이는 제발 수포자가 되지 않기를

by wisdom

살면서 딱 두가지가 아쉬운게 있다.

바로 볼륨감 없는 몸매와, 수포자로 살아온 것.

물론 그렇다고 다른게 다 만족스럽고 풍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것들에는 큰 욕심이나 관심, 후회를 하는 성격이 아닌데 딱 저 두가지는 씁쓸함을 떨쳐내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몸매야 타고난것이니 내가 어쩔 수 없다 치고(그냥 씁쓸할 뿐...),

수학을 일찌감치 포기해버리고 수포자로 산 것은 꽤나 후회된다.

여러 수학 명강사가 이야기하듯, 학창시절의 수학은 일반적인 학생으로서 누구나 숙지하고 익힐 수 있는 수준의 수학임에도 불구하고 지레 포기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는데, 내가 딱 그랬다.

왠지 나는 숫자와 맞지 않는 것 같고, 집합 이후로 머리가 새하얘졌달까.

생각해보면 공식을 잘 외우고 반복해서 문제를 접하고 하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었을텐데,

다른 과목들과 달리 수학은 '수포자' 라는 계층이 굳건히 존재하고, 나도 그냥 거기에 편승해버려서 골치아픈 수학을 외면하고 싶었다.


그러나 수학을 포기한 댓가는 아주 컸다.

일단 이과 진학을 할 수 없었고, 수학 과목에 구멍이 뚫린 문과생은 좋은 대학교, 좋은 과를 지원할 수 없었다.

학군이 좋지 않은 동네이긴 했어도 전교1등을 거의 놓쳐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수시전형으로 지원해서 수능 수학만 피할 수 있다면 그래도 웬만한 대학교는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지나고나서 하는 후회지만, 이과의 몇몇 매력적인 학과를 수학을 포기하는 바람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게, 40살이 넘어버린 지금도 후회가 된다.

어린 마음에 너무 쉽게 포기해버린 그 과목이, 물론 다시 시간을 되돌린대도 내가 수학을 잘 할거라는 보장은 없지만(회귀한다해도 또 포기할 것만 같지만), 열심히 해보지도 않고 책을 덮어버린 과거의 내가 후회스럽다.


큰애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 한글이야 미리 떼고 가는 추세니 열심히 가르쳤고, 영어는 워낙 편차가 큰 선택의 몫이고, 수학은 사실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학교 들어가면 어련히 알아서 배우겠지 싶어서.

그런데 입학하고 바로 덧셈 뺄셈을 시작하는데 아이가 잘 따라갈 수 있을까 덜컥 걱정이 되었다.

요즘은 '모으기 가르기' 라는 개념으로 가르친다는데, 이런 용어부터 낯설어서 아이가 뒤쳐지고, 나처럼 포기하게 되버리면? 여기저기 물어보니 동네 공부방이나 학습지 센터에서 이런 저런 과목을 가르치는데 저학년에게는 딱 좋을거라고 했다. 그래서 입학 후 3월 첫주가 지나자마자 동네 학습지 센터에 방문했다.


"어머니. 아이 수준을 테스트해보니 열손가락 넘어가는 더하기는 조금 어려워 하네요."

"네. 그래서 연산 과목을 가르치러 왔어요."

"네, 그런데 아이가 학교에서 수학 교과서를 접할때 처음 보는 문제 형태들이라 당황할 수 있어요. 그래서 그런걸 대비해서 수학 교과 과정 그대로 먼저 학습하는 교과 과목을 추가하셔야 할 것 같아요."

"네? 그건 학교에서 그냥 교과서대로 배우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렇지 않아요 어머님. 수학 교과서 문제를 계속 틀리고 어렵게 느낀다면 수학에 점점 자신이 없어질거에요. 학교 적응하는것도 힘든 시기인데, 수업이 부담되지 않게 이런걸 먼저 학습하고 가는게 좋아요."

"그렇군요. 그럼 그것도 추가해주시고..."

"그리고 어머님, 수학의 기본은 사고력인거 아시죠?"

"네... 그런데 그런건 대치동 같은데서 유치원생부터 준비했어야 하는 것들이고, 이젠 늦었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어머님. 사고력은 지금부터라도 꾸준히 키워야해요. 수학은 규칙성이 기본인데, 사고력 수학이 뒷받침되어야 나중에 수열 같은걸 잘 할 수 있어요."


아 수열! 내가 제일 못했던게 수열이지 않은가. 도저히 규칙을 못찾아서 시험지를 옆으로 덧대가며 손으로 일일이 써보았으나 당연히 답을 찾지도 못하고 시간만 버렸던, 악몽같은 수열.

결국 연산, 교과, 사고력 이렇게 수학만 세 과목을 결제하고 왔다. 학습지 가격 정도쯤이야 했는데, 이렇게 과목을 추가하고 나니 금액도 꽤 됐다.


그래도 애가 잘 배워서 수학을 어려워하거나 힘들어하지 않기만 해도 금상첨화다. 사고력과 교과 과목은 진도 수준을 봐도 잘 모르겠고, 연산은 한자릿수에 더하기 1부터 하는 문제가 빽빽하게 들어있는 문제집을 풀고 집에 숙제로도 가져왔다. 열심히 푸는 아이를 보며 뿌듯했다.


센터에 보낸 지 한달쯤 되었을까, 무심코 숙제 문제집을 펴봤는데, 여전히 더하기 1을 하고있었다!

더하기 1이 뭐라고 한달동안 하는거지? 하고 의구심이 들었는데, 주변사람들 말이 워낙 연산은 그렇게 무한반복을 하는거라고, 그래서 나중에 옆에서 툭 치면 자동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반복하는거라고 했다. 그럼 더하기 1을 한달 하고나면 더하기 2를 한달, 더하기 3을 한달.... 더하기 9까지 그럼 9달이 걸리는거냐 했더니 다 그렇다 했다.


연산이라는 것의 진도가 그런식이라면 어쩔 수 없지. 꾸역꾸역 계속 다녔다.

시간이 훌쩍 흘러 어느새 더하기 9가 찍혀 나온 학습지를 보며, 드디어 더하기가 끝났구나! 이제 몇달 있으면 겨울방학이 시작되는데, 2학년 되기 전에는 구구단을 시작할 수 있겠지 싶었다.


그 즈음 담임선생님께 면담을 신청했다. 아이의 학교는 정기 상담이 없고 원할 때 수시로 상담 신청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인데, 특별한 문제가 없다보니 상담의 필요성을 못느꼈으나, 1학년이 다 가기전에 아이의 1학년 생활이 어땠는지 정도는 직접 듣고 싶어 학교로 향했다.


"OO이 너무 잘하고있어요. 수업에 집중력도 높고 질문도 잘하고 친구들과도 아주 잘 지내요."

"네 다행이네요. 제가 선행학습 같은걸 시키지 않고 입학을 시켰는데, 어려워 하는 것은 없었나요?"

"음, 계산이 조금 느려요."

"네...?? 연산 공부를 꾸준히 해 왔는데, 느린 편이군요..."

"네, 2학년 올라가기 전에 겨울방학때 조금 잡아주시면 될 것 같아요."


말이라도 괜찮아요, 하다보면 좋아져요 라고 해주실 줄 알았다. 그런데 방학때 연습을 시키라고 하시다니. 정말 다른 친구들에 비해 뒤떨어지는구나 싶었다.

전교1등을 거의 놓쳐본 적 없었던 나로서는 학습부진이라는 말이 너무 어색하고 당혹스럽게 다가왔다. 벙 찐 채로 돌아와 학습지 문제집을 다시 펼쳤는데, 더하기 9까지 갔던 것이 언제 거기까지 갔냐는 듯 +1,+3,+5 가 섞인 문제들이 들어차 있는 것이 아닌가. 또 한참을 그렇게, 그리고 +6,+8,+9를 신나게 섞어가며 한동안의 시간이 흘렀다.


계산이 느리다는 이야기까지 들은 마당에, 거의 1년을 뭐한건가 싶은 마음이 들어서 센터에 다시 문의했다.


"선생님. 아이가 계산이 느린편이라고 하네요. 연산 공부를 계속 해왔는데 실력이 어느정도인가요?"

"네, 저희가 시간을 재고 푸는 학습지가 있는데, OO이가 빠른 편은 아니에요. 그래도 이렇게 하다보면 점차 좋아질거에요."

"네... 그런데 이제 겨울방학부터는 구구단도 해야할텐데 아직도 이렇게 덧셈만 해서 구구단은 언제하죠?"

"그건 같이 병행해야죠. 겨울방학 시작되면 구구단도 들어갈게요."


그렇게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여전히 덧셈이 가득한 문제집을 보며 이래서 언제 구구단을 하냐, 하고 지나가듯 한 말을 아이가 기억하고 센터 선생님한테 물어본 듯 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와서는 문제집 맨 앞 진도표를 가리키며 엄마! 지금 이 단계래. 이거 끝나면 뺄셈 시작한대! 라고 말했다.


뺄셈이라고...? 그러고보니 왜 덧셈 다음은 곱셈이라고 혼자 생각한건지! 엄연히 뺄셈이 존재하는데!!

덧셈도 일년동안 했는데 뺄셈도 일년을 하면 도대체 곱셈 나눗셈은 언제 시작한단말인가!!!

낙담한 채로 여기저기 또 물어보니, 학습지 센터가 원래 진도가 그렇게 느릿느릿하단다. 물론 학습이라는 것이 차곡차곡 쌓여야하니 커리큘럼이 그런건 맞지만, 따로 언급하지 않으면 그냥 세월아 네월아 진도대로 하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따로 말을 해야한다는 거였다.(개인적인 의견들이다)


그래, 내가 진도를 좀 더 빨리 빼달라고 진작에 말을 했어야 했는데! 연산이 아무리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이렇게 1년내내 덧셈만 할 정도로 오래걸릴 일은 아니지 않은가! 말하지 않으면 또 앞으로 1년동안 뺄셈을 세월아 네월아 하겠지. 내일 센터에 가서 말해야겠어! 라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엄마~ 이거 도대체 모르겠어~ 이것좀 알려줘~"

징징대고 있는 아이의 문제집을 들여다봤다.

덧셈은 어느덧 진화하여 앞뒤 숫자를 바꾼 것을 쌍으로 묶어서 개념을 설명하고 있었다.

아이는 5+8 에 13이라는 답을 써두고,

8+5 에 답을 쓰지 못한 채 나를 애타게 쳐다보고 있었다.

5+8 을 풀어놓고 바로 밑에 써져있는 8+5를 못풀다니!

과연 센터에 진도를 빨리 빼달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인건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센터에 방문했다. 앞으로 뺄셈도 1년동안 하는거냐 물었더니 그렇게 오래걸리지는 않는다고 한다. 연산은 한자릿수 연산을 잘 쌓아놓아야 두자릿수, 세자리수 연산을 잘하게 되는거라고, 지금까지 힘들었지만 잘 해온거라고 하셨다.

그래, 한자릿수 덧셈이 여전히 능숙하지 않은데 진도 빨리 나가는게 무슨 소용이라고. 무엇보다도 아이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다음단계로 넘어가는건 나도 원치 않는다. 그런게 쌓이고 쌓여서 수학을 포기하게 되는거니까.


대신, 나처럼 지레 포기하지 말고 이렇게 차곡차곡 수학을 잘 해나갔으면 한다. 요즘 워낙 다들 속도가 빨라서 제자리에 있어도 뒤쳐지는 느낌이지만, 공부는 나만의 속도가 있다. 지루하고 막막하더라도 기본부터 차근차근 쌓아올려야 그 다음이 있는 법이다. 왜 아직도 더하기를 못하고 있는거냐고 절대 다그치지 않고, 무조건 아이의 속도를 응원할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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