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지향적인 아들

분명하고 확실한 동기부여

by wisdom

아이 어릴적에는 멋모르고 레고를 자주 사줬다.

왠지 창의성 발달에 도움이 될 것 같으니 다른 장난감보다는 좋을 것 같아서 사달라는대로 사줬는데

이게 만만치 않은 플라스틱 쓰레기라는걸 깨닫고는 레고는 최대한 자제중이었다.


그러나 학년이 올라가도 아이의 레고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레고는 각종 단계를 업그레이드하며 놀 수 있어서 전 연령대의 사랑을 받는 장난감이었다.

아이는 레고테크닉 이라고 좀 더 고난이도의 조립을 요하는 시리즈에 빠졌다.


"엄마, 레고 사주면 안돼요?"

"응. 안돼. 지금 있는 부품들만으로도 넘쳐나."

"레고 테크닉 부가티 시리즈가 새로나왔어요. 너무 갖고싶어요."

"집에 레고 짐을 더 늘릴수는 없어."


그러나 아이는 너무 갖고싶어했다. 어차피 생일이나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안사줄 수는 없으니

쓰잘데기없는 장난감보다는 그래도 레고가 나을 터였다.


"그럼, 아주 특별한 날, 선물을 받는 날에만 사줄게."

"그게 언젠데?"

"음, 생일이랑 크리스마스 어때?"


아이는 고민에 빠졌다. 크리스마스를 막 지난 시점인데다 생일은 아직 몇달 더 기다려야하는데 레고는 당장 갖고싶은 상황이었다.

마침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있는 참이었으므로 아이는 머리를 굴리는 듯 했다.


"엄마, 학년이 올라가는것도 특별한 일이잖아요?"

"음, 그렇긴 하네."

"그럼 나 이제 3학년 올라가니까 그 기념으로 레고 사주세요!"


그러나 나에게도 묘안이 있었다. 겨울방학동안 3학년 1학기 수학책 한권을 떼고 싶은데 실컷 누려야 하는 방학기간에 하루에 몇페이지씩 풀라고 하면 반발이 심할게 뻔했기 때문이다.


"좋아. 대신에 학년이 올라가는건 미션이 있어. 학년도 올라가는데 능력치를 키워야지."

"그게 뭔데요?"

"3학년 1학기 문제집을 방학동안 한 권 다 풀면 레고를 사줄게."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이잖아요...."

"아니야. 하루에 3장씩 엄마가 정한 요일마다 풀기만 하면돼."


아이는 미심쩍어했으나 레고를 갖고싶은 마음에 덜컥 오케이를 외쳤다.


그러나 나도 사실 한 권을 다 풀릴 자신이 없었다. 문제집 배송받고 하는데 이미 며칠을 썼고, 방학이라 이미 조금씩 늘어졌으며 중간에 설 연휴도 껴있는데, 총 6단원에 15장씩 있는 문제집 한 권을 다 풀려면 매주 5일동안 3장씩 풀어서 총 6주만에 끝내야했다. 방학은 이제 막 빠듯하게 6주가 남은 상황이었고, 영어학원 숙제만으로도 버거운 저녁시간에 수학까지 얹는다는 게 쉬운일인가. 방학이니 낮시간을 활용해보려 해도 방과후 수업 오가고 어영부영하다보면 문제집 펼쳐보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어찌저찌 꾸역꾸역 1주에 1단원씩 해치웠다.

처음 며칠은 가르치는데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종종 폭발했지만, 점차 시간이 갈 수록 아이의 문해력의 한계를 이해하게 되자 그리 화도 나지 않았다.

문해력이 있어야 수학 서술형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얘기는 많이 들어왔으나, 그 문해력이 '장황한 문장을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단 한줄로 되어있는 질문도 해석하는데에는 국어능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라는걸 깨닫게 되었달까. 초등학생에게는 다음 중 '네모'에 들어갈 숫자를 쓰시오. 라는 문장을 읽는데에도 문해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자, 도무지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애에게 화가 덜 나게되었다.(아니면 내가 득도를 한걸지도.)


그렇게 나조차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진도는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가르치는걸 며칠만에 포기할 줄 알았던 내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아이도 그리 크게 징징대지 않고 풀으라면 또 풀었다는 것. 틈만 나면 온라인쇼핑몰에 들어가 레고테크닉 시리즈들을 골라보며 뭘 살지 상상하는 아이를 보며, 레고가 그렇게 좋을까 싶었다.


그렇게 한 단원만 남긴, 그리고 방학도 딱 1주일이 남은 어느 주말 저녁, 아이의 신발이 작아진게 눈에 띄어서 저녁도 다 먹고 늦은 시간에 갑자기 아울렛에 가게되었다.

신발 가게에서 신발을 사고 나오려는데 윗층에 레고스토어가 있다는 걸 아는 아이는, 레고스토어에 한번만 들려보자고 했다. 아직 문제집을 다 풀지 않았으니 레고를 살 수 없다고 했지만, 안다고, 구경만 하겠다며 레고스토어에 들어갔다.


혹시라도 당장 레고를 사달라고 조를까봐 걱정이 되었지만, 아이는 정말로 레고테크닉 코너에서 이것 저것 살펴보고 박스를 매만져보며 신중하게 최종적으로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을 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결정을 내렸는지 박스 하나를 가리키며 다 풀면 이걸 사달라고 했다. 가격은 89,000원. 내 예상에서 크게 벗어난 가격대였지만, 신상품이라 할인도 없다길래 진짜 최신제품인가보다, 이렇게 노력했고 해냈는데 원하는 보상은 해줘야지 싶어서 흔쾌히 알겠다고 하고 가게를 나왔다.


그런데 견물생심이라고, 실제 레고를 골라두고 나오자 아이는 당장 갖고싶어했다. 문제집을 다 풀어야 살 수 있는거니까, 오늘밤에 남은 분량을 다 풀어버릴테니 내일 아침에 다시 와서 사자는거였다.

집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9시경. 아무리 빨리 푼다 해도 10시에 자야하는 초등학생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할 수 있다고 연필을 부여잡고 있는 아이지만, 이미 시간이 늦은데다 졸음이 몰려오니 아이는 징징대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11시까지 허용했지만, 다 끝내기는 커녕 이미 책상에 엎드린 채로 졸린 눈을 고물고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일단 자야해."

"......... 그럼 내일 일어나자마자 풀게요. 내일 다 풀면 내일 바로 사러가는거에요."

"알았어. 얼른 자자."


아이는 투덜대며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른 시간에 눈을 번쩍 뜬 아이는 정말로 침대에서 저벅저벅 걸어나가 책상에 앉아서 문제집을 폈다. 주말이라 쉬고 싶었던 나는 느즈막히 아침을 챙겨주고 다시 낮잠을 한숨 자고 있었는데, 잠결에 외침 소리가 들렸다.


"끝!!! 다 했다!! 다 했어요 엄마! 레고사러 가요!!"


오후 1시쯤, 아이는 드디어 문제집 한 권을 끝냈다. 나가서 채첨을 해봤더니 허투루 푼 것도 없었다.

약속한 미션을 해냈으니 원하는 보상을 약속대로 제공해야한다. 그래야 다음 겨울방학 때도 열심히 할테니.


온 가족이 기분좋게 외출하여 그토록 원하던 레고 테크틱 부가티를 사왔다.

아이는 정말 기쁜 얼굴로 레고를 조립했다. 그냥 졸라서 산 레고가 아닌, 자신의 노력으로 쟁취한 레고였다.


공부를 모든 보상으로 메꿀 순 없지만,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고, 성취하고, 결과물을 얻는건 값진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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