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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티서 Jun 03. 2020

시헤남 언어 관찰 일지

6월의 창작 주제 <언어>

 왜 반에 꼭 그런 남자애들 한 명 씩은 있지 않았나. 남자애들이랑 놀지 않고 여자애들이랑 놀아서, ‘여자애들이랑 논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큰 캐릭터인 것처럼 통하는 아이들. 나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경험해 봐서 아는데, 이런 부류의 아이들도 각자의 이유나 성격은 다 다르다. 그러니까 무턱대고 이들에게 ‘너 여자냐?’ 혹은, ‘여자가 되고 싶냐?’ 놀리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물론 내 경우는 그들의 짐작이 얼추 들어맞았지만, 그건 순전한 우연의 덕이다. 절대 네가 관찰력이 뛰어났던 게 아니라고, 알겠냐 김모형진?     


 이야기가 샜는데 아무튼 내 일생을 통틀어 남성 동성 집단에 껴서 생활한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크게 군대 시절과, 지금 직장에서의 생활만이 좀 예외적이었다. (고등학교 때도 잠깐 남자 셋이 어울려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땐 그 중 한 명의 열렬한 우정을 내가 사랑으로 착각했었다. 흑역사니 괄호 안에서나 이야기하도록 하자.) 그런데 동시에 나는 성별이분법상 남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의 남성 연대에 아주 쉽게 진입할 수도 있다. 나보다 레슬링이나 축구에 훨씬 빠삭하며 더 털털한 여성분이 진입할 수 있는 수준보다 훨씬 더 깊게 말이다.    


 세상에 그들을 관찰하기 나보다 더 좋은 위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예컨대 남극의 눈물 속 로봇 펭귄처럼 그들의 무리에 손쉽게 침투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관찰자적인 시선도 잃지 않은 존재다. 아니, 그렇게까지 종이 다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로봇펭귄의 흉내를 내볼 수는 있다. 그리고 내 카메라에 가장 먼저 담긴 이들의 습성 중 하나는 바로 이들의 언어습관이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내가 국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이들의 당연한 언어생활이 외집단의 시선으로 보기엔 눈에 띄기 때문이기도 하다.           




 1) 비난을 위한 비난, 권력 관계의 재확인     


 내가 느낀 가장 큰 차이점은 이질적인 단어를 사용한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바로 대화의 양상 자체가 다르다는 부분이었다. 이미 남초 커뮤니티엔 반박 댓글이 대부분이라고 분석해 놓은 인터넷 게시글이 있던데, 그게 (내가 느끼기엔) 실제로도 그랬다. 비난을 위한 비난. 게다가 인터넷 게시판은 서로 익명이 보장되기 때문에 각자의 논거를 파헤치며 갑론을박이 펼쳐지기라도 하지, 실제의 대화는 그렇게까지 팽팽하지도 않다.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논하면,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반박하고, 반박하고, 또 반박한다. 실제 대화 속에는 보다 뚜렷한 권력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이 현상을 군대보다는 직장에서 많이 느꼈다. 아마 군대에서의 권력 차이는 내가 그래도 어느 정도 납득하고 있었던 것 같다. 헌데 직장에서는 도대체 왜? 게다가 우리 직장은 좀 특수하게도 사무실을 사용하는 거의 대부분이 동기이고, 그나마 서로의 권력을 가르는 것은 꼴랑 한두 살 차이 나는 나이 뿐이다. 굳이 거기에 더하자면 누가 더 글을 빨리빨리 쓰는 지로 측정되는 애매한 필력의 우열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매한 ‘갑’의 비난은 항상 가혹하다못해 이젠 피곤할 지경이다. 혹시 여기 길라임처럼 약술을 마시고 남자와 몸이 바뀔 수 있는 여성분들이 계시다면 나는 누가 물어도 먹고 싶은 메뉴를 절대 순순히 말하지 않기를 추천한다. 그 메뉴는 비난의 비난 끝에 절대 먹어볼 일이 없음은 물론이고, 영양학과 식도락 문화까지 언급하며 당신의 음식 취향이 탈탈 털릴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이미 우리의 점심 메뉴는 갑의 머릿속에 정해져 있으며, 그는 먹고 싶어서가 이기고 싶어서라도 결국엔 그 메뉴를 선택할 것이다.     


 그래, 이기고 싶어서라도......     


 순간 이 초보 시헤남 언어 연구가의 뇌리에 어떤 힌트가 섬광처럼 스친다. 그래, 그거라면 다 말이 들어맞는다.....그러니까 이들은 이미 ‘이겼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계속 ‘이기고 싶어서’ 이런 양상의 대화를 지속한다. 그러면 모든 게 다 설명된다. 이미 자신의 뜻이 관철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죽은 벌레의 시체를 재차 짓이기듯 반박의 반박을 더하는 현상도. 애매하게 권력 관계가 모호한 우리 회사 같은 공간에서 더 대화의 승패에 집착하는 것도. 그러니까 이들에게 대화는 권력의 반영(영어로는 reflection, 크리스티나 아겔레라)이라기보다는 대화 자체가 권력‘하기’(power-ing)의 일종이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비난 일색의 대화는 일종의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수단이다. 이를 통해 공동체의 상하관계는 더욱 공고해지며, 공동체는 체제 자체가 전복되는 획기적인 변화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이런 순기능 때문인지 이들은 ‘비난 위주의 대화’를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한다. 소위 ‘칭찬 일색’의 ‘가식적인’ 여자들의 대화 방식에 비해 훨씬 솔직하고 뒤탈이 없다는 것이다. 내 눈엔 이런 비난 일색의 대화가 곧 내리갈굼이 된다는 심각한 뒤탈이 버젓이 존재하는 것 같긴 하지만 뭐...... 아, 추가적으로 덧붙이자면 대화의 관계 내에서 ‘을’의 위치에 있는 시헤남을 섣불리 도와주지 말자. 그는 당신의 인간적인 처우에 고마워하기 보다는, 당신을 새로이 ‘을’의 위치에 놓는 방식으로 감정적 보상을 얻으려 할 테니 말이다.      



 2) 유행하는 어휘, 말투로 이어지는 동족의식     


 30초간 눈을 감고 생각해 보자. 어떤 독특한 말투를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여성 동성 집단을 목격한 일이 있는가? 혹은, 전국적으로 특정한 말투를 유행시키는 여성 BJ나 유튜버를 떠올릴 수 있는가? 반면, 남성의 경우는 어떠한가? 형님이 아니라 행님이라고 발음하는 방식, 서로를 횐님덜이라는 특정 어휘로 칭하던 모 불법 사이트, ‘보이루’라는 어원 불명의 인사말들까지. (사실 이 어휘들 자체보다도 그 어휘를 발음할 때 나오는 특정한 말투나 표정들이 더 내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물론 ‘보이루’에 대항해 ‘자이루’라는 인사말을 사용하는 일군의 여성들이 존재하긴 했지만, 이는 일종의 미러링 전략이었다. 즉, 일종의 운동을 위해 의식적으로 사용했다는 뜻이다. 반면, 남성들의 경우 서로 비슷한 어휘와 말투를 사용하는 일이 보다 자연스럽다. 친해지다 보면 서로 말투가 시나브로 닮아간다는 수준의 것이 아니라 좀 더 획기적인 통일이 이뤄지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남성 집단에선 같은 욕이라도 꼭 ‘쓰으벌’이라고 발음하고, 어떤 남성 집단에선 ‘쉬팍’이라고 발음할 정도로 각 집단만의 동질화가 이루어지곤 한다. 나는 아마도 그 발음의 최초 사용자는 아까도 분석했듯 집단 내의 ‘갑’이 아닐까 짐작한다.      


 또 어디까지나 내 짐작일 뿐이지만, 나는 어쩌면 이런 말투들이 이들 사이에 일종의 동류의식을 형성해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권력 차이든 뭐든 자꾸 차이만 강조하면 어떻게 한 집단이 유지되겠는가. 게다가 아무리 한국의 강한 남성이라고는 해도 24시간 내리 비난만 듣다 보면 가슴에 상처가 생기기도 한다. 그럴 때 적당한 음률이 섞인 유행어들로 서로의 지친 심신을 달래준다면? 예컨대 형은 가끔 나를 너무 아프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과 나는 척하면 탁이 되는 사이다. 우리는 모두 남자다, 그래서 결속할 수 있다.      





 나는 여성우월주의자가 아니다. (혹시 안 믿기는 분이 있다면) 나 역시 당신만큼 평등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평등을 이루는 방식에 대해 서로의 의견이 다를 뿐이라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익살을 위해서 관찰 대상에 대해 좀 단선적으로 서술한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내가 생활하는 내내 이런 생각을 가지고 누군가를 대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회사의 남자 동료들도 나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좋아하고 존중한다. 위의 김모형진도 가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무슨 소수부족을 관찰하듯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들의 집단을 관찰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괜찮지 않은가? 한국에서 시헤남은 소수가 아닌 다수로, 대부분의 권력도 그들에게 돌아간다. 이런 집단에 대한 전략적인 타자화에는 유익한 측면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예컨대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던 주류의 문화를 낯설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만약 시헤남 독자가 이 글을 보고 비난의 말투나, 유행 말투의 성대모사가 ‘우리들’만의 특수한 문화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어떨까? 적어도 이성적 호감이 있는 여성 앞에선 그런 특징적인 말하기 방식을 피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아마 많은 여성들이 그런 변화에 더 호감을 느낄 것이라 예상한다. 

    

 기승전생물학 식의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대화를 하는 와중에 서로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도 결국은 자손 번식을 위해서다.... 무리에서 가장 강한 수컷만이 짝짓기에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행 말투를 통해 서로의 음성을 확인해보는 일은 서로의 건강을 확인하기 위한 장치의 일부다. 예컨대 역사 이전의 시대부터 수렵을 담당해오던 남성의 경우 먼 거리의 초원에서도 서로의 안전신호를 확인할 수 있는 음률의 사용이 중요했는데.... 결국 수렵 실력이 뛰어난 남성에게 짝짓기의 기회도 더 많이 돌아간다.      


 중학교 1학년 학급문집을 만들 때 나는 결혼을 가장 빨리 할 것 같은 사람 앙케이트에서 압도적인 몰표를 받았다. 친절하게 이유도 적어준 한 친구는 ‘여자랑 친해서 여자를 잘 알 것 같다.’는 의견을 남겼다. 여자가 뭐 정보를 알면 그만큼 공략이 쉬워지는 무슨 퀘스트 대상도 아니고 말이지. 아무튼 이 사례는 모든 행동의 목표가 실은 짝짓기라고만 단정하는 시선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세상에 내가 결혼이라니. 그리고 크리피하다, 난 내 친구들과 자고 싶어서 친해진 게 아니란 말이다.    

  

 나는 내 친구들과 말이 통해서 친구가 됐다. 이 부분은 나도 좀 늦게 깨달은 부분인데, 딱히 내가 여자라고 더 친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친해진 이유가 그거라면 친구들에게도 이 무슨 실례인가.) 굳이 태티서의 친구 가능 기준을 살펴보자면 나는 ‘여자라서/남자라서 이렇고 저렇다.’는 생각이 좀 희미한 사람과 주로 친해진다. 내 경험 상으론 그런 사람들 중 생물학적 여성이 조금 더 많았을 뿐이다. ‘남자 언어’를 구분해내는 범박한 글의 말미에 이런 말을 덧붙이는 게 좀 어색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처음부터 말하고 싶었던 것도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언어가 닿는 지점에서 서로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지점은 어쩌면 특정성별이라는 틀 밖에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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