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짧은 희곡 -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대한
1. 등장인물
지은 29 여. 직장인
현남 29 남. 직장인
2. 장소
현남의 회사 근처 카페
3. 때
점심시간
4. 이야기
점심시간의 카페. 지은이 앉아 있다. 차가 한 잔 놓여 있다.
카페음악이 거슬리지 않게 흐른다.
현남이 들어온다.
현남 자기야! 여기까지 무슨일이야.
지은 왔어?
현남은 지은 옆에 앉는다.
다정하게 지은의 손을 잡는다.
현남 안 그래도 오늘 퇴근하고 우리집으로 올 거 아니었어? 벌써 내가 보고 싶었나? 자기 오늘도 예쁘네?
지은 시간 괜찮아? 잠깐 커피 마실 시간 되는 거야?
현남 그럼. 괜찮지. 자기랑 커피 마실 시간도 없으면 그게 사는거냐.
지은 요즘 바쁘다 그래서 걱정했지.
현남 괜찮아. 어, 근데 무슨 차야?
지은 오늘은 커피 마시기 싫어서.
현남 그래, 그럼 나 커피 금방 시키고 올게.
현남이 자리를 비운다.
지은은 무언가 불편한듯 자세를 몇번 고쳐 앉는다.
카페 음악이 계속 흐른다.
현남이 아이스커피를 들고 돌아온다.
음악이 멈춘다.
현남과 지은이 마주본다. 그 상태로 정지.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잠시 후 음악이 다시 흘러 나온다.
현남 그러니까. 약을 안 먹었다는거네.
지은 응. 며칠 깜빡했었는데 그때 였던 것 같아.
현남 그래...
지은 그래도 날짜로 보면 확실한 날은 아니야. 애매한 날이랄까.
현남 그래도 가능성은 있는 거잖아.
지은 그렇지.
현남 사후피임약 먹으면 되는 거 아니야?
지은 사후 피임약은 며칠안에 먹었어야 하는 건데 우리 그럴 시간도 없었고. 이미 날짜는 지났어. 그리고 그게 그냥 약국에서 파는게 아니야 자기야.
현남 그래서?
지은 그래서?
현남 생리를 안 한다는거네.
지은 응. 나 날짜 정확한데 안 나오네. 5일 지났는데. 안 해.
현남 그래... 그럼 우리 여행갔던게 지난달이니까. 4주 정도 지난건가?
지은 아마 그럴걸. 정확히는 이번주가 5주차야.
현남 5주면 다행히 가능성이 있다는거네?
지은 응. 그렇다니까 임신했을 수도 있어.
현남 아니 그 가능성이 아니라.
지은 그럼 무슨?
현남 ... 아니다. 그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복잡하네.
지은은 앞에 놓인 차를 한 잔 마신다. 자세를 고쳐 앉는다.
현남은 말이 없다.
지은 자기야. 복잡할 거 없어. 우리 둘 다 어른이야. 부모님들도 말씀드리면 이해하고 축하해주실거야.
현남 무슨 소리야. 그게?
지은 우리가 아직 20대이긴 하지만 나도 일하고 자기도 일하잖아. 집은 작게 시작하면 되고. 하늘에서 준 결혼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뭐.
현남 뭐?
지은 결혼식은 거창하게 할 필요 없고 양가 부모님에 진짜 친한 친구들만 불러서 하고. 신혼 여행은 지난 여행이 신혼여행이었다고 생각하지 뭐. 자기 요즘 바쁜 때니까.
현남 지금, 결혼 하자는 얘기야?
지은 어?
현남 결혼 하자고?
지은 응. 나도 자기 사랑하고 자기도 나 사랑하잖아. 프로포즈는 자기가 할랬는데 내가 먼저 얘기해서 놀랬어? 그런게 어디 있어 누구든 하면 되지. 놀랬어?
현남 사랑, 사랑은 하는데 이건 좀 다른 이야기 아닐까?
지은 뭐가? 우리 서로 사랑하고 거기에 축복도 생겼으니까...
현남 지은아. 너 진짜 철 없다. 결혼을 해 우리가? 우리 아직 20대야. 나 일 시작한지도 얼마 안돼서 자리도 못 잡았고. 너도 아직 말단이잖아. 그런데 우리가 결혼을 해? 그것도 애를 달고? 너 왜 이렇게 철이 없냐?
지은 철이 없다고?
현남 애초에 너는 왜 그렇게 정신이 없냐. 어떻게 피임약을 깜빡하냐 여자애가. 피임약을 깜빡했으면 나보고 콘돔이라도 쓰라고 하던가. 나는 다 괜찮은줄 알았더니... 하 좋게 여행 다녀와서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진짜.
지은 날벼락이라고 했냐?
현남 그럼 날벼락 아니고 뭔데. 그냥 좋으려고 신나게 여행 다녀와서는 이게 무슨. 그리고 그랬으면 좀 빨리 알아차리기라도 하지 둔하게 그걸 지금까지 모르는게 말이 되냐? 몸에 변화가 느껴졌을거 아니야? 뭐 가슴이 커진다던가 그런거 있었을 거 아니야. 그전에, 아직 임신이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 테스트기 그거 해 봤어? 그냥 생리 미뤄지는 거잖아. 아닐 수도 있는거잖아. 그런데 왜 이 난리를 쳐서 결혼이니 뭐니 하고 난리야 난리가. 안그래도 머리 복잡한데 요즘.
지은 자기야. 지금 좀 흥분한 것 같은데. 좀 진정해. 이야기 하자.
현남 진정은 무슨.
지은 자기야.
현남 너 일부러 그런거 아니야? 너 항상 결혼 빨리 하고 싶다고 그랬었잖아. 그래서 그런거 아니야?
지은 아니야.
현남 나는 결혼할 생각이 지금은 아예 없어. 아예. 나 아직 20대야. 철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일단 임신 확실한지 확인부터 해. 테스트기를 하던지 병원을 가던지 해서 확인을 하고 이야기를 해. 그리고 진짜 임신이더라도 나는 아직 그럴 생각이 없으니까, 아 아니다 이런 이야기까지 할 필요 없고 일단 확인부터,
지은 진짜 임신이더라도 그럴 생각이 없다고?
현남 그래 나는 결혼할 생각이 없어.
지은 진짜 임신이더라도? 진짜 애가 생겼어도 결혼 할 생각이 없다고?
현남 그래, 없어. 없다고. 나는 더 천천히 잘 준비해서 하고 싶어 결혼은.
지은 더 천천히 잘 준비해서?
현남 그래, 이렇게 덜컥 애 생겨서 애달고 헐레벌떡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고.
지은 그럼 진짜 임신이면 나 혼자 애 낳아? 아빠가 있는데 나 미혼모 되라고?
현남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미혼모야. 5주 정도 밖에 안 됐으면 방법이 있어. 불법이라고 하지만 다 방법이 있댔어. 나 학교때 선배 하나도 어떻게든 하더라. 아직 작을 때는 다 방법이 있어. 그건 너가 알아보면 다 방법이 있어.
지은 지우자고?
현남 지우라고. 할 수 있어. 너도 생각해봐. 너 벌써 애 엄마 되고 싶어? 아직 한창인 나인데 벌써 아줌마 되어서 애기 똥 기저귀나 갈고 있고 싶냐고. 아니잖아. 정신 똑바로 차려. 나도 내 인생도 이제 시작인데, 우리 이렇게 주저 앉지 말자. 정신 똑바로 차려 정말.
지은은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신다.
자세를 고쳐 앉는다.
현남은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꺼내서 이것저것 검색한다.
지은 너 진짜 애구나.
현남 애는 무슨. 철 없는건 너지. 내가 지금 현실적인거야.
지은 개소리 그만하고.
현남 뭐? 개소리?
지은 애는 나 혼자 만들었니? 아니 임신이 아닐 수도 있지만 임신이라면 이거 나 혼자 만들었냐고.
현남 니가 피임을 안했잖아 멍청하게
지은 멍청한 건 너지. 내가 너한테 콘돔을 쓰라고 했어야 했다고? 너 처음에 콘돔 쓰면 느낌이 별로라고 지랄지랄해서 내가 약 먹기 시작한거 아니야. 콘돔 그거 뭐 그렇게 대단히 불편하다고 내가 몇 달 동안 약을 먹게 해. 피임약 먹으면서 몸이 얼마나 안 좋아졌는지 알아? 좀만 피곤하면 뾰루지 생기고 없던 두통도 생기고 가슴도 한 달 내내 팅팅 부어서 아픈데 너는 그냥 커서 좋다 같은 소리만 했지? 그래 좀 안 먹었다 그냥 몸이 좀 정상이었으면 했어! 여기저기 불편한게 아니라 정상인 상태! 네가 사랑하는 여자가 그렇게 리스크를 감당하면서 너랑 자준 걸 알기나 하냐?
현남 자 줬다고? 자주기는 누가, 니가 좋아했잖아!
지은 좋지도 않아. 좋은지도 모르겠어. 그냥 너가 좋아해서 나도 좋아했던거야. 잘하지도 못하는게 진짜.
현남 뭐? 야 너 뭐라고 했어?
지은 그리고, 결혼을 하더라도 천천히 잘 준비해서 하고 싶으시다고? 웃기고 자빠졌네. 천천히 잘 준비하고 싶은 사람이 지금까지 뭘 준비했는데 뭘?
현남 그러니까 이제 부터 준비하겠다는거지 지금까지는 결혼 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좀 진정하고,
지은 아, 그러니까 결혼할 생각도 없는 분이 여보, 자기 하면서 매일같이 나랑 같이 있고 싶다는 핑계로 날 니네 집 식모로 부려 먹었니?
현남 식모는 무슨 식모야. 너네 회사랑 우리집이 가까우니까 출퇴근 여기서 하면 좋겠다고 했더니 네가 그러겠다며! 덕분에 너 좋았잖아 가깝고 편하고.
지은 편한 건 너였겠지. 같이 사는 것 같아서 좋다고 그랬지? 야 난 싫었어. 그 개코딱지만한 원룸 어지럽힐게 뭐 있다고 빨래도 청소도 제대로 안해서 내가 갈때까지 쌓아두고 그랬니? 내가 퇴근하고 가서 청소하고 빨래 돌리고 밥 해 먹이고 그러고 너가 자자 그러면 또 자주고. 난 결혼할 사이니까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지. 결국엔 내 사람인데 내가 하면 뭐 어떠냐 싶어서 했어. 근데 결혼할 생각이 1도 없으셨다는거네? 내가 헛짓거리 했네. 내가 등신이었네.
현남 자, 자줬다는 표현 진짜 너무 저급하지 않냐? 그만해...
지은 그만하긴 뭘 그만해. 싫어. 아직 더 남았어. 그래, 아직 모르는 일이지만 정말로 내가 임신했다고 치자. 그러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어떤 기분일지를 생각하고 그 후의 일을 함께 고민해야 하는 거 아니야? 진짜 임신이면 나는 지금 당장 회사 걱정 부터 해야해. 일은 어떡하나 나 아직 말단인데 휴가를 낼 수 있을까. 쉬고 나서 복직할 수 있을까? 그리고 당장 나는 배가 불러 올거라고. 근육은 빠지고 피부도 푸석해 질거고 탈모도 온다던데, 나는 그런 생각하면서 그래도 너는 나를 사랑하니까 괜찮겠지 하고 용기내서 한 이야기인데. 그런데, 너 지금 뭐 하고 있니. 애 없앨 생각하고 있잖아.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애를 없앨 생각부터 하고 있다고. 니가 인간이니? 니 인생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지 인생 망가질 생각에 세상 무너지듯 괴로워 하고 있네. 진짜 같잖아서.
현남 뭐 같잖아?
지은 응 같잖아. 여자친구가 잘 해주니까 좋았지? 집에 와서 살림도 해주고, 예뻐해주고 사랑해주고 니 자존감 높여주니까 좋았지? 이래도 잘한다 저래도 대단하다 해주니까 네가 우주의 섹스킹인것 같아서 행복했지? 우리 지금까지 몇 번 했는지 알아? 느낀 횟수를 내 기준으로 다시 세면 우리 지금까지 한 번도 안 했어. 나 처녀야.
현남 너 미쳤어?
지은 응 미쳤어. 내가 사랑한 남자가 그냥 애새끼였구나 싶어서 머리가 돈다 돌아.
지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선 자리에서 침을 삼킨다.
지은이 나간다.
현남 어, 어디가?
혼자 남은 현남은 계속해서 휴대폰을 들여다 본다.
앞에 놓인 아이스 커피를 연신 들이킨다.
얼음만 남은 잔을 입에 털다가 얼음을 와작와작 씹는다.
지은이 돌아온다.
지은 (손가락 길이 정도의 하얀물체를 현남에게 던진다) 축하한다. 애새끼야.
현남 (무의식중에 그 물체를 받고 지은을 쳐다본다) 뭐?
지은 평생 혼자 살아라. 제발.
지은이 나간다.
현남 뭐야, 씨
현남은 지은이 던진 물체를 확인한다. 돌돌 말려 끝에 테이프가 붙어 있는 사용한 생리대다. 현남은 그게 뭔지 몰라서 이리저리 돌려 보다가 테이프를 당겨 뜯는다. 생리대가 펼쳐진다.
현남 (놀란다) 아, 이게 뭐야!
카페 음악이 계속해서 흐른다.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