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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티서 Aug 17. 2020

<F**king 사과파이>

8월의 창작 주제: <사진 한 장에서 출발한 공동 창작 >

    

가운데 인물, 지하철을 타기 전




등장인물

    혜수, 금희의 손녀, 20살, 고스족처럼 온통 검은색 화장을 하고 검은 옷을 입었다.

    금희, 혜수의 할머니, 70살, 어딘지 미국스러운 가정복을 입었다.

시간

     혜수의 생일 하루 전날, 커튼을 투과한 낮은 햇살이 커피색으로 물드는 늦은 오후  

공간

     수원, 금희의 집            





  조명 들어온다. 어딘지 고즈넉하고 80년대 미국 영화에 나올법한 가정집. 무대의 왼편 출입구가 이 집의 현관문이다. 무대의 중앙에는 전면을 바라보는 소파가 놓여 있다. 그 앞에 놓여 있는 낮은 테이블. 테이블의 한 쪽에는 요리책과 양장본 소설책들이 쌓여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뜻 밖에도 새장이 올라가 있다. 새장 안에는 까마귀가 들어 있다. 잠시 후, 혜수가 주춤주춤 들어온다.    


혜수    안녕하세요. 저기요?    


  주변을 낯설다는 듯 둘러보는 혜수.    


혜수    으악! (다시 보고) 진짜 까마귀야?


  그때 무대의 오른편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금희. 금희와 혜수 서로를 마주보고 정지한다.    


혜수    (꾸벅이며) 오랜만이죠, 할머니.

         (사이) 그러니까 이게, 그 동안은 수능 공부한다고 바빠서, 저 대학 붙었어요, 예이.

         (사이) 15년 만이네요, 기억은 없지만.    


  혜수의 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금희.    


혜수    아, 바보 같죠. 새로 시도해보는 스타일인데, 그래도 이것 때문에 남자친구도,

금희    (말 끊으며) 너희 아빠가 다 말해줬구나? 

혜수    네?

금희     (가슴을 쓸며) 다행이다. 이걸 어떻게 말하나 마음이 무겁던데.

         근데 그 얍실이가 웬일이라니, 궂은일을 자기가 자처하고?

혜수    얍실이요?

금희    (웃으며) 너희 아빠 어렸을 때 별명. 왜 가장 구실은 좀 하나 보지?    


  미소를 짓는 혜수.    


혜수    여전하세요.

금희    (바라보며 웃는) 앉아라. 

 

  그대로 오른쪽 부엌으로 들어가는 금희. 소파에 앉는 혜수. 곁눈질로 까마귀를 주시한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 들린다.    


혜수    매번 보내주신 사과파이는 잘 먹었어요.

금희    (부엌에서) 그건 좀 이따 먹을 수 있을 거야. 항상 친구한테 부탁하던 거거든.

혜수    아.

금희    (부엌에서) 하루 일찍 왔네?

혜수    네. 그게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부탁드릴 게 있어요.

금희    (부엌에서) 뭔들 못 들어줄까. 원래 호의라는 건 쌍방통행이란다.

혜수    그냥 인사만 드리러 온 건데요 뭐. 그러니까 꼭 오늘이 아니라도 언제든,    


  어느새 부엌에서 찻잔을 들고 나오는 금희. 미국 80년대 풍의 앤티크 찻잔들이다.    


금희    그런 말을 다 할 줄 알아?

혜수    저, 그러니까 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금희    (앉으며) 급할 것 있니. 차 좀 마셔라. (건네며) 로즈마리차야.    

 

  잠시 쥐고 있는 잔을 바라보는 혜수.    


혜수    되게 미국같아요.

금희    (웃으며) 우리 하는 일이 좀 그렇잖아. 글로벌하달까.

혜수    우리 하는 일이요?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혜수    우리 하는 일이 뭔데요?

금희    세상을 구하는 거. ‘마녀’ 말이다.    


  사이.    


혜수    마녀요?

금희    왜 그렇게, (머리 짚으며) 그럼 그렇지. 아무 것도 모르고 왔구나?

혜수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저는 그냥 할머니 댁에 가서 한 일주일 쯤 지내다 오라고, 그런데 ‘마녀’요?

금희    하루 먼저 왔기에 다 아는 줄 알았어. 그럼 그 옷은 다 뭐니?

혜수    말씀 드렸잖아요. 고스족 스타일,

금희    평범한 학생이 왜 그런 걸 입어? 너 대학 붙었다는 것도 거짓말이었구나?

혜수    제가 언제, 그리고 저 스타일 좋다는 말 꽤 듣거든요?

금희    너희 아빠가 그러던?

혜수    남자 친구가요. 네, 의심하시겠지만 사실이구요.    


  혜수의 머리에 손바닥을 언는 금희.    


혜수    뭐 하시는 거예요?

금희    (눈을 감고) 가만히 좀. 그래, 양진환. 봐줄 만은 하구나. 아니, 이정도면 핸섬한 편이지.

혜수    그렇다니까요. 근데 제가 이름 알려드린 적 있어요?

금희    얘 나중에 배우로 꽤 성공하겠다, 야.    


  금희의 손을 자기 머리에서 떼어내는 혜수.     


혜수    저 사귄다는 거 아빠한테 들으셨어요? 근데 아빠가 어떻게 걔 이름까지 알아요?

금희    그게, 차라리 잘 됐네. 너희 아빠는 아는 거 없어.

혜수    이제 와서 감싸주지 마시구요.

금희    예지력. 그게 내 고유능력이야.

혜수    예지력?

금희    그래. 상대방은 물론 상대방과 접촉한 사람의 미래까지 읽을 수 있단다.

         고유 능력  중에서도 꽤 윗줄이지.

혜수    저희 아빠가 제 핸드폰을 뒤져봤다는 쪽이 이만 배쯤 더 설득력이 있네요.

금희    밝은 염색머리에, 키는 180 중반 쯤? 꼭 너처럼 온통 검정 칠을 해놓긴 했지만,

         타고난 미소가 되게 해사하네.

혜수    그만. 저 지금 되게 소름끼쳐요.

금희    근데 얘 나중에 연예가중계 인터뷰에서 이때를 흑역사라고 언급해.

         그때는 고스족이 되게 멋있는 건줄 알았는데, 일시적인 유행에 취했을 뿐이라면서.

혜수    (귀를 막고) 안 들려요.

금희    아쉬워할 건 없어. 얘 콘돔 낄 때마다 발기가 풀리네. 그리고 못 고쳐.       


  귀를 막고, 눈까지 감는 혜수. 순간 벌떡 일어난다.    


혜수    지금 제가 섹스하는 모습까지 본 거예요?

금희    걱정 마. 같은 마녀끼리는 미래를 내다볼 수 없으니까. 물론 자기 미래도.

         (웃으며) 아예 안 믿기는 건 아닌가봐?

혜수    누구나 사적인 얘기를 파고들면 화들짝하기 마련이에요.    


  서로를 바라보는 금희와 혜수.    


금희    날 계승해서 마녀가 되어야 해. 그래서 난생 거의 처음 보는 할머니 집에도 와야 했던 거고.

혜수    진짜 마녀가 있대도 할 생각은 없어요.

금희    너희 부모가 네 미래에 대해 항상 얼버무리지 않던?

혜수    방목형이긴 했죠.

금희    어차피 마녀가 돼야하니 그랬을 거란다. 협회에서 월급도 나와.

혜수    저도 대학 잘 갔어요. 취직 걱정 없이 일단 좀 놀고 싶고요.

금희    그래. 갑작스러울 거야.

혜수    지나치게 그러네요. 이런 오컬트에 빠진 집안이었다면 적어도 어렸을 적부터 티는 내줬어야죠.

금희    어린 나이에 마법을 깨치면 자기 힘을 자제 없이 쓸까봐 정해진 규칙이란다.

         그래서 이 집안의 여자들은,

혜수    20살 생일날이 되면 이야기를 듣게 된다?    


  혜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금희.    


혜수    왜 또 여자만이래요? 

금희    네 아빠를 생각해봐라. 남자들이 어떻게 세상을 구하겠니.

혜수    와, 그럼 저는 세상씩이나 구해야하는 거고요? 누구한테서요?

금희    그건 차차 납득될 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혜수    아뇨! 안 돼요. 저 대학 신입생이고 이제야 시작이에요.

         그런데 뭐 갑자기 가업을 이어야 한다? 게다가 사이비잖아요.

금희    사이비가,

혜수    충분해요. 마녀, 마법사 아니라 슈퍼히어로라도 싫어요. 저 이제야 좀 잘 풀려간다고 생각했어요.

         남자 친구도 처음 사귀어 보고, 내 멋대로 꾸며도 보고. 그래요,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겠죠.

         근데 그러면 좀 어때요? 예전엔 우스꽝스러울까봐 시도조차 못 해봤는데, 그것보단 훨씬 낫잖아요.

         적어도 이젠 대학생이니까, 누구나 자유로워도 되는 시절이라고들 하니까.

         저요, 방목형 부모 하나도 안 고마웠어요.

         부모님이 전혀 의지가 안 되니까 제가 먼저 매사에 조심하게 되는 상황 아세요?

         먼저 검열하고, 선 긋고, 재미없는 범생이처럼 굴게 되는 상황이 얼마나 답답한지 아세요?

         이제야 좀 재미있어 진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다른 애들처럼 고만고만하게 한심하고, 평범한 대학생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할머니가 뭔데 저를 판단해요. 뭔데 그 균형을 다 무너트리고,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이.    


  사이.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금희    (엉거주춤 일어나며) 내 손님이야. 사과파이 때문에.

         (걸어가다 돌아보며) 네 세상이 이제 막 시작하는데 내가 다른 세상 타령을 했구나. 알아들었다.    


  금희 왼쪽으로 퇴장한다. 사이.    


까마귀  (이후 계속 녹음된 음성으로) 이봐, 감상에 젖을 시간 없다고.

혜수    (두리번거리며) 누구세요?

까마귀  이제야 내 말이 들리나 보군.    


  두리번거리던 혜수의 시선이 까마귀 앞에 멈춘다.    

 

혜수    까마귀?

까마귀  설마 까마귀가 말을 할 리가.

혜수    그렇지? 나도 참.

까마귀  당연히 까마귀지! 지금 여기 너랑 나 말고 누가 있어?    


  놀라서 소파 뒤로 바짝 물러서는 혜수.    


혜수    말하는 까마귀였어?

까마귀  까마귀는 원래 다 말을 한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혜수    (귀를 막고) 듣고 싶지 않아.

까마귀  저기 저 밖에 너희 할머니의 친구가 온 게 아냐.    


  귀를 막고 눈까지 감는 혜수.    


까마귀  둔갑을 할 수 있는 흑마법사가 변장을 한 거다. 내 감각은 정확해.

         그리고 내 감각에 의하면, 저 사과파이에는 독이 들어 있다.

         아마 네 계승식이 내일인 것을 알고 그 전에 선수를 치러 온 모양이야.

         (사이) 그렇게 귀를 막아봤자 네 청력으로 다 들린다는 것을 안다, 인간.    

         

  눈을 뜨고 손을 내리며 까마귀를 바라보는 혜수.    


까마귀  선택은 네가 해라. 내 말을 듣고 행동하면 넌 마녀 계승을 무를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도 티를 내는 순간 반박의 여지없이, 너는 동물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뜻이 되니까.  

혜수    내가 만약 무시한다면?

까마귀  아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적어도 네게는.    


  왼쪽에서 들어오는 금희. 손에는 파이 한 판과 여분의 파이 한 조각을 들고 있다.    


금희    세상에 여분으로 한 조각을 더 주지 않겠니?

         내 친구도 이쪽 사람이라 네가 와있다는 이야기는 따로 안 꺼냈어. (앉으며) 한 판은 네가 싸가.     


  금희를 바라보는 혜수.    


금희    (끄덕이며) 집에는 같이 있다고 말할게. 남자친구랑 생일 기념 여행을 가고 싶었던 거잖아.

         그 정도는 마법까지 안 써도 진즉에 알아봤어.    


  금희 천천히 손에 집은 파이를 자기 입으로 가져간다. 마지막 순간 파이를 쳐내는 혜수.    


혜수    그 파이에 독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제 고유 능력은 동물의 말을 알아듣는 거였나 봐요.    


  혜수를 바라보는 금희. 눈을 두 번 끔뻑인다.    


금희    고유 능력?

혜수    할머니가 말씀해주셨잖아요. 할머니는 예지력이 고유 능력이고,

금희    (고개 저으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그래, 여행은 어디로 간다고?    


  사이.    


혜수    (까마귀를 보고) 기억이 사라지는 거구나?

금희    어디에 대고 얘길 하는 거니?

혜수    이제 내 차례인 거야.    


  벌떡 일어나는 혜수. 파이를 급하게 챙겨든다. 바닥에 떨어진 조각까지.    


혜수    저 가볼게요.

금희    (엉거주춤 일어나며) 이렇게 급하게?

혜수    아니, 앉아계세요. 지금은 그러니까 할머니랑도 대화를 하고 싶지가 않아요.    


  멈칫, 그런 혜수를 바라보는 금희. 혜수 꾸벅 인사하더니 그대로 왼쪽으로 퇴장한다. 다시 들어오는 혜수. 까마귀가 든 새장을 챙긴다. 


혜수    얘도 데려갈게요. 답답할 거 같아서요.    


  걸어나가다 뒤를 돌아보는 혜수.    


혜수    (울음을 겨우 참으며) 쉬세요, 이제.

    

  그대로 급하게 퇴장하는 혜수. 금희 혜수가 나간 쪽을 한참 바라보고 있다. 조명 꺼진다.                




- 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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