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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만추 Jul 21. 2020

문체 완전 정복*

다른 작가의 문체 따라 해보기

무뎌진 것 같아.

이책 저책을 뒤적이며 생각했다. 태티서의 제안을 받아들일 때까지만 해도 내가 이렇게 혼란스러워할 거라곤 한순간도 예상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문체를 따라 해보자는 제안. 상상만으로도 콧노래가 나오는 흥미로운 제안이었다. 내가 미래를 볼 수 있다면 어땠을까? 지금쯤 여러 책을 오가며 곤란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누구의 문체를 따라 할 것이냐였다. 좋아하는 작가 여럿이 머리를 스쳤다. 아니, 좋아하는 작품이 머리를 스쳤다는 표현이 맞겠다. 나는 한 작가의 작품을 줄지어 읽은 경험이 손에 꼽았다……생각나는 작가라면 ‘마스다 미리’ 정도? 외국 작가보단 한국 작가의 문체를 따라 하고 싶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한 번밖에 만나지 못한 작가 중에서 골라야만 했다.      


사실, 따라 하고 싶은 작가를 선정하는 데에 주저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내가 작가들의 문체를 구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와 뭐가 다른지. A 작가와 B 작가가 어떻게 다른지. 예전에도 이랬던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무뎌진 나의 눈과 머리는 이 글의 완성을 방해하는 치명적인 요인이었다.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간다. 결국, 나는 ‘최윤’ 작가의 문체를 따라 하기로 했다. 고등학생 시절 나의 야간 자율학습 시간을 책임졌던 작품. 회색 눈사람을 쓴 작가.      


회색 눈사람을 떠올리면 작가가 쓴 몇 개의 문장과 함께, 그 문장을 읽으며 시리게 아파했던 과거의 내가 떠오른다. 열여덟의 나. 스물의 나. 그리고 스물여섯의 나. 지난 4년 동안 그 문장을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으니, 오랜만에 꺼내 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작가의 문장을 다시 읽으며 과거를 그리고 그때와 또 달라진 현재를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 앞엔 커다란 장벽이 있었다. 무뎌진 나의 눈과 머리가 만들어낸 치명적인 장벽이.      


나는 노트북을 열어 인터넷에 다짜고짜 ‘문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간결체, 만연체, 우유체, 강건체, 화려체, 건조체. 문체의 종류를 설명해 놓은 글을 읽으며 머리로는 이해가 갔지만, 작가의 문체를 따라 쓸 수는 없었다. 누군가가 다정하게 말한다 해서 그가 말하는 단어와 말투가 다정한 말투를 가진 또 다른 누군가와 완전히 같던 적이 있던가? 최윤 작가의 문체를 구사하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방법을 고민하다 일본어를 공부했던 그 시기가 비 온 후의 하늘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일본행을 앞두고 무작정 듣고 무작정 따라 하던 시기. 그 시기의 나는 MP3에 다운받아 놓은 일본 라디오 드라마를 들으며 귓속에 들려오는 말을 중얼거리곤 했다. 버스를 탈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사람들의 시선은 상관없이. 처음에는 “코노 방구미와(この番組は)”와 “오쿠리시마스(お送りします)” 밖에 들리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많은 말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침대 아래서 꺼내 올린 머리끈이 청소기로 먼지를 털어내자 정체를 밝히는 것처럼.      


일본어를 공부했던 그때처럼, 책 옆에 수첩을 하나 꺼내 놓고 최윤 작가의 문장을 그대로 옮기기 시작했다. 아래는 내가 필사한 최윤 작가의 소설 <하나코는 없다>의 일부다.     


팔이 아파서, 또 시간이 없어서 작품을 전부 따라 쓰진 못했다. 몇 장뿐이지만 그래도 한 글자 한 글자를 옮겨 적으며 약간의 수확이 있었다. 그냥 눈으로 책을 읽었을 때 보단, ‘어떤 걸 따라 할 수 있겠다.’ 혹은 ‘어떤 부분을 따라 하면 되겠다.’라는 눈곱만큼의 확신이 생겼다는 것. 그 확신의 결과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이다. 굵은 글씨로 표시해 놓은 문장이다.     


최윤 작가를 따라 한다고 하긴 했지만, 나는 안다. 아이가 옹알이하듯 작가의 문장을 어설프게 발음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언어를 배울 땐 언제나 그랬다. 아이였을 때도 영어를 배웠을 때도 그리고 일본어를 배웠을 때도. 최윤 작가의 문장을 더 많이 읽고 필사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지금보다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 또한 완벽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일본어를 전공했지만 여전히 ようだ, らしい, そうだ, みたいだ의 용법이 헷갈리며, つ와 が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다. 어떤 것은 공부를 할수록 나아지겠지만 어떤 것은 계속해서 부족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나는 외국인이니까. 최윤 작가 본인이 아닌 나는, 아무리 아무리 작가의 세계에 다가가려 해도 완벽히 가닿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의 문체를 따라 하는 일은 처음부터 그 한계가 명확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한계를 한 번쯤은 경험한 모두와, 최근에 쓴 희곡의 마지막 대사를 함께 나누고 싶다. “…그래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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