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희곡 쓰기*
등장인물
경선
혜수
우엔
까마귀 *까마귀의 말은 혜수에게만 들린다.
때
어느 겨울, 해 질 녘
곳
지하철 1호선
경선, 혜수, 우엔이 일렬로 앉아있다.
경선이 피자 박스를 손에 들고 꾸벅꾸벅 졸고 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우엔이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 울고 있는 건지 잠을 자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경선과 우엔 사이에서, 혜수가 얼이 나간 채로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다.
혜수 : 내가 마녀라니. 내가 마녀라니…!
까마귀 : 조용히 좀 하지?
혜수 : (양 옆을 보고는)아무도 신경 안 쓰는 것 같은데.
우엔 : (벌떡 일어난다)서울역 지났어요?
까마귀 : (푸드덕 거리며)아 씨 깜짝이야!
우엔 : 여기 어디예요?
혜수 : 신, 신도림이요.
우엔 : 신도림.
우엔, 다시 무릎에 고개를 파묻는다.
까마귀 :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혜수 : 거봐. 내가 뭐랬어.
까마귀 : 놀랐더니 배고프잖아. 뭐 먹을 거 없어?
혜수 : 없어.
까마귀 : (혜수의 초록색 가방을 뒤진다)…
혜수 : 하지 마, 쫌.
까마귀 : 여행 간다면서 어떻게 먹을 거 하나 없냐?
혜수 : …숙소 도착해서 오빠랑 마트 가기로 했단 말이야. 같이 카트 끌고 돌아다니면서 시식 코너 음식도 먹여주고. 내 로망이었는데… (한숨)‘해리포터’가 이런 기분이 었을까? 어제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는데 갑자기 나보고 마녀라니. 흑마법사는 또 뭔데. 나 고작 스무 살인데 내가 왜 세상을 구해.
까마귀 : 운명인데 받아들여야지 어쩌겠어.
혜수 : 네 일 아니라고 쉽게 말한다?
까마귀 : 그럼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주니? 마녀 협회 가는 방법 알려달라 그래서 알려줘, 그것도 모자라 이렇게 길동무까지 해주고 있는데.
혜수 : 그래! 고맙다.
까마귀 : 고마우면 망 좀 봐줘.
혜수 : 뭐?
까마귀, 혜수의 무릎에서 경선의 무릎으로 자리를 옮긴다.
경선이 들고 있는 피자박스 냄새를 맡는다.
혜수 : 야, 너 뭐해.
까마귀 : 배고파 죽겠어.
혜수 : 미쳤어? 빨리 와!
까마귀 : 이 틈으로 부리 들어갈 것 같은데? 맛만 보자.
혜수 : 안 그래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너까지 왜 그래.
까마귀, 피자박스 틈 사이로 부리를 집어넣고 피자를 꺼내려한다.
곧 피자박스가 바닥을 향해 미끄러지며, 안에서 피자가 나온다.
혜수 : 야아!
까마귀 : (혜수의 어깨 위로 날아가 앉고는)진정하고 앞에 봐. 모른 척 해. 나는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그때, 경선이 일어난다.
경선 : 내 피자…. (혜수를 본다)
혜수 : 저 아니에요.
경선 : 내가 직접 구운 소중한 내 피자.
혜수 : 제가 안 그랬어요.
경선 : 밤낮으로 레시피 연구하며 고생하던 게 생각나서 나조차도 쉽게 손을 못 대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누가 망가트려 놓은 내 피자.
혜수 : 저는 아니고, 제 까마귀가…. 죄송합니다.
경선 : 그냥 말로만?
까마귀 : 어떡하냐. 우리 잘못 걸렸다.
혜수 : (까마귀 노려본다)…
경선 : 부탁하나 들어주면 퉁칠게요.
혜수 : 무슨 부탁인데요…?
경선 : 제가 저주에 걸렸거든요.
혜수 : 네?
경선 : 사람들이 내 말을 안 믿어요.
혜수 : 그래서요?
경선 : 당신 마녀잖아요. 내 저주 좀 풀어달라고요.
혜수 : 저 마녀 아닌데요.
경선 : 맞는데.
혜수 : 아닌데.
경선 : 내가 다 들었는데. 마녀라고 하는 거.
까마귀 : 저 등신.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어쩔 거야. 너 이거 마녀 협회에서 알면 징계 감이야.
혜수 : 뭐?
경선 : 까마귀랑 말도 하고.
혜수 : 아닌데요. 그냥 혼자 논거예요. 이 의상에 맞는 상황극 한 건데. 제가 극한의 컨셉충 이거든요.
경선 : 혹시나 정체가 들켜서 곤란해질까봐 그러는 거면, 걱정하지 마요. 비밀로 할 테니까.
혜수 : 아닌데, 아닌데. 진짜 그런 거 아닌데.
경선 : 에휴, 저 믿어도 돼요. 입 진짜 무겁거든요, 제가.
혜수 : 아니라는데 왜 그러세요. 본인이 사람 말을 못 믿네요.
경선 : 딱 보면 알아요. 아닌 게 아닌데요 뭐.
까마귀 : 야야, 안 되겠다. 하나 둘 셋 하면 내가 부리로 저 사람 손가락을 쫄 테니까 튀어! 하나, 둘
경선 : 지금 혹시 까마귀랑 도망칠 계획 세우는 거 아니죠? 부리로 나를 막 공격한다던지?
혜수 : 그쪽도 얘가 말하는 게 들려요?
경선 : 뭐야, 까마귀랑 이야기하는 거 맞네.
혜수 : …
경선 : 눈 보면 딱 알아요. 어렸을 때 우리 옆집 살던 아줌마도 그랬거든요. 그때 그걸 본 이후로 내 인생이 이렇게 꼬여버렸지만. 아무튼 이번엔 제대로 찾은 것 같네요. 도와줄 거죠?
혜수 : 제가 마녀가 맞기는 한데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아까 들으셨겠지만 제가 오늘 막 마녀가 됐거든요? 그래서 저주 푸는 주문 같은 거 하나도 몰라요.
경선 : 저주 푸는 주문이 따로 있어요?
혜수 : 따로 있지 않나요?
경선 : 그냥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되는 거 아니에요? ‘사브리나’에선 그렇게 마법 걸던데.
혜수 : ‘해리포터’에선 안 그랬는데.
경선 : 주문을 모르면 아무것도 못하는 거예요?
혜수 : 그런 거 아니에요?
경선 : 무슨 마녀가 그래요?
혜수 : 나도 몰라요! 말했잖아요, 마녀는 처음이라고.
경선 : (한숨)이제 좀 벗어나나 했는데.
혜수 : (까마귀에게)뭐 아는 거 있어?
까마귀 : 지금 네가 가진 능력이라곤 내 말을 알아듣는 거, 그거 말곤 없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지.
혜수 : 그걸 말이라고.
경선 :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다른 마녀를 소개해 준다든가. 저 이렇게 계속 살아야 돼요?
혜수 : (고민하더니)한번 시도해 볼게요.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경선 : 저주 푸는 주문 모른다면서요.
혜수 : 방금 까마귀가 알려줬어요. 아주아주아주아주 예전에 저희 할머니가 저주를 풀어 준 걸 본 적이 있대요.
경선 : 세상에!
까마귀 : 뭘 어떻게 하려고.
혜수 : 다 잘될 거니까 걱정하지 마. (경선에게)이걸로 퉁 치는 거예요.
경선 : 그럼요!
혜수, 양손으로 경선의 머리를 감싸고 주문을 왼다.
붐샤카라카 레비오우싸 붐샤카라카 레비오우싸-
만화나 영화에서 나온 주문들을 여러 개 섞은 것 같다.
혜수 : (경선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는)어때요?
경선 : 뭐가 달라진 건지 모르겠어요.
혜수 : 마법이란 그런 거예요. 저흰 그럼 이만.
갑자기 지하철 불이 꺼진다.
혜수 : 뭐야? 뭐야? 갑자기 왜 이래?
경선 : 주문이 잘못된 거 아니에요?
혜수 : 아니에요. 그거 그냥 아무거나 말한 거란 말이에요.
경선 : 뭐라구요?
혜수 : 플라시보 효과! 그걸 노린 거였단 말이에요.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어떡해! 진짜 나 때문인가 봐요. 아무거나 말한 건데 실제로 있는 주문인가 봐요.
까마귀 : 무너지는 거 아냐?
혜수 : 뭐? 어떻게 하지? 아까 했던 주문 거꾸로 말해볼까? 싸-오-우-비-레- 어떡해! 기억이 안 나. 싸-오-우-비-레-
그때, 얼굴을 파묻고 있던 우엔이 벌떡 일어난다.
까마귀 : 아씨 깜짝이야! 이 사람은 또 왜 이래.
우엔 : 서울역!
혜수 : 네?
우엔 : 서울역이라구요.
불이 다시 켜진다.
혜수 : 돌아왔다.
우엔 : 원래 서울역 전에 깜깜해져요.
혜수 : 아 원래 그런 거예요?
우엔 : 네. 깜깜해졌다가 다시 환해져요. 다른 세상처럼.
혜수 : 다행이다.
까마귀 : 다이나믹 하다 진짜.
전철이 서울역에 도착한다.
우엔이 전철에서 내린다.
경선 : 피자까지 망가트린 것도 모자라서. 사기를 쳐요?
혜수 : 죄송합니다….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저주를 풀어달라고 하시는데 저는 저주를 풀 줄 모르고. 근데 계속 저주를 풀어달라고 하시니까…
경선 : 기가 막혀. 까마귀랑 말하는 사람들은 다 그 모양이에요? 옆집에 살던 아줌마도, 오빠가 또 괴롭히면 코코랑 같이 가서 혼꾸녕을 내주겠다고 말해놓고선, 다음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이사가 버리고. 해결할 능력이 없으면 희망은 주지 말았어야죠!
까마귀 : 코코…?
경선 : 그날 이후로 꼬여버린 인생 풀어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내가, 어떤 마음으로 당신한테 말을 걸었는데.
까마귀 : 기억났다! 맨날 오빠한테 얻어맞고 울면서 놀러 오던 옆집 꼬맹이.
까마귀, 경선의 무릎으로 날아간다.
까마귀 : 어머 어머, 이 지지배 아가씨 다 된 거 봐.
혜수 : 너 저사람 알아?
까마귀 : 내가 코코야! 날 코코라고 불렀어. (경선에게)야, 나야 나! 기억 안 나?
경선 : 얘는 또 왜 이래요?
혜수 : 본인이 코코라는데요?
경선 : 말도 안 돼…. 너 코코 맞아? 코코야?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데!
까마귀 : 어쩌다 저주에 걸린 거야.
혜수 : 어쩌다 저주에 걸린 거냐고 묻는데요?
경선 : 뭔 소리야. 너랑 같이 있던 아줌마 때문이잖아.
혜수 : 우리 할머니요? 우리 할머니가 저주를 걸었다고요?
까마귀 : 그럴 리가 없는데. 쟤를 얼마나 예뻐했다고.
혜수 : 저주에 걸린 게 확실해요?
경선 : 맞아요. 아줌마랑 코코가 이야기하는 걸 본 이후로 아무도 내 말을 안 믿었단 말이에요. 동물이랑 말하는 사람을 봤다고 했는데 다들 절 거짓말쟁이 취급했다구요. 아줌마가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고 저주를 건 거예요.
까마귀 : 얘가 원래 이렇게 멍청했었나? 아닌데. 똘똘했는데.
혜수 : 지금 그거 때문에 저주에 걸렸다고
경선 : 그리고 오빠가 자꾸 나를 때린다고 말해도, 어른들은 내가 잘못했을 거라 그러고. 엄마 아빠 없을 땐 오빠가 어른이니까, 오빠 말 잘 들으라고만 하고. 나는 상혁 선배 좋아하지도 않는데, 아니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다들 내 말은 안 듣고 사귀는 거 아니냐고 몰아가기만 하고. 엄마가 너무 오빠한테 매달리길래 오빠가 엄마의 삶을 구원해주지 않을 거라고 했더니 웃기지 말라 그러고. 그러고 나서 오빠가 공무원 시험 포기하니까 엄마는 내가 재수 없게 입 놀려서 이렇게 된 거라고 하잖아요. 나는 연애가 싫고 결혼할 생각도 없는데, 혼자가 좋다고 말해도 다들 내가 연애를 안 해봐서 그러는 거라고, 자꾸 남자 소개해 주고 곤란한 자리에 부르고. 이 피자도! 대리님이 아니라 내가 레시피 개발한 거라고 했는데 아무도 안 믿고. 레시피 노트 보여주니까 알바생 주제에 건방지다고, 주제넘는다고 잘라버리고. 이게, 저주에 걸린 게 아니면 뭐겠어요?
사이.
까마귀 : 이 개자식들을 내가!
혜수 : 할머니는 저주를 걸지 않았대요. 오히려 당신을 무척이나 예뻐하셨대요.
경선 : 저주에 걸린 게 아니라면…
혜수 : 그냥, 원래 그런 사람들인 거예요.
경선이 한참 동안 창문 밖을 본다.
경선 : 1호선은 지상으로만 다니는 줄 알았는데, 지하로도 다니네요. 피자집에서 잘리고 갈 곳은 없는데 너무 추워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탔어요. 이렇게 멀리까지 온 적은 없었어요.
혜수 : 우리는 종로 3가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요. 어떻게 하실 거예요?
경선 : 모르겠어요. 그런데 수원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다음 역을 알리는 지하철 안내방송이 흐른다.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