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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윈블루 Sep 30. 2021

결재서류를 든 노신사

나도 갖고 있었던 그 결재서류.


퇴근길 지하철 안, 

운이 좋게 퇴근길임에도 불구하고 앞자리가 중간에 비어서 앉아서 갈 기회가 생겼다.


여느 때처럼 유튜브 짧은 영상을 보다가 중간에 끊어지고 광고가 나오는 타임에 

고개를 들어 지금 어디쯤이나 왔나 둘러보다가, 

내 시선을 끄는 한 검은색 네모난 직사각형 판에 저절로 눈길이 갔다. 


결재판이다.



지하철에서는 보통 볼 수 없는 오피스 아이템이라 그런가 꽤 시선이 갔다.


...


요즘 시대 결재판, 결재서류 란 단어 자체도 지금은 많이 퇴색된, 

보기도 힘든 유물이 되어버린 것 같다.


 몇 년 전만 해도, 나도 결재판을 책상 내 캐비닛에 넣고 다녔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전자결재 분위기가 활성화되면서 

회사에 있던 결재판도 모두 모아서 치워 버렸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의 흐름도 한몫 단단히 했지.


예전에 결제/ 결재를 혼동해서 많이 혼나기도 했고,

선배들에게 결재판 다루는 법을 배우기도 하고, 

상사에게 드릴 때의 예절을 몰라 혼나기도  했던 기억들이 담긴 추억의 결재판.


몇 해 전에 임원 분께 결재를 올리러 전자결재를 인쇄해서 보고를 드리기 위해 결재판에 

정리를 해서 보고를 드리던 때가 기억난다.


그 임원 분께서 결재판을 보시더니, 요즘 시대에 결재판을 뭐하러 끼고 오냐고 채근을 하시며 그냥 종이 채로 간소하게 가져와도 된다고 하시길래,  


그냥 네 알겠습니다.라고 하려다가,  

그래도 회사에서 배운 예의가 있기도 하고 혼났던 기억도 나서..


결재판에 드리는 것이 예의라고 배웠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나를 물끄러미 보시더니, 음, 잘 배웠구먼 그래?라고 하시던  긴장했던 순간도 기억이 난다..


아무튼, 


지하철 객차 내 통로를 사이에 두고 

내가 마주한 의자에 어떤 노후 중년의 노신사가 이 결재판을 들고 있었는데, 


그 노신사는 적당히 정장에 가까운 옅은 파란색의 여름 마이와

 안에는 검은색 가는 스트라이프가 격자무늬로 얽혀있는 

폴로셔츠와 무채색 바지를 입고 있었고, 

약간은 빛이 바랜듯한 갈색 구두는 오늘도 바쁘게 그를 지탱해 온 것 같아 보였다.


 그의 머리카락은 적당히 포마드를 발라서 어느 정도는 단정했지만, 

퇴근길이라 그런지 몰라도 일부는 흐트러져 있는 상태였다.


긴장이 풀린 사람인처럼, 

마치 건어물이 건어판에 널려있듯, 

혹은 옷가지가 의자 등 받침대에 널려 있듯이, 

지하철 의자에 널리듯 몸을 기댄 그의 모습은 꽤나 지친 모습처럼 보인다. 


그는 결재서류라고 고딕체로, 진지하게, 금색으로, 박힌 검은색 결재판을 

왼손에 늘어트리고, 오른손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쓰다듬고 있다. 


그리곤 자리에 고쳐 앉아서 깊은 한숨을 쉬며 눈을 감고 

반나절 사이에 회색빛으로 자란듯한 수염이 희꺼뭇한 턱을 매만지기도 하고, 

눈을 감고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기도 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 퍽이나 심각해 보인다.


무슨 서류가 그를 그렇게 지치게 만들었는지 몰라도, 


힘든 날이었음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칼퇴를 선호함에도 불구하고 일이 늦어져 늦게 퇴근한다는 사실에


약간은 심사가 뒤틀린 상태였는데, 

이 노신사분의 결재서류에 대한 고민과 고찰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는 

내 뒤틀린 마음은 눈 녹듯이 녹고,

불평을 밀어내고 몇 가지 마음이 흘러 들어온다.


이 노신사분 은 도대체 무엇을 결재하려고 , 

혹은 무엇을 결재받으려고 하는 것인가.


보통 결재권자는 결재서류를 들고 다니지 않으니,

펜을 들고 다니겠지. 

아마 이 노신사분은 결재권자는 아닌 모양이군.


저 나이까지 일을 하시다니 대단하군. 

게다가 저 나이에 결재서류를 들고 계시다는 건 사무직이신데, 멋지다.


나도 저 나이까지 일할 수 있을까?

결재권자의 삶으로 일할 수 있을까?


아니, 피 결재권자 일지라도 저 나이까지 일할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 아닐까?


그의 퇴근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역시 삶이란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일할 수 있을 만큼 일하는 것이 

나은 삶이 아닐까?


아니, 은퇴 이후 삶을 지금부터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지금 들어버린 건, 

이 노신사분에게는 약간은 실례되는 생각인가?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열차는 멈췄고, 

간격 조정을 위해 이리저리 객차가 움직이더니, 

그 노신사분은 나의 배경 속에서 사라져 버리셨다. 


너무 시리어스 하게 받아들이면 한도 끝도 없이 깊어지니

고민은 그쯤에서 멈추고 일단은 현실에 충실하기로 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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