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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끌 Dec 20. 2022

이 와중에 스무 살

박기자의 책에 끌리다, 책끌 #16



p.53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오는 기분은 마취가 풀리는 기분과 닮아 있었다. 달 뜨면서도 평온했고, 예민해지면서도 고요했다.



<이 와중에 스무 살>을 읽다가 이 구절에 필이 꽂혔다. 나의 스무 살 시절을 돌이켜 보니 이 구절과 딱 맞아떨어진다. 달 뜨면서도 평온했고, 예민해지면서도 고요했다. 꿈 많았던 시절엔 돈이 없어 아르바이트를 하다 좋은 시절 다 보냈다. 미친 듯이 공부해서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었지만 대학 시험을 치르고 들어왔더니 에너지는 방전되고 고갈돼서 재충전이 되지 않았다.


2022년 제1회 성장소설상 대상을 수상한 최지연 작가의 <이 와중에 스무 살>은 나의 스무 살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이 책에서 작가는 젊은이의 꿈과 희망을 이야기한다기보다 그 시절을 버텨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스무 살 때도 그랬던 것 같은데, 난 뭘 하면서 지냈더라...


대학에 진학한 은호는 뒤늦은 사춘기를 심하게 앓는다. 자취를 하면서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공무원이 되라는 엄마의 말에 따라 행정학과에 들어왔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겉돌다 시작한 연애도 오래가지 못했다.



p.38

내 인생 최초의 기억 속에서도 엄마는 일하고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빗금을 그으며 쏟아지는 햇빛, 공기에 떠도는 달큰한 과일 향, 농장 모자를 쓴 엄마의 턱에 맺혔다 떨어지는 땀방울, 종이봉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쿵 하는 둔탁한 소리로 이어지는 기억이었다.


p.69

그놈의 네 엄마, 네 아빠. 대체 내게 왜들 이럴까. 아빠는 이런 자기가 딱하지 않냐고도 물었다. 아빠는 자기를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불쌍하다고 믿는 것 같았다. 아내도, 자식들도 아닌 자기 자신을 제일 가여워하는 사람. 그게 내 아빠였다. 아빠의 눈물 콧물이 내 어깨를 적셨다. 아빠는 정말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자신을 불쌍하게 여겨 주길 바라고 있었다.



작가들은 화가처럼 관찰력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에서도 어느 한 시점, 그러니까 주인공 은호가 대학생이던 무렵에 있었던 소소하지만 짠한 기억들 속으로 끊임없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늪이다. 한번 손을 잡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장 속에 파묻힌다.


그러다 보면 또 스무 살 무렵의 난 뭘 했더라 하면서 기억 저편으로 밀려나갔던 파편의 조각처럼 흩어졌던 기억이 한 조각씩 건져 올려져 하나의 사건으로 재구성되고. 나는 어느새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머물다 현재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든다. 그러다 보니 분량이 많지도 않은 이 책을 참, 오랜 시간 읽고 있다. 소설 한 편을 이렇게 오래 봤나 싶을 정도로 일주일이 지나도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과거로 자꾸만 회귀하는 기억 때문이다.


작가는 쭉 좌판을 펼쳐 놓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내 이야기는 이런데 당신의 과거와 닮은 걸 고르시오 하는 것처럼. 그러면 또 문득 기억 하나가 불현듯 떠오르고 그게 연쇄 고리가 되어 한동안 또 과거의 기억 속에 머물다 허겁지겁 올라와 보면, 현실은 그저 읽던 페이지를 되짚고 있을 뿐이다.


작가는 관성대로 살기를 거부하고 자신을 찾기로 결심한 주인공 은호를 통해 우리네 성장통에 대한 이야기를 완곡하게 들려준다. 달 뜨면서도 평온하고 예민해지면서도 고요하게... 세월이 지나고 보니 성장통은 꼭 스무 살 젊디 젊은 시절에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난 또 다른 성장통을 겪고 있다.



p.105

시간이 남아돌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내 앞으로 쏟아지는 시간의 양에 당황하며 도로 눈을 감았다. 내 방은 뜨는 해와는 무관하게 늘 어둑했다. 감았던 눈을 다시 뜨면 정오가 넘은 시각이었다. 하루의 절반은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어야만 이불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자연히 밤에는 쉽게 잠들 수 없게 돼 버렸다. 책이고 뭐고 다 싫었다.


p.175

공무원 시험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일도 없었다. 엄마는 마치 아무 일도 겪지 않은 사람처럼, 앞으로도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다. 엄마에게 왜 약을 먹었냐고 물을 순 없었지만 왜 그런 약을 처방받았는지는 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엄마는 내가 약이라는 단어를 발음하자 내 말허리를 잘랐다.



어느 날, 이혼을 선포하고 자신의 자취방에 눌러앉은 엄마로 인해 은호의 일상은 혼란의 정점으로 치닫는다. 은호는 엄마가 불쌍하고 아빠도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빠보단 자신을 키우느라 청춘을 받쳤을 엄마가 더 안쓰럽다. 지금 자신의 나이였을 엄마가 참 대단하다 생각을 하면서도 왜 그렇게 억척스럽게 살까 답답하다. 물론 더 답답한 건 그런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엄마가 갈수록 부담스러운 존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를 바라보는 은호의 시선에는 자신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암담하기만 처지에 대한 비관이 담겨 있다. 이처럼 <이 와중에 스무 살>은 미래도, 연애도, 가족과의 관계도 어느 하나 잘 되는 것 없는 은호의 성장(통) 이야기다.


책을 읽다가 '이 와중에~'란 단어에 필이 꽂혔다. 되돌이표처럼 계속해서 '이 와중에'라는 말이 나온 구절을 또 반복해서 보고 있다. 얼른 끝내고 다른 서평도 써야 하고, 지난주에는 마무리했어야 하는 인터뷰를 어제 카타르 월드컵 결승전을 보느라 또 못 썼다. 할 일 많은 연말 마감 중에, '이 와중에' 말이다.


스무 살 무렵에 좋아했던 사람이 떠나고 그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 오래도록 가슴 시려했던 기억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상처로 남아 생채기 흔적처럼 손에 잡힌다. 그 시절엔 뭐 하나 잘 되는 게 없었다. 도서관에 파묻혀 공부만 하고 싶었지만 알바라도 해서 용돈을 벌어야 했고, 과외 자리는 쉽사리 내게 오지 않았다. 



p.204

상담사는 또 다른 관점도 제기했다.

"내가 은호 학생 엄마였다면요. 일부러 안 들어왔을 것 같아요. 남편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어서 쪽문을 대신 닫은 채 밖에서 견뎠을 것 같아요. 죄책감 느끼라고요."

자기의 희생과 고생을 앞세워 상대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엄마의 방식은 이미 익숙했다.


p.225

커피를 제대로 배우기 전까진 커피가 다 거기서 거기인 줄 알았다. 맛있는 커피와 맛없는 커피 정도로 나뉠 뿐이었다. 하지만 커피는 품종에 따라, 재배 고도에 따라, 가공 방식과 보관 방식에 따라, 로스팅의 강도에 따라 완전히 달라졌다. 마치 사람과 같았다. 어디에서 태어나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 커피 한 잔에도 사람처럼 이력이 담겨 있었다.




'기회가 균등하다는 말'은 이미 그때, 절대로 그럴 리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듣기 좋은 말일뿐, 누구나 인생의 출발선은 같지 않다. 어느 정도 안정된 궤도에 오르기까진 저마다 거쳐야 하는 과정이 다르듯, 우리네 인생도 어쩌면 출발선부터 달랐던 것일 수도 있다. 단지 스무 살이 되기 전에는 알지 못했을 뿐, 현실의 무게는 거대한 산처럼 여전히 견고해 보인다.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꽃다운(?) 그 시절, 스무 살이 있었다. 아니, 지금 그 시기를 보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말이다. 스무 살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진 지금도 성장통을 겪고 있다. 그게 뭐라고 딱히 표현하긴 어렵지만 말이다. 결국 뭐가 됐든, 내가 털고 일어나는 수밖에... 몇 년 시간이 더 지난 후에 은호의 30대 이야기를 보고 싶은 건 나만 그런 걸까?


당신의 스무 살은 안녕하신가?



이 포스팅은 창비교육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 작성했다.



* 출처 : 박기자의 책에 끌리다, 책끌

https://blog.naver.com/twinkaka/222960498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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