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지붕의 집까지 이어진 길에는 낙엽이 잔뜩 쌓였겠습니다. 바람은 내가 처음 그 길을 들어서던 그 때 보다는 조금 매섭게 불고 있겠지요. 좋은 날도 궂은 날도, 저에게는 이곳만큼 따뜻한 곳이 없었더랬습니다. 어린 시절을 보낸 이 집의 기억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늘 어여쁘기만 합니다. 어릴 때라고 해서 늘 좋고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닐텐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왜 그 시절은 꼭 마릴라 아주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설탕 바른 과일케잌처럼 달콤하고 아름답게만 느껴질까요? 시큼한 맛을 덮은 더없이 달콤한 설탕 시럽처럼, 추억은 모든 순간을 달콤하게 덮어 주는 힘이 있나 봅니다.
어제 저녁에는 많은 사람들이 집을 다녀갔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내 가족, 친지들, 친구들은 물론이고, 내가 가장 미워했던 이 조차도 주뼛주뼛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의 안부를 물어옵니다. 사랑했던 이들이야 그렇겠으나, 미워하는 이는 어째서 나의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것인지, 힘없이 누워 사람들과 겨우 눈만 맞추던 순간에도 그런 의문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 생각과 동시에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삶의 마지막에라도 내가 미워하던 이가 와서 나의 걱정을 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요. 물론 그 마음이 어떤지는 내가 알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러 온 것인지, 아니면 미워하는 마음은 여전하나 이제라도 미움을 풀어야 겠다는 다급함에서 나온 것인지, 그 내막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냥 반가웠어요. 사람의 마음이 참 약하고 여리다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삶을 살면서 다시는 얼굴조차 마주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미운 사람이지만, 막상 떠난다고 하니 서글프기도, 불안하기도, 가엽기도, 그리고 되려 미안하기도 한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저 또한 그랬습니다. 그간 눈 앞을 가렸던 미움 앞에 후회와 미안함이 앞섰거든요. 이렇게 짧은 생에, 누가 병이 났다는 소식 한 자락에 허물어지는 여린 마음을 갖고 왜 그렇게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나 싶어서 말입니다.
미안함을 안고 달려온 이들 뒤에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다립니다. 슬픈 눈으로 가만히 곁을 지키는 사람들. 나와 똑같이 하얗게 센 머리의 길버트와 다이애나도 그들 틈에 함께입니다. 길버트의 장난스러운 눈매도, 나와 함께 시를 읊던 다이애나의 낭랑한 목소리도 여전하건만 왜 시간은 흘러 오늘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토록 싫어했던 불타는 빨간머리에 파랗게 염색을 하고 뚝뚝 울던 시절이 언제인지 가물가물합니다. 이들도 내 하얀 머리카락을 보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요. 빨간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우리는 여태 함께 이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구나, 하구요.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이 낯설지 않은 나이가 되었지만, 오랜 시간 도닥거리며 살아온 이를 떠나보내는 일은 늘 힘겹습니다. 나 괜찮아, 위로의 마음을 담아 손을 꼭 쥐어보기도 하고, 눈을 맞추고 애써 웃어보려고도 했지만 어떤 것도 쉽지 않은 내 모습이 그들에게는 더욱 더 아프게 박힌 듯 해 후회가 되었습니다. 내가 떠나고 나서 그들에게 지금 이 순간조차 아름다운 추억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요? 그것이 삶을 떠나는 나의 유일한 걱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떠나야 합니다. 아마 내가 여지껏 해 보지 못한 아주 긴 여행이 되겠지요. 이 여행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두렵지만, 일단 떠날 수 밖에 없다면 마음을 굳게 먹겠다 다짐에 다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일기같기도, 편지같기도 한 유서를 씁니다. 떠나며 쓰는 이별의 편지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여행의 출발점에서 마음을 다잡기 위한 일종의 여행계획표랄까요?이 글을 누가, 언제 보게 될 지는 알수 없지만, 보는 누구에게든 내가 끝이 아닌 새로운 여행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며, 그 긴 여행을 위한 든든한 준비물로 당신들이 나와 함께 해 준 추억들을 한껏 짊어졌다는 사실을 꼭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늦었지만 이 글을 통해 당신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지금 이 편지를 읽는 당신, 그리고 그 옆의 당신들에게 감사합니다. 앞서 말했듯 생의 끝에서 만난 여러분은 하나같이 빛나고 아름다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미워했던 사람 모두들요. 그래서 생을 돌아보며 비로소 알게 되었네요. 내 삶을 이룬 모든 작고 희미하게 빛나던 순간들. 바로 당신들, 사랑, 사랑들 말입니다.
그 모든 사랑의 추억을 안고 나는 떠납니다. 아주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대들에게 받은 것들로 내 가방은 이미 그득하니 걱정할 것 없어요. 이 쓸쓸한 계절이 가고 가고 또 가면, 추위가 앉은 어깨를 쓸어 줄 봄햇살이 되어 다시 만납시다. 우리가 처음 만난 이 마을, 초록지붕 아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