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사는 이야기_2
난 야채를 싫어한다. 과일도 그닥 즐겨먹지 않는다. 이런 나를 보는 엄마아빠는 편식이 심해 큰일이다, 물도 안먹고 야채도 먹지 않고 사는 걸 보면 넌 낙타와 다름없다며 놀림 반 걱정 반 늘 한마디씩 건네곤 했다. 그 걱정이 무색하게 나름 30년 동안 잔병치레도 없이 잘 살고 있는 나를 보면서 엄마는 그러다 더 나이 들어서 큰일날 거라고 무시무시한 협박을 하지만 엄마 아빠는 모른다. 내가 내 나름대로 얼마나 건강을 챙기고 있는지, 결혼 3년차인 지금 내가 얼마나 악착같이 다양한 방법으로 야채를 챙겨먹고 있는지 멀리 떨어져 있는 엄마는 모르니까.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릴 밖에.
양심상 내가 야채를 아주 골고루 먹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눈에 띄면 쉬이 집어드는 몇 가지 야채가 있는데, 바로 양파와 가지,그리고 토마토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토마토를 원래부터 죽어라 좋아했다기보다는 몸 건강은 챙겨야겠고 그나마 거부감 없이 먹는 야채다 보니 나름 챙겨 먹는다고 하나 둘 사먹던 것이 시작이었다. 늘 과일이냐 야채냐의 분쟁의 한가운데에 있는 토마토, 각종 레시피에는 장식으로라도 한두개는 꼭 등장하는 빠알간 토마토. 내 살림을 차린 뒤 가장 자주 사 쟁여 놓는 식재료가 아닐까 싶은데, 맛 만큼이나 영양가도 만점이니 토마토만 즐겨먹어도 엄마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읊어대는 건강 습관백서 100여가지 중에 1가지는 지키고 있는 셈이 아닐까.
여하튼 이제 우리집 냉장고 야채칸의 터줏대감이 된 토마토. 토마토의 매력은 상상도 하지 못한 새로운 요리로 얼마든지 변주가 가능한 그 미묘한 풍미에 있다. 그리고 어떤 음식에 넣어도 그 음식에 신선한 향기를 더해 주기 때문에 나는 꽤 다양한 방법으로 토마토를 활용하는 편이다. 방울토마토는 간식처럼 씻어서 두고두고 먹고, 차려먹기 귀찮은 아침에는 계란과 볶아 오믈렛을 만들고, 카레를 끓일 때도 토마토 두어개를 넣어 주면 그 풍부한 즙이 곧 맛난 육수를 대신한다. 그러고도 남는 토마토는 요즘 맛을 들인 홈메이드 토마토 소스로 만들어 보관해 둔다. 이렇게 틈날 때 만들어 둔 토마토 소스는 피자에도, 리조또에도, 아니면 빵에 발라 먹는 스프레드로도 아주 훌륭하게 활용된다.
양파 두어개를 잘게 다져 올리브유를 넉넉히 둘러 팬에 볶는 사이, 다른 냄비에 물을 팔팔 끓이고 열십자로 칼집을 낸 토마토를 끓는 물에 잠깐 담갔다가 빼 껍질을 벗겨 준다. 물론 껍질은 있어도 상관이 없지만 제거하는 편이 입 안에 남는 맛이 더욱 깔끔하다. 껍질을 벗긴 토마토는 꼭지를 떼고 잘게 썰어 미리 볶아 놓은 양파와 함께 뭉근하게 끓인다. 중간에 다진마늘을 취향껏 넣고, 올리브유를 비잉 둘러주고, 그리고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맞춘 뒤 약불에서 약 20~30분간 끓여낸다. 수분 많은 토마토가 보글보글 끓으며 진한 냄새를 풍기면 이 토마토 소스로 뭘 만들면 좋을까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수분이 웬만큼 날아가고 적당히 원하는 농도의 소스가 되었다 싶으면, 파슬리 가루를 솔솔 뿌리고 냄비채로 식힌다. 그렇게 만든 토마토 소스를 밀폐용기에 옮겨담아 냉장고에 보관하면 2주 뒤쯤 꺼내어 먹어 보아도 그 신선하고 달큼한 향기는 여전히 생생했다.
여유로운 주말, 늦잠을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이불 속에서 꾸물대며 시간을 죽이고 있다 보면 부엌에서 뭔가 쿵쿵 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문을 열어 보면 남편이 피자 도우를 치대고 반죽하는 소리다. 얇게 편 도우에 홈메이드 토마토 소스를 바르고 냉장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꽁꽁 언 베이컨, 애매하게 몇 잎 남은 시금치 등을 대충 토핑으로 얹어 오븐에 구워 먹으면. 삼시세끼에서 이서진이 에릭이 만든 토마토 소스를 먹고 '토마토가 살아있다!!'라고 얘기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정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토마토의 새콤함이 톡톡 터지는 맛, 살아있는 생생한 주말 한낮의 맛이다.
이제 토마토 소스는 우리집에선 그저 그런 식재료가 아닌 달콤한 주말의 상징같은 음식이 되었다. 요 오묘한 맛을 즐기지 않는 우리 엄마같은 사람에게는 딸이 그나마 챙겨 먹는 몇 안되는 몸에 좋은 '야채' 중 하나겠지만, 둥그렇고 새빨간 토마토는 보기만 해도 싱그러운 행복의 한 형태가 아닌가. 그저 몸에 좋아서, 맛이 좋아서 좋은 음식이 아니라 주말을 위해 꼭꼭 유리병에 눌러 담아 논 신선한 여유 같은 것. 아침에 일어나 갓 배달된 우유를 쭉 들이켜는 듯한 느낌으로 우리는 토마토 소스를 만들어 먹는다. 피자로, 리조또로, 그 모양은 다양하지만 본질은 언제나 같다. 바로 토마토의 신선함, 그 신선한 여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