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인데 왜 휴직을 안 하셨어요?"
1년 전,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는 아들을 두고 휴직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주변에서는 의아하다는 듯 물어왔다. "홀로서기해봐야죠!"라며 쿨하게 대답했지만 속은 일렁였다. 사실 두세 달은 고민했었다. '휴직을 해야 할까? 내가 근무하는 학교로 데려와야 할까? 응급 상황이 생기면 어쩌지?' 무거운 마음 반면 휴직하고 싶지 않았다. 두 아이를 연달아 출산하며 4년을 내리 휴직했고 복직 후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던 터였다. 나와 달리 아이는 걱정은커녕 입학 이야기만 하면 형님 된다는 자부심으로 의기양양했다. 괜스레 불안에 휘둘리는 것 같아 각 잡고 자리에 앉아 휴직하지 않았을 때의 리스크를 적었다.
휴직하지 않았을 때의 리스크
1. 친구 엄마들과의 관계를 쌓을 수 없어 정보에 뒤떨어질 거다
2. 아이가 '나만 혼자 등교해'라고 상처받을 수 있다
3. 학교 숙제나 준비물을 꼼꼼히 챙겨주지 못할 수 있다
4. 갑자기 비 오는 날 우산 들고 달려갈 수 없다
5. 돌봄 교실 분위기가 좋지 않을 수 있다(산만하고 거친 분위기의 학교가 있음)
적고 보니 팍팍한 서울살이 대출을 등에 짊어지고 사는 내게 필수품이 아닌 기호품 같이 느껴지는 리스크였다. 근무하는 학교로 데려오는 것 또한 나의 사회생활과 아이의 작은 사회생활이 겹치는 것이 서로에게 큰 부담이 될 것 같았다. “학교에서는 아는 척하지 마라. 담임 선생님께 들으니 요즘 수업시간에 집중을 안 한다며?” 하며 단속을 할 게 분명했다.(혹 말하지 않더라도 마음속에 빙빙 맴도는 잔소리를 늘 품고 살았을 거다) 결국 휴직하지 않았고, 아이는 집 앞 학교에 입학했다. 긴 고민의 과정에서 깨달았다. 아이에게 필요 이상으로 해주는 것은 프리패스였는데 해주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에는 두드려야 하는 돌다리처럼 이유가 여럿 필요했다.
얼마 전 고참 선배님과 시간을 보냈다. 학교 이야기, 자녀 이야기 한 알 한 알 꺼내다 선배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있잖아. 나 작년부터 토요일 아침 준비는 졸업했어. 그런데 남편이 ‘나 요즘 우리 집 세 여자들 챙기느라 바쁘잖아’하면서 은근히 뿌듯해하고 좋아하는 거야” 선배님은 걱정했던 것이 무색했다는 듯 안도와 자랑스러움이 담긴 목소리였다. 주말 아침 식사를 내려놓았더니 나머지 구성원이 그 자리를 잘 메웠다는 것이다. 결혼 생활 25년간 매일 아침 된장찌개, 소고기뭇국, 계란찜 등을 올려내며 그만하기로 선언을 할까 말까 망설이던 선생님의 모습이 그려졌다. 결혼 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각자의 역할이 나뉘게 되고 한번 코꿴 일은 쉽사리 내려놓기 어렵다. 가족을 위해 봉사하던 일을 중단하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쉽지 않다.
'사랑한다면서 망치는 사람, 인에이블러의 고백'이라는 부제를 가진 책《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는 발달 심리학과 가족관계 심리학을 전공했으며 네 자녀를 둔 엄마이기도 한 앤절린 밀러가 쓴 책입니다. 부제는 ‘사랑한다면서 망치는 사람, 인에이블러의 고백’이에요. 여기서 ‘인에이블러(enabler)’는 뭔가를 할 수 있게 해 주는(enable) 사람을 뜻합니다. 가족 치료이론에 나오는 전문 용어로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뒷바라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저자는 자신이 인에이블러가 됨으로써 남편과 아이들을 불행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했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책에서 자신은 가족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가족을 무능하게 만든 인에이블러였다고 고백합니다. -<조선미의 현실 육아 상담소> 중
<조선미의 현실육아 상담소>에는 '인에이블러(enabler)'를 소개한다. 가정 안에서 헌신적으로 돕는 사람, 언뜻 좋은 뜻 같다. 하지만 '혼자 가방 챙기면 서투르고 어려워하니까 내가 도와줘야지', 'A와 놀기 싫어하니 선생님께 다른 반으로 배정해 달라고 말씀드려야겠다' 등 인에이블러는 힘들겠지만 겪어낼 수 있는 정도의 일까지 대신해주며 '멸균 환경'을 만들고자 한다. 과유불급,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는 말처럼 인에이블러는 자칫 가족 구성원을 과의존하게 만든다. 도우면 더 성장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길러져야 할 능력과 자립심이 약해진다. 이 정도만 해도 양반이다. '왜 더 안 해줘?'라는 메시지를 표현하며 감사 대신 불평이 많아지는 아이러니도 발생한다. '헌신(devotion)'이 헌신짝 된다.
독서모임으로 이 책을 함께 나누며 엄마들에게 모호한 죄책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많은 것을 해줘야 하는데 못해줬다' '가족에게 써야 할 시간을 나를 위해 썼다' '감정을 충분히 읽어주지 못했다' 이런 미안한 감정을 한껏 드러냈다. 이 책의 마지막 문구 '잊지 마세요. 당신은 충분히 좋은 부모입니다'라는 말에 새삼 감동될 정도로 평소 스스로를 부족한 부모로 평가한다. 더불어 스스로에게 쓰는 시간과 소비가 송구스럽다. 공연을 보거나 모임에 참석하는 등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고 나면 아이들에게 괜스레 미안해진다. 하지만 필수라 느껴지는 봉사의 범위를 좁히면 아이가 스스로 해낼 수 있다. 또 엄마가 스스로를 채워 더 좋은 에너지를 아이들에게 줄 수 있다. 안개처럼 모호한 죄책감에 휩싸였을 때 거꾸로 따져보는 손전등을 켜야 한다.
희생에 대한 만족에 과히 젖어있는 것도 부작용이 있다. 자신의 희생과 봉사로 배려받는 가족을 보며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는 만족에 취하는 경우가 있다. 이 또한 지나치면 가족 구성원의 의존도를 높인다. 나는 결혼 전까지 부모님 집에서 함께 살며 엄마와 친구처럼 지냈다. 전업주부로 자녀를 교육시키고 돌보시는 데 집중하셨던 삶이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늘 말씀하셨다. 이후 나는 결혼과 동시에 지방에서 서울로 옮겨 터를 잡았다.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고, 결혼 생활 적응기를 지내며 엄마를 세심히 살피지 못했었다. 얼마 전 엄마는 회상 조로 나를 서울로 보낸 뒤 당시 많이 우울했었다고 고백했다. 본인이 '빈 둥지 증후군'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딸을 일상에서 챙겨주고 보살필 일이 없어지니 허전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추일 때의 내 모습이 만족스러워 거울에 집착하는 것은 위험하다.
"아이가 교실에서 모기에 물려왔어요"
"학예회 때 왜 학부모를 초대하나요? 맞벌이로 부모님이 못 오는 우리 아이는 상처가 될 수도 있어요"
"체육시간에 왜 뛰는 활동을 해서 넘어지게 하나요?"
평범한 학교로 오는 민원 내용들이다. 진정 '학교보다 사회는 훨씬 혹독 할 텐데'라는 염려가 된다. 교육학에서 학습은 자기 수준의 +1단계에서 이뤄진다고 한다. 학습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서 아이 능력의 +1 단계의 과업을 주고 최대한 도움과 희생을 거둬들여야 한다. 많은 이들이 언급하듯 육아의 최종 목표는 '독립'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