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마음이 아파가지구.. 이거 바르면 괜찮을 거 같아가지구.."
2004년 방영되었던 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치매인 엄마 역할의 고두심 님이 마음이 아프다며 가슴에 빨간 소독약을 바르던 장면이 있다. 나이 먹을수록 티 내면 안될 마상(마음의 상처)들이 생긴다. 문제는 빨간약이 될 나만의 치료법을 찾기는커녕 더 깊숙이 숨기게 된다. 답도 없는 문제에 감정을 충분히 쓸 여유란 없다.(트렌드 2024의 핵심 키워드가 '분초 사회' 아닌가) 미주알고주알 내 안에서 따져보는 것도 큰 에너지가 쓰인다. 방어기제의 종류 중 '회피'가 있다. 직면보다 회피를 선택하는 것이 편하다. 그러니 갱년기쯤 되면 매 순간 폭발한다는 인생 선배님들의 한탄이 당연하게 들린다. 그때그때 마음에 바를 빨간약을 갖고 있는가.
P. 78~82 글쓰기로 고통을 치유할 수 있을까요? 심적으로 힘든 일이 있을 때 신경정신과나 상담소를 방문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상담자에게 공감받고 이해받는 순간 편안함과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글쓰기도 내 고통을 글로 공유함으로써 타인의 고통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성장과 치유가 됩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게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고통을 치유받은 경험이 있나요? 이런 관점에서 글쓰기와 평소의 삶을 어떻게 연관 지어 치유의 글쓰기를 할 수 있을까요?"
한 작가님이 던진 발제문이었다. 다른 질문과 달리 약간의 적막이 흘렀다.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를 읽고 10여 명의 브런치 작가들이 모인 자리였다. 2주에 한 번, 늦은 시각 온라인으로 모여 책과 삶을 나눈다. 모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게도 이 발제문이 명쾌한 답을 찾지 못하고 머릿속을 배회했었다. 처음엔 사춘기 시절 단짝 친구와 주고받던 6공 다이어리가 생각났다. 지금은 사소하지만 그때만 해도 내 인생이 무너질 것 같았던 고민들을 주저리 적으며 상처를 우정으로 덮었다. 나 자신에게 썼던 20대의 편지도 떠오른다.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이 남자와 결혼해 잘 살 수 있을지 인생의 방향성을 고민하던 순간에 누구에게도 말 못 하고 나를 달래며 적었다. 출산 후 나를 잃은 게 짙게 느껴져 잠이 오지 않을 때 '에버노트'(메모할 수 있는 사이트)를 열었다. 눈물을 보태가며 자판에 손을 놀리다 보면 잠잠해지다 이내 폭발했던 감정이 허무해졌다. 글과 어둔 감정이 조합된 기억 중 독서 모임에서 소개한 내용은 내게 진정 빨간약 처방이 필요한, 임시저장된 채 빛을 볼 날이 올까 싶은 아빠에 관한 글이었다.
아빠와의 관계에서 오는 상처는 내게 매우 고질적 문제다. 누구에게나 트라우마와 같은 상처 메커니즘이 있는 걸까? 톡 건드려지면 우두두두 떨어지는 상처 스토리가 나를 짓누른다. 결혼하고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며 예전처럼 일상적인 문제가 되진 않았다. 오히려 남편이 나를 잘 다독이며 중간 역할을 잘해주어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잊을만하면 비수같이 꽂히는 사건들은 다친 발목을 또 다치는 듯했다. 다칠 때마다 약해진 발목은 완전한 회복이 점점 더 어렵다. 상세히 쓰긴 어렵지만(쓸 수 있었다면 임시 저장 되어 있지 않았겠지?) 얼마 전 또 그 상처가 올라올 계기가 있었다. 아이들과 경주 한 달 살기 여행을 시작하는 첫날이었다. 가족들에게 어두운 감정을 전달하기 싫었고 북받치는 감정에 잠이 오지 않았다. 자판 앞에 앉아 쉴 새 없이 두드렸다. 마음 저 구석 찌꺼기까지 긁어내버리고 싶었다. 순간의 감정으로 말했을 아빠도, 늘 그럼에도 사랑하라는 엄마도, 이제 나의 울타리는 자신이라 위로하는 남편도 모두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이기적인 마음으로 날 선 생각을 배설했다. 손놀림이 잠잠해지며 마음속 노폐물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글은 임시 저장되었다.
P. 159 필자와 관계가 좋은 인물을 자기 글에 쓰는 경우는 크게 문제 될 게 없습니다. 반대 경우가 조심스럽죠. 배우자가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감정이 덩굴처럼 얽혀서 쓸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무작정 쓰면 별로 곱지 않은 이야기만 할 것 같고 그러면 한 사람을 활자로 심판하는 글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크고요. 나는 다 옳고 남은 다 그르고 그래서 나는 너무 억울하고 저 사람은 너무 나쁘고. 선악 이분법에 갇힌 글을 쓸 거 같았어요. 내게 그럴 자격이 있는가. 그 인물에게 꼭 그런 면모만 있을까. 여러분이 고민하는 지점도 바로 이런 '단순화의 위험'이 아닐까 싶어요.
은유 작가는 나쁜 감정에 얽힌 사람을 '행위 중심'으로 쓰라 한다. 감정을 최대한 빼고 있었던 일을 사실 중심으로 적으라 한다. 그 인물을 내 감정선의 연장으로 단순하게 보지 말고, 여러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보라 한다. 글쓰기가 '서사의 편집권'을 갖게 되는 것이므로 최대한 공정하게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말한다. '그에게 내가 모르는 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가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게 된 디테일한 상황은 무엇이었지? 그럼에도 그에게 좋은 점들이 있지 않나?' 내가 임시 저장된 글에 던져야 할 질문이다. 글을 오픈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런데 아직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다.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오히려 생채기가 될 것 같다.
사실 내가 지닌 상처는 세상에 내어 놓아 그 무게를 순위 매겼을 때, 저 뒤에 있을 만한 일이다.(물론 내겐 세상 그 어떤 일보다 묵직하다.) 그런데 앞순위 어딘가에 있을만한 일들도 책으로 나온다. 학교 폭력 피해자, 친족 성폭력 피해자 등 말도 못 할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은유 작가를 통해 인터뷰하고 그 내용이 책으로 나왔다. 작가는 글쓰기로 고통을 씻겨내고 극복하는 게 아니라, 내 고통을 글로 '공유'함으로써 타인의 고통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성장과 치유가 된다고 한다. 단순히 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나누면서 공감과 위로로 소통하는 것이 치유라는 것이다. 첩첩산중이다. 임시 저장에 들어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불편한데 공적 글쓰기의 자리에 올려놓아야 한다니. 속이 시원해지지 않아 글로 상처가 치유된다는 이 챕터를 여러 번 읽었다. 읽으며 고통과 상처가 글을 통해 역기능에서 순기능으로 전환되는구나 싶었다. 다른 이의 빨간 약이 됨으로써 내 빨간약이 되는 것이다.
얼마 전 경주 시골 마을에 있는 '누군가의 책방'이란 독립서점에서 <오늘은 일기 말고 에세이를 쓰겠습니다>라는 책을 낚아왔다. 책에서 글을 왜 쓰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나를 알기 원한다면 일어나지 않은 상황을 가정하며 시험대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지난 나의 행동과 감정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떤 환경과 사람들을 지나왔는지, 그러한 과정에서 나는 어떻게 반응해 왔는지를 아는 것은 자신만의 고유한 지도를 완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글을 쓰는 목적은 나를 면밀히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고로 상처와 고통을 글로 쓴다는 것은 '아픈 나'도 나만의 지도 어딘가에 표기하는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욕심을 부리는 것이라 생각하니 내가 좀 그럴싸해 보인다.('사서 고생'을 즐기는 타입) 글로 상처를 풀어내어 조금 더 멋있어져 볼까?
임시 저장된 글을 잠시 열었다. 그날의 폭풍이 어땠는지 느껴졌다. 바로 수정해서 발행할 용기는 나지 않는다. 그래도 언젠가 글로 잘 풀어내 볼 마음이 생겼다. 삶에서 뒤늦게 상처를 꺼내는 많은 이들을 보며 지독하게 아픈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평화를 위해 혹은 분주한 삶에 어느 것 하나 얹기 싫어서 구석으로 몰아 놓은 상처가 눈덩이를 넘어 눈사태로 온다. 우리에겐 덧나지 않게 소독해 줄 인생의 빨간 약이 필요하다. 당분간 내 빨간 약은 글쓰기가 될 것 같다. 따끔거릴 것이 예상돼 긴장되고 거부하고 싶은 마음을 뒤로하고 과감히 움직여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