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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유 보다 분유

호르몬을 이겨내기

by 커피콩


저 멀리 외국에 있는 친구에게 카톡을 보낸다.


“아무래도 나이 탓인가 봐. 모유가 잘 안 나와.”


답장이 온다.


“우리 나이에 모유 먹이는 거, 꼭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 애쓰지 마.”


그렇지. 친구의 말이 맞다. 그런데 쉽사리 포기할 수는 없다. 일단 조금 더 노력해 보기로 한다.


돌아보니, 그때 나는 극도로 넘치는 호르몬의 영향을 받는 산모였고,


나는 호르몬의 지휘를 순순히 따르고 있었던 것 같다.





호르몬의 영향 1


의사 세 분이 번갈아 오고, 잘못하면 제왕절개를 해야 할 수도 있다는 말에 긴급 수술대기까지 하게 되었다.


결국, 집게로 뽑아낸 내 아이는 머리가 뾰족하고, 쇄골이 부러졌으며, 눈에 핏줄이 터져 있었다.


아이를 낳고 나자 무통주사 덕분에 낳을 때는 모르던 아픔이 시작되었다.


일어서고, 눕고, 내 몸을 내 마음대로 다루는 것이 쉽지 않다.


산모 방석에 앉으니, 조금은 나아진 기분이다.


이젠 산모들에게 필요한 모든 물건들이 너무 고마워진다. 내가 기댈 곳은 이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호르몬의 영향 2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나흘쯤 되었을까.

남편이 "오늘은 집에서 자고 올게"라고 말하고 나갔다.


커튼 밖을 슬쩍 바라본다.

3월 말, 새싹이 돋은 나뭇잎들 꽃들이 보이지만, 예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가 우울하니까, 남편의 힘듦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울이 내 마음에 조용히 다가온다.









호르몬의 영향 3


연락이 온다. 아이 사진을 찍을 수 있고, 품에 안고 체온을 느끼며 모유를 먹일 수 있는 시간이다.


아이를 안아보지만, 아직 우리 둘은 어색하기만 하다. 나와 닮은 곳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밥도 열심히 먹고, 모유가 잘 나온다는 차도 마시고, 마사지도 하며 노력해 본다.


그런데도 모유는 안 나온다.


제발, 모유 수유라도 한 달만이라도 해보고 싶다!


도전하는 마음이 불타오르지만, 유축기로 노력해 봐도 결국 헛수고 같다.







호르몬의 영향 4


눈물이 한없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많이 울고 나서, 수유의 부름을 받아 아이를 안고 산모 방석에 앉았다.


나는 모유를 먹이고 있는 엄마들을 흘끔흘끔 본다.


간호사는 나의 '부어오른 눈'을 흘끔흘끔 본다.


아무도 없을 때를 기다려, 나에게 말을 건넨다.


"모유 안 먹여도 괜찮아요. 튼튼하게 잘 자랍니다. 내 딸도 분유만 먹여 키웠는데 손주 녀석이 아주 건강하게 잘 크고 있어요. 너무 애쓰지 마세요."


연세 있는 푸근한 어른의 말씀에 위로를 받아, 눈물이 다시 차오른다.







돌아보면, 그때 나는 흔들리는 나뭇잎에도 마음이 흔들렸다.


평소 감정을 잘 다스린다고 자부했지만, 그때는 전혀 그럴 수 없었다.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특히 눈물은 제어가 되지 않았다.


아이를 낳은 몸이니, 평소와는 다르게 흐르는 호르몬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아이를 안고, 커튼 밖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엄마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나는 그 엄마들을 십분, 백분 이해한다.


나도 경험해 보았으니까.


무게는 다르겠지만, 나의 무게에는 나이까지 더해져서, 죄책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비빌 언덕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친한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모유 포기해야 할까?”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나를 살릴 수 있는 말이 돌아온다.


“요즘 분유가 얼마나 좋은 줄 아니? 아이에게 좋은 걸 줘야지. 너의 모유가 더 안 좋을 수 있어”


그 말을 핑계 삼아 나는 조금 더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운을 되찾았다.


분유 성분을 체크하면서, "역시 우리나라 사람에겐 우리나라 분유가 최고야!"라고 외쳤다.


분유병을 오래 들고 흔들 힘도 있었고, 온도 체크, 먹이고 트림시키기 모두 문제없이 해 냈다.


우리 꼬맹이는 이제 7살이 되었다(이제 여섯 살이라고 해야 하지만, 나에게도 나이를 어리게 말하는 게 중요하듯, 꼬맹이도 그런가 보다). 여전히 본인은 일곱 살 형님이라고 외치고 있다.


건강하게 자라며, 가벼운 감기나 열은 혼자서 이겨내고, 발차기가 특기다.


매일 쑥쑥 크며 보여주는 새로운 모습에 놀라고 그저 뿌듯하다.


돌이켜보면, 그때 내가 그렇게 애쓰던 순간들이 모두 지금의 이 순간을 만들었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내 마음도 함께 자랐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 아이도 컸지만, 내 키가 더 자랐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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