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대 프로포절/디펜스 비서의 역할과 존재 이유
북경대 대학원의 프로포절 및 디펜스에는 모두 ‘비서’ 업무를 맡는 학생들이 있다. 구체적인 업무 내용은 각 단과대학과의 분위기나 선후배 간 전통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프로포절/디펜스를 마치고 학과 사무실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에 회의록 요약본을 첨부해야 하기 때문에 공통적으로 비서가 회의 기록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 국제관계학원의 경우에는 비서가 선배의 서류를 모두 취합 및 정리해서 학과 사무실에 제출하는 역할도 한다. 중문과와 인류학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쪽은 ‘자기의 서류는 자기가 스스로! ’라는 분위기라 서류 취합을 후배에게 맡기지 않는 편이라고 한다. 우리 지도교수님 아래에 있는 제자들의 경우에는 서류 취합 및 제출은 물론이고 회의실 예약, 회의 후 식사 장소 예약, 회의에 참석하신 교수님들께 회의 전 안내, 회의 후 서명 요청까지 비서가 맡아서 한다. 다시 말해 회의와 관련된 모든 소통 및 준비 과정 그리고 서류 처리까지를 모두 비서의 업무로 여긴다.
업무 내용이 모호하기는 하지만 역할 자체는 물론 암묵적인 관행이 아니라 공식적인 역할이 맞다. 프로포절/디펜스 전에 비서 역할을 맡을 학생은 학과 사무실에 가서 어느 학생의 비서가 될 것이라고 시스템에 등록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학교 포털에서 업무와 관련된 접근권한을 얻을 수 있다.
회의록 작성부터 서류 취합
자잘한 소통과 준비까지
업무 내용이 다소 모호하기는 해도
'비서' 역할 자체는 공식적
나는 그동안 박사 선배 A의 디펜스 비서, 또 다른 박사 선배 B의 예비 디펜스 및 디펜스 비서, 석사 후배 C의 디펜스 비서를 맡은 경험이 있다(박사 선배 A와 B의 비서는 중국인 동기와 함께 맡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또 다른 박사 선배 D의 프로포절 비서도 맡아보게 되었다. 여태까지 도합 다섯 번 비서를 맡아본 셈이다. 사실 나의 좁은 식견이기는 하지만 외국인 유학생이 이렇게 여러 차례 중국어로 이루어지는 디펜스/프로포절의 비서를 맡아보는 일은 흔하지 않다고 알고 있다. 중국인 학생이 많은데 굳이 외국인 학생을 비서로 지명해서 언어로 인한 오류, 중국의 업무 처리 과정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는 리스크를 짊어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영어 과정의 경우에는 외국인 학생들이 비서를 맡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마찬가지로 언어라는 요인 때문인 것 같다.
외국인 유학생인 내가 다섯 차례나 중국어 과정의 비서 일을 맡아보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나의 지도교수님은 지도하는 학생이 많으시다. 석사와 박사과정을 합쳐서 한 해에 졸업하는 학생이 일 년에 최소 여섯 명 정도 있다. 이들 학생들이 프로포절, 예비 디펜스, 디펜스를 할 때마다 비서가 필요한데 중국인 학생들에게 모든 비서 업무를 맡긴다면 그 학생들의 업무량이 너무 많아진다. 자연스레 외국인 학생인 나에게까지 비서 업무가 돌아오게 된다. 게다가 앞서 이야기한 박사 선배 A, B와 석사 후배 C는 모두 한국인 유학생이었다. 교수님께서 이들의 비서를 맡을 학생으로 같은 한국인 학생인 나를 떠올리시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외국인 유학생이
중국어 과정 학생의 비서를 맡는 경우는 적은 편
반면 영어 과정 학생의 비서를 맡는 경우는 적지 않아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들 법도 하다. 애초에 비서라는 역할이 왜 필요한 걸까? 앞서 이야기한 비서의 역할 중에서 사실 프로포절/디펜스에 참석하는 학생 본인이 스스로 맡아서 하지 못할 만한 일은 없다. 회의 기록이 필요하다면 따로 기록인만 구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왜 굳이 후배를 선배의 비서로 지명해서 프로포절/디펜스에 따르는 업무를 맡아보게 하는 문화가 있는 것일까? 그동안 비서 일을 맡아보면서 나 또한 수 차례 가졌던 의문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경험과 교류’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북경대의 행정처리는 학생들에게 무척이나 비우호적이다. 모든 행정처리가 수많은 서류와 서명으로 점철되어 있어 학생들을 지치게 하는 것은 기본이다. 처리 과정에서 의문점이 생겨 공지를 보면 도리어 머리에 무수한 물음표가 돋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덤이다. 학생의 졸업과 직결된 프로포절/디펜스 또한 예외가 아니다. 많은 서류를 준비해야할 뿐만 아니라 정확히 안내되지 않아 모호한 부분은 부딪히고 물어보며 해결해나가야 한다. 선배의 비서가 되어 직접 경험해 보거나 최소한 어깨너머로라도 지켜본 경험이 없다면 프로포절/디펜스를 해야 하는 당사자가 되었을 때 당황스러울 수 있다.
게다가 특히 박사생의 경우 프로포절/디펜스에 연구를 전문적으로 평가해줄 수 있는 심사위원들을 모시게 된다. 같은 지도교수님 아래에 있는 제자들이라면 연구 방향에 공통점이 많기 때문에 선배의 프로포절/디펜스 때 참석했던 교수님이 후배의 프로포절/디펜스에 또 참석할 가능성이 높다. 이때 후배가 선배의 프로포절/디펜스 때 비서를 맡았었다면 이미 해당 교수님과는 구면이 되는 것이다. 교수님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프로포절/디펜스와 관련된 교류를 하기 편리하고, 교수님께서 선배의 프로포절/디펜스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이미 듣고 기록해 보았기 때문에 교수님의 성향도 어느 정도 알고 준비할 수 있다. 물론 교수님들뿐만 아니라 프로포절/디펜스에 참여하는 선배와도 교류를 하고 관계를 쌓을 수 있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프로포절/디펜스나 학업과 관련해서 궁금한 점이 있으면 선배에게 물어볼 수 있고, 선배의 서류를 취합하고 정리하면서 나도 미리 어떤 준비를 해야겠구나 하는 감도 잡을 수 있다.
북경대에 비서라는 역할이 존재하는 이유
바로 '경험과 교류' 때문
그래서 이러한 이유로 북경대 프로포절 및 디펜스 과정에는 비서라는 역할이 존재하는 것 같다(중국 대학원에 모두 비서라는 역할이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다른 학교의 상황은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비서는 프로포절/디펜스 당사자와 많은 교수님들, 그리고 학과 행정실 사이에 끼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모두 상당히 고된 역할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만큼 얻는 것도 많으니 기회가 생긴다면 배우는 마음으로 기쁘게 임하면 좋을 것 같다. 물론 유학생활 중에 비서 역할을 맡아보지 못했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유학생이 비서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능력이 특출 나거나 교수님께 인정받아서라보다는 단지 여러 조건이 맞아서 그렇게 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방청이 허락된 선배들의 프로포절/디펜스에 찾아가서 부지런히 보고 듣고 배운다면 다른 유학생 선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꼭 비서 일을 해 보지 않더라도 프로포절/디펜스를 잘 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