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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별반짝 Aug 15. 2019

오늘, 어른의 세계를 보았다.

인턴인 나는 어깨너머로 본 세계에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음? 그분들이 거길 오신다구요?"


통화 중이던 상대방에게 반문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그분들이 오시면 안 되는데요. 저희가 준비한 행사 내용에 차질이 생깁니다."


수화기 너머 상대방이 무언가 이야기를 하는지 팀장님은 잠시 말이 없었다. 가만히 듣던 팀장님은 결국 "제가 직접 연락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우리 사무실은 최근 몇 가지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팀장님과 다른 직원분들이 함께 진행하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하나의 프로젝트만은 기획부터 실무까지 팀장님이 직접 진행하고 있었다. 투입되는 자금으로 보면 다른 프로젝트에 비해 그렇게 규모가 큰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의 기업들을 1:1로 매칭 해주는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잘 된다면 양측 기업에게 실제로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팀장님은 근 한 달 내내 이 프로젝트 준비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한-중 기업이 상견례를 하는 날이 드디어 2주 후로 다가왔다. 그래서 팀장님은 오늘 하루 종일 관련 업체에 전화를 돌려 모든 계획에 차질이 없는지 최종 점검을 하고 있다.


팀장님은 이 프로젝트의 총감독과 다름없었다. 조금 전 통화 내용처럼, 팀장님이 오늘에서야 처음 듣는 소식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팀장님 쪽에서는 잠시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곧 전화기 다이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직감한 나도 다시 한번 귀를 쫑긋 세웠다. 이번에는 중국의 정부 기관이었다.


"我这边听说是你们让00公司去都参加四个活动?
(제가 듣기로는 정부 쪽에서 00 기업에게 네 개의 활동에 모두 참가하라고 하셨다면서요?)"


팀장님은 상대방의 대답을 들은 뒤 계속 설명했다.


"这样不行。我们呢,我们安排每个中国企业跟韩国企业一对一见面。如果莫一个企业过来都参加四个活动的话,不能这样一对一进行面谈,就不能谈实际上的合同内容,比方说价格、合作条件等等。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저희는 모든 중국 기업이 한국 기업과 일대일로 만날 수 있도록 스케줄을 짰어요. 만약 어떤 기업이 네 개의 자리에 다 온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가격, 협업 조건과 같이 실제 계약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기 힘듭니다.)"


아, 그제야 나도 어떤 상황인지를 이해했다. 우리가 스케줄을 어떻게 짰는지, 상견례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는 중국 정부 쪽에서 어떤 한 기업에게 모든 상견례 자리에 다 가보라고 이야기해 준 모양이었다.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행사는 엉망진창이 될 터였다. 우리 측에서는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기 위해, 그리고 매칭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1:1로 스케줄을 짰는데, 한 기업이 욕심을 부린다면 행사 전체가 소득 없이 끝나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정부 쪽에서는 상황을 납득한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은 팀장님은 곧장 또 다른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네 개의 상견례 자리에 모두 오려고 하는 그 업체였다. 그런데 이 업체는 정부와 다르게 쉽게 상황을 납득하지 못했다. 아니면 상황을 납득했는데도 고집을 부리는 것 같았다. 통화가 계속 길어졌다. 팀장님은 고집을 부리는 업체에게 이 프로젝트의 취지와, 진행 목표와, 전체 상황을 하나씩 설명해 주며 설득하고 있었다. 상대 업체의 고집에 듣고 있는 내 심장이 다 쿵쾅거렸다.


업체 담당자는 급기야 다른 중국 기업들이 누구냐고, 무슨 기준으로 배정을 한 거냐고 따지고 드는 모양이었다.


"我向韩国企业提供了中国企业的名单,然后问他们先愿意跟哪个企业进行合作面谈。我是按照他们的需求安排这次面谈的。
(한국 기업에 원하는 업체를 물었습니다. 중국 기업 명단을 제시한 뒤 이야기를 진행해보고 싶은 기업을 고르라고 했어요. 그걸 바탕으로 1차 상견례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배정한 겁니다.)"


1초간 정적이 흘렀다. 팀장님도, 상대 업체도 말이 없었다. 팀장님은 말을 이었다.


"所以呢,你们按照我们的安排过来参加就应该没问题。反而这样做的话能够达到协议的可能性更大。
(그러니까 저희가 배정한 대로 참여하시면 문제없을 겁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시는 편이 협의에 도달할 가능성이 더 큰 거예요.)"


상대방은 드디어 납득한 모양이었다. 몇 마디 말이 더 오간 뒤 팀장님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곧이어 '후우...'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덩달아 조그맣게 휴, 하고 한숨이 나왔다.




이 프로젝트는 팀장님이 책임자, 즉 '총감독'이다. 자금을 조달하고 결과를 보고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내가 그린 그림이 반드시 나와줘야만 할 것이었다.


지난 한 달간 팀장님이 백지에서 시작해서 어떻게 이 프로젝트를 그려 왔는지 나는 어깨너머로 계속 지켜봐 왔다. 윤곽을 잡고, 업체를 섭외하며 디테일을 그리고, 색을 입히는 과정은 수많은 사람이 얽혀 있기에 더욱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이제 거의 완성 단계에 다다른 이 작품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나 팀장님이 원치 않는 그림이 되어 버리려는 찰나였다. 이 변수를 제거하고 다시 내가 원하는 이야기로 끌어가기 위해, 어디로 전화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팀장님은 알고 있었고, 훌륭하게 해냈다. 나였다면?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치면 나는 언제나 가장 먼저 막막함을 느끼지 않던가.


이런 상황에서 소통의 창구를 찾아 내 상황을 차분히 설명하는 것. 상대방의 의사를 바꿀 수 있을 때까지 설득을 이어가는 것. 내가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상대방과 상호작용하며 내 생각과 주장을 이야기하는 것. 이런 담백한 그러나 효과적인 설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어떤 마인드셋일까?


오늘 팀장님이 내게 보여준 것은 묵직한 그리고 끈질긴 설득이었다. 그 어깨 위에는 '책임'을 짊어지고 있었다. 너무나 쉽게 분노하며 빠르게 포기해 버리기 일쑤인 나와는 다른, '어른의 모습'이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나의 가벼움이 부끄러워 슬쩍 등 뒤로 숨겨 보았다. 어른이란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둥글게 맴돌았다.









*혹여나 제 글이 프로젝트나 사무실 분들께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이에 글을 쓸 때 실제 사건에서 일부 내용을 각색하였음을 밝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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