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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별반짝 Aug 17. 2019

조선족의 말씨에 관한 한 토막의 생각

많은 이들이 '조선족 말투'를 들으면 귀도 마음도 닫아버리지만


“아, 가을 다 됐다!”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길. 빌딩 입구를 나서며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참 신기했다. 8월 8일 입추가 지나자마자 북경에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 대리님 한 분이 잠자리 한 마리를 발견했다.


“어? 잠자리다!”


우리는 “우와, 벌써 잠자리가 날아다니네”라며 저마다 신기해했다. 나는 어릴 때 보았던 잠자리 떼가 생각났다. 가을 무렵이 되면 꼭 아파트 놀이터의 그네 위로 잠자리 떼가 새카맣게 모여들었다. 매년 거기를 맞선 장소로 하자고 잠자리들끼리 약속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또 그 아래에는 언제나 폴짝폴짝 뛰며 제 키보다 큰 잠자리채를 잠자리들을 향해 휘젓는 아이들이 있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자 대리님들 그리고 부장님이 까르르 웃었다. 네 분 모두 우리 사무실의 조선족 사원분들이다.


“어릴 때는 살금살금 다가가서 손으로 잡기도 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무서워서 만지지도 못하겠어요.”
“종류도 진짜 많았어요. 고추잠자리랑, 실잠자리랑, 그 날개에 얼룩이 있는 점박이 잠자리도 있었어요.”


대리님들이 저마다 잠자리 이야기를 한 토막씩 얹었다. 그때 부장님이 불쑥 이렇게 묻는다.


“근데 다들 잠자리를 ‘잠자리’라고 불렀어요? 우리는 ‘소곰재’라고 불렀는데.”


‘소곰재’. 잠자리의 함경도 방언이다. 부장님은 뿌리를 함경도에 둔 조선족이다. 중국의 조선족은 크게 경상도 출신과 함경도 출신으로 나뉜다. 이들은 한국어를 할 때의 억양이 서로 다르다. 비록 젊은 세대들은 이제 경상도 땅도 함경도 땅도 아닌 중국 땅에서 나고 자랐지만, 핏줄을 따라 고스란히 조상이 쓰던 사투리를 물려받았다.


한국에 지역에 따라 다양한 사투리가 있는 것처럼 북한도 마찬가지다.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에게는 평양 말이 참 온화하게 들린다고 한다. 함경도 사투리는 문장을 간결하게 끝맺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말을 툭툭 던지는 느낌이 든다. '-한다', '-합디', '-았디', '-했지비', '-합세', '-함매', '-했소?' 같은 어미를 쓴다.


"함경도 말에는 '~습니다'라는 표현이 없어요. 저도 20년 전에 처음 한국 사람을 만났을 때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묻는 말에 '네'라는 대답만 했어요. '한국말'을 할 줄 모르니까 무슨 오해를 살까 두려워서요."


부장님이 배시시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누구보다도 부드러운 말씨를 갖고 계신다. 말에 온화함이 베어 나온다.


물론, 가끔 서울 사람이 듣고 보기에 조금 걸리는 표현들이 있기는 하다. 언젠가 부장님이 자리에서 나를 부르신 적이 있었다. 얼른 달려가 보니 한국 분과 메신저로 소통하고 계시는 중이었다. 내가 부장님께 전달해 드린 자료에 관해 설명해주고 계시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표현하면 저분이 이해하실까요?"라고 물으셔서 메신저 창을 들여다보았다. 틀린 표현은 아니었지만 물 흐르듯 부드러운 표현도 아니었다. 딱딱한 느낌,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퉁명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이라면 어미를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다. 격식체인 '-습니다', '-입니다'와 비격식체인 '-이에요', '-해요'는 원래 화자와 나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 따라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 계속 쓰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한 덩어리의 말속에서 두 가지 어미를 섞어 쓰기도 한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메일을 주고받을 때도 격식체만 사용하면 딱딱한 느낌을 준다. 덜 공적인 내용은 비격식체를 이용해서 표현해 주면 사무적인 느낌을 덜어낼 수 있다. 이를테면 메일 말미에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와 같은 표현을 비격식체로 써주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어가 유창한 조선족이라고 해도 이런 격식체와 비격식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기는 어렵다. 한국어를 잘하는 중국인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들의 말은 안전하게 격식체만 계속 사용해서 딱딱한 느낌을 주거나, 혹은 엉뚱하게 비격식체를 사용해서 예의 없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것에 익숙지 않은 한국인은 조선족과 한국어로 소통하다가 상대방을 오해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조선족, 또는 외국인의 한국어에 대해서 우리의 포용이 필요합니다'라고 제안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한 번 짚어보고 싶은 부분은, 상대방의 말씨와 그 사람의 진심이 늘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고객 응대를 위한 상냥한 말씨가 항상 진심 어린 존중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듯이. 퉁명스러운 말씨가 항상 못된 됨됨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듯이. 그래서 나는 말의 내용이 아닌 말의 소리로 상대방의 본질을 단정 짓는 것을 경계하자고 말하고 싶다.


나는 우리가 때로는 우리가 받는 느낌 그 너머를 한 번 들여다보았으면 좋겠다. 왜 이러한 느낌을 받았는지 이 느낌을 꼭 안고 가야 하는지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씨가 어색하고 듣기 거슬릴 수 있다. 그러나 그 느낌이 낯선 억양, 내가 속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것과 다른 표현 방식 때문이라면 상대방의 본질을 보기 위해 그 느낌을 잠시 접어둘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하는 우리의 노력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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