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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별반짝 Sep 03. 2019

"집에 돈이 좀 많나 보구나"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저 선생님 마음 이해할 수 있어요.


손님 한 분이 북경에 오셨다. 환영회를 열어드리기로 했다. 중국에 오셨으니 맛있는 중국 음식을 대접하기로 하고, 좋은 식당을 한 군데 예약했다.


금요일 오후 여섯 시, 환영회 시간이 다가왔다. 우리는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예약한 식당에 도착했다. 보름달처럼 크고 둥근 테이블과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가장 높은 분부터 차례대로 안쪽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다른 분들이 앉는 것을 본 후에 나도 자리에 앉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들이 둥근 테이블 선을 따라 차례대로 놓이고 잔마다 환영주가 채워졌다. 금방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초점은 자연스럽게 손님께 맞추어졌다.


그 분은 중국어 발음이 정말 좋았다. 내 옆에 앉은 조선족 대리님께서 내게 속삭이셨다. "진짜 잘하시네요. 발음이 중국인 같아요. 최소한 조선족. 모르고 들으면 외국사람이라고 생각 못할 것 같아요". 누군가 중국어를 어떻게 공부하느냐고 물었다. 방송통신대학교에서 중국어를 전공하셨다고 했다.


손님께 이런 질문 저런 질문을 하며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제는 차례대로 우리 소개를 할 차례가 되었다. 내 차례가 마지막으로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인턴사원 ***이라고 합니다. **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렸다. 그 분은 "어이구, 그래요"하셨다. 사무실 분들께서 한 마디씩 칭찬을 얹어 주셨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 분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집에 돈이 좀 많나 보구나."


나지막하게 새어 나온 말.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그 말은 오직 나 한 사람만을 찾아와 귀를 두들겼다. 다시 음식이 나오고 건배가 시작되었다. 나는, 나는... 무언가 말을 했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무엇이었을까? 그때 하고 심장을 치고 지나갔던 그 느낌은.


회식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나는 계속해서 그 느낌을 되감아 보았다. 한 덩어리라고 생각했던 그 감정은 자세히 들여다보니 패스츄리처럼 여러 겹의 감정이 중첩되어 있었다. 나는 서운했고, 안타까웠고, 그리고 마음이 아팠던 것이었다.




내 생에 처음으로 외국 땅을 밟았던 것은 2016년 9월이었다. 중국 란저우로 어학연수를 갔다. 중국 교육부에서 장학금을 준 덕분이었다. 그들은 학비와 숙소비, 그리고 다달이 소정의 생활비까지 지원해 주었다. 다만 비행기표는 지원해 주지 않아서, 란저우까지 가는 40만 원짜리 비행기 표를 사기 위해 나는 4학년 1학기 기말고사 기간에도 아르바이트를 나가야 했다. 그 돈으로 비행기표도 사고, 중국에 가서 쓸 생필품도 사고, 초기 정착비로 쓸 60만 원도 모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챙겨 주신 60만 원을 더해 총 120만 원을 들고 란저우로 갔다.


란저우로 향할 때 내 인생은 수많은 패배로 점철되어 있었다. 마음에는 덕지덕지 갯벌 진흙이 발라져 있는 것 같았다. 뭘 해도 깨끗해지지 않을 것 같은 얼룩진 마음을 안고 살았다. 그런데 란저우, 그 조그만 도시에서는, 그런 나를 처음 보는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너무나도 환영해 주었다. "한궈 꾸냥~", '한국 아가씨'라고...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이를 드러내 보이며 수줍은 듯 씩 웃었다. 타지에서 온 사람이라면 같은 중국인이라도 못 알아듣는 란저우 사투리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다. 필사적으로 중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포기와 패배로 점철된 삶에서 이제 더 물러설 곳은 없다고 생각했다. 또 한 번 관성처럼 패배의 기록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매일 새벽 4시에 벌떡 일어나 학교로 달려갔다. 자습을 하다가 9시가 되면 수업을 갔다. 점심시간에는 왼손에 햄버거, 오른손에 연필을 들고 끼니를 때우며 책을 봤다. 점심을 먹고 다시 학교로 가는 길에는 중국어 듣기 파일을 중얼중얼 따라하며 걸었다. 인사말밖에 할 줄 모르던 나는 여덟 달 만에 중국어 시험 최고 등급인 6급 자격증을 손에 쥐었다.


란저우에 있는 열 달 동안 중국 교육부에서는 한 달에 3000위안(한화 약 50만 원)의 생활비를 줬다. 나는 그중에 절반을 생활비로 쓰고 나머지 절반은 꼬박 모았다. 몇 달이 지나고부터는 시 중심에 있는 한국어 학원에 이력서를 뿌려서 두 군데의 학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자리를 얻어냈다. 통장에 300만 원의 돈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나는 다시 중국으로 가야만 했다. 중국이야말로 나에게 성취의 기억을 안겨준 곳이었다. 연속된 패배로 지쳐있던 나에게 역전의 기회를 준 곳이었다. 나는 한국에 마음을 붙이기 어려웠다. 그때 나의 유일한 희망은 중국이었고, 내가 계속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시 한번 중국 정부로부터 장학금을 받는 것이었다.




란저우에서 돌아온 직후 나는 중국 대학원에 지원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일자리를 구했다. 대학원에 합격한다고 해도, 전액 장학금의 문턱은 너무 높았다. 부분 장학금을 받게 되면 생활비를 모두 자비로 감당해야 할 수도 있었다. 혹은 생활비와 숙소비를 전부 짊어져야 할 수도 있었다. 돈이 필요했다.


남은 일 년 동안 계속 중국어를 쓸 수 있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곳. 면세점이었다. 집은 인천에 있었다. 인천공항 면세점으로 출퇴근하기 시작했다. 오전 근무조인 날은 퇴근하고 오후에 대학원 원서를 썼다. 오후 근무조인 날은 오전에 대학원 원서를 쓰다가 출근했다. 쉬는 날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스타벅스에 돌멩이처럼 앉아 원서에 매달렸다.


그 안에 나를 고스란히 담아 넣었다. 꾹꾹 눌러 담고 또 눌러 담았다. 장학금 신청 원서만 서른 장이 나왔다. 왜 중국이어야만 하는지? 왜 계속 공부를 해야만 하는지? 왜 내게 장학금이 필요한지? 장학금을 받아 나는 무엇을 공부할 것인지?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이며,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될 것이고, 중국과 한국과 사회와 사람들에게 각각 어떤 기여를 할 것인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제된 언어로 담아냈다.




2018년 7월 25일 수요일 밤 7시 30분. 나는 인천공항의 한 탑승 게이트 맞은편에 서 있었다. 정확히는 면세점 매장 카운터에 서 있었다. 하늘 꼭대기에서부터 검푸른 물감이 흘러내리는 시간. 이 시간에 공항은 참 아름다웠다. 미처 저물지 못한 노을이 아직 땅 끝에 남아있는데, 검푸른 어둠이 쏟아져 내려오고, 활주로 곳곳에는 오렌지빛 등들이 불을 밝힌다. 공항 면세점에서 물건 파는 일을 시작한 지 열 달 째였다.


나는 두려웠다. 다른 학교는 속속 장학금 발표가 나는데, 이 학교만은 결과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학교 합격증만 받고 장학금에 대해서는 아직 어떤 확답도 얻지 못했다. 가장 무서웠던 것은 내게 그 어떤 장학금도 주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면 나는 이미 내 손안에 들어온 진학의 기회를 이제 내 손으로 포기해야 했다.


공항은 수요일에 가장 한산하다. 한 주가 시작하며 바삐 출장을 가는 사람들도, 한 주를 마치며 행복하게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없기 때문이다. 몇 시간째 아무도 매장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영수증 종이를 조금 끊어 '생존'을 위해 얼마가 필요할까 계산해 보았다.


8시. 노트에 재고 수량을 기록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잠시 돈 계산을 멈추고 일에 집중했다. 재고 확인이 끝났다. 노트 한 구석의 빈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의 내 마음을 그 공간에 털어 넣었다.


'무섭다. 그래도 괜찮다. 힘들겠지만 해낼 수 있다.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자'.




2018년 8월 13일 월요일, 오후 2시. 장학금 결과는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명동의 한 면세점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면세점에서 일하고 있는 덕분에 면세품을 더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었다. 나는 중국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물건을 몇 개 주문받을 생각이었다. '많이는 아니더라도 10만 원 정도는 벌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운이 좋으면 조금 더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스, 맥, 디올, 샤넬, 입생로랑...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를 한 바퀴 살피며 사진을 찍었다. 오후 3시. 대학원 신입생 단톡방에 학생회장의 톡이 올라왔다. '장학금 결과가 나왔습니다. 홈페이지 확인해 보세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이었다. 인터넷 창을 열었다. 인터넷을 켜면 언제나 첫 번째로 장학금 페이지가 열렸다. 새 글이 올라와 있었다. 제목을 읽지도 않고 클릭했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영어 이름들이 즐비했다. 알 수 없는 알파벳의 조합들 속에서 익숙한 조합이 눈에 들어왔다. 내 이름이었다. 머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왈칵 눈물이 터지는 것이 빨랐다. 머릿속이 빨갛고 뜨거운 물감으로 뒤덮이는 느낌이 들었다. 근처 화장실로 달려갔다. 문을 걸어 잠그고 변기 앞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한참을 울었다. 울고 또 울었다. '갈 수 있네, 진짜 갈 수 있네...' 스스로를 향해 그 말만 수백 번을 건네고 또 건넸다. 긴 기다림과 오랜 두려움으로 바스러질 듯 약해져 있던 마음을 쓰다듬었다. 이제 됐다고, 안심하라고 보듬어 주었다.




그 날로부터 일 년이 흘렀다. "집에 돈이 좀 많나 보구나"라는 말을 들었다. 서운했고, 안타까웠고, 마음이 아팠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내가 부정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노력도, 부서질 듯한 마음을 붙잡고 끝까지 버텨냈던 그 시간들도 한꺼번에 외면당한 것 같았다. 앞으로도, 그래, 앞으로도 나는 이런 일들을 숱하게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내가 결정한 길을 걸어 나간다. 그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여기까지  길에 어떤 고난과 모험과 위기를 만났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오랫동안 걸어왔는지도 모른다. 모든 여정과 우여곡절을 아는 이는 나뿐일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나는 숱하게 오해의 시선을 받을 것이다. 그것이 참 서운했다.


엉뚱하게도 그분께 있어서 나는 공부에 대한 한을 부각시킨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는 그분께서 "집에 돈이 좀 많나 보구나"라고 말씀하실 때의 그 눈빛과, 방송통신대학교라는 학력과,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았을 그 중국어 발음을 토대로 그분을 유추해 본다. 아마도 그분은 나와 다른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나와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분은 나를 그 분과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하셨고 그로 인해 아파하셨다. 그것이 나는 안타까웠다.


대학원에 합격했지만 장학금이 확정되지 않았던 그 시간. 내 꿈이 눈 앞에서 아른거리지만 신기루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어 아득했던 시간. 그 신기루가 연기가 되어 날아가 버릴까 봐 얼마나 발을 동동 굴렀던가. 돈이 아쉬워 꿈을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는 압박감에 맞서기 위해 얼마나 이를 악물었던가. 그래서 나는 마음이 아팠다.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의 팔 할은 운이었다. 나는 노력을 내세우고 싶지 않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여기에 오지 못한 이들은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나만큼, 혹은 나보다 노력한 이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단지 운이 좋지 않아, 상황이 맞지 않아, 기회가 오지 않아 공부를 계속하지 못한 이들이 있을 뿐이다. 그 마음을 알기 때문에, 외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학생을 마주하면 돈에 대한 생각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그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나도 함께 마음이 아팠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이 이야기는 이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하고 묻힐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나를 오해하게 될 것이다. "돈 많은 집 여자 아이. 그래서 외국에서 공부를 계속 하지." 그 왜곡된 나의 이미지가 공부에 대한 아쉬움을 지닌 누군가를 또 아프게 할 것이다. 나 역시 또 서운해하고 안타까워하고 함께 마음 아파할 것이다. 내 온 힘을 다해 그것을 막아내 보고 싶다. 그래서 이 글을 썼다.


그리고 어쩌면 이 세상 어딘가에 10년 전의 나, 1년 전의 나와 같은 그 소녀가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패배가 습관이 들어 얼룩진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그 불행한 소녀에게, 어쩌면 이런 미래가 너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넌지시 알려주고 싶었다. 거기서 멈추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앞으로 계속 나아가 보라고 북돋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또한 이 긴 글을 썼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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