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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 therapist Nov 01. 2021

엄마가 되기 싫었던 날

왜 그랬을까?

20여 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된 것을 알고 참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나는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첫애를 맞이 했다. 불임이 많아진 요즘 임신은 무조건 축복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어떤 가정에겐 느닷없이 닥친 귀한 손님 같을 때가 많다. 우리 집은 아직 이렇게 귀한 손님을 맞이할 여유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데  갑자기 닥친 너무 귀한 손님, 그러니 무작정 내칠 수도 없어서 난감한 상황을 맞이하는 가정들이 꽤 있으리라.


나에게도 큰 딸이 그랬다. 남편과 결혼을 했지만 우리는 정말 빈털터리 청년들이였다. 결혼 후에도 계속 공부를 하고자 마음을 먹고 있었기에  우리의 자녀계획은 3-4년 뒤 이야기였다. 그러나 큰 아이는 정말 갑자기 찾아왔고 그때부터 나는 예상하지 못했던 엄마라는, 난생처음 해보지만 절대로 쉽지 않을 거 같은 내 삶의 또 다른 챕터를 준비해야 했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기에 그래서 결혼을 하고도 바로 자녀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나의 환경과 모든 여건이 완벽하게 준비되면 아이를 낳고 싶었다. 그런 나의 계획이 이행되진 못했지만 좋은 엄마가 되고픈 그 간절한 열망은 아이를 임신한 순간부터 나를 비장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큰 애를 임신하고 쭉 좋은 엄마가 될 줄 알았다. 내 간절함이 너무 컸으므로.


그리고 아이가 2-3살쯤 될 때까지는 나는  딸의 엄마인 것이 너무 행복했다. 딸을 위해 뭐든 해줘도 힘들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무소불의 절대권력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도 신기했고 내가 딸을 사랑해 주는 것만큼 나를 사랑해 주고 애정을 베푸는 딸이 한없이 고마웠다. 내가 주는 사랑도 컸지만 아이가 나에게 주는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렇게 나는 딸에게 좋은 엄마가 영원히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자아가 생기고 내 뜻에 반하는 행동과 기질을 보이면서 아이가 미워 보이기 시작한 적이 있었다. 그땐 나에게 " 엄마~"라고 부르는 그 소리 마저 싫었다. 아니 엄마라는 단어가 너무 싫었다.  그 엄마라는 소리에 마음 안에서 분노가 솟구치던 적도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아이에게 다정한 눈빛 따뜻한 말이 나갈 리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남들은 엄마가 되고 싶어서 그 힘들다는 불임치료에 시험관 시술도 몇 번씩 하면서 부모가 되길 바랬던 주변의 많은 부부를 보면서 혼자 너무 배부른 푸념이라는 생각도 했다가, 딸아이를 냉정하게 대하는 나의 태도에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가 또 엄마라는 소리에 화가 났던 날들이다. 한마디로 그 당시 나는 지극히 평범한 30대 초반의 주부였으나 나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 파도가 들이쳤다 빠졌다를 반복했던 날들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이 마음을 말할 수 없었다. 모성애도 없는 나쁜 사람이 될 것 같기도 했고, 당시 내가 느끼는 혼란스런 감정의 이유를 전혀 알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엄마라는 말이 그토록 싫었을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나는 딸아이처럼 엄마라는 존재가 편하지만은 않았다. 엄마에게 징징거리거나 무언가를 요구하기보다는 엄마를 힘들지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더 많이 했으니까. 나는 해보지 않았던 것을 요구하는 딸이 예뻐 보였을 리 없었다. 알아서 너무 일찍 철들어 버린 나는 오히려 정작 딸아이의 고집과 요구를 들어줄 여유가 없는 경직된 어른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엄마가 되기 전에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면서 나의 꿈을 최대한 빨리 이루고 싶었다. 그러나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내가 원하는 속도를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아마 그땐 딸이 내 발목을 잡는 족쇄처럼 느껴진 적도 있었다.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나는 엄마보다는 다른 것이 먼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세상으로 부터 인정받고 싶었다. 때문에 아마도 00의 엄마라는 말이 참 싫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엄마는 그 무엇보다 아이가 우선이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이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내가 원하는 양육과 가치를 심어주면 아이는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완벽하게" 커갈 줄 알았다. 고작 26살의 철없는 엄마는 내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는 하얀 도화지일 것이라 착각했다. 그래서 내가 그리고 싶은 데고 마음대로 그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아이는 하얀 도화지가 아니었다. 이미 그 아이는 가지고 있는 색깔과 모양이 있었고 그것은 내가 바란 것이 아니었다. 나와 기질이 너무 달랐고 내가 하지 않던 행동을 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거부하는 딸을 보며 나는 당황했다. 그런 딸아이의 기질을 띁어 고쳐보려 애를 쓰면 쓸수록 아이와 사이만 더 나빠져 갔다. 그리곤 딸은 내가 원하는 딸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과 덕분에 나 또한  내가 원하던 좋은 엄마는 절대로 될 수 없구나 하며 좌절했다. 내가 바라던 엄마가 되지 못한다면 엄마가 무슨 의미가 있나라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엄마라는 말이 참 싫었던 것 같다. 엄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 같아 보였으니까.


나는 좋은 엄마가 되고픈 열망이 컸지만 사실 엄마가 뭔지도 모르고 엄마가 되었다. 아니 엄마가 되고픈 바람보다 주변에 인정받는 다른 무언가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었던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미숙했고 힘들었고 아팠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많이 컸다. 아이와 함께 내 상처를 들여다 보고 나의 미성숙함과 철없음을 다루고 인내심을 키우며 그렇게 조금씩 진짜 엄마가 되어갔다. 그래서 이젠 엄마라는 말이 좋다. 이 아이들이 아니였으면 어쩌면 나는 지금의 모습이 아니였을 테니까. 나를 나되게 만들어준 세 아이에게 항상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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