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공부를 그리 잘하지 못했다. 아니 그냥 지극히 평범했으나 잘난 오빠 덕분에 더 못하게 보인 것 같기도 하다. 오빠는 아이큐는 좋은데 수업시간에 집중을 못한다는 이유로 어머니는 학교에 종종 불려 가셨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깨우치는 영리함에 재미를 붙인 어머니는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미리 한글도 깨쳐주고 스스로 책을 읽을 줄 알게끔 까지 만들었다. 요즘 같은 시대의 이 정도의 선행학습은 다들 하는 것이라 여길지 모르지만 1980년대 초였던 당시, 한글을 완전히 깨쳐서 오는 아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니 책까지 읽을 줄 알았던 오빠는 학교 수업이 너무 재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엄마의 후회는 내 차례에 또 시행착오를 낳았다. 2년 뒤 내가 학교를 입학할 때는 아예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보낸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라며.. 그러나 배우는 게 느리고 소심했던 나는 학교 수업을 따라가는데 한참 애를 먹었다. 거기다 부모님의 부부싸움과 고부갈등이 있던 날이면 나는 수업에 전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혹시 집을 나갔을까 봐.. 늘 언젠가 이 집구석을 떠난다고 했던 어머님의 결정이 혹시 오늘일까 두려워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집안에서 영민한 오빠와 비교하며 바보 겨우 면한 존재로 취급받았던 나는 나에 대한 확신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하루 종일 문제집을 쳐다보고 연습장에 동그라미를 수백 번 쳐가며 공부를 해도 성적은 오르지 않았다. 늘 내 마음속엔 " 이렇게 해도 안될 거야.. 시험 치면 다 잊어버리고 말 꺼야.. 나는 바보니까. " 이런 마음속의 주문은 늘 오빠보다 책상 앞에 오래 앉아 공부를 해도, 연습장을 다 채울 만큼 빼곡하게 외우고 또 외워도 매번 성적은 더 안 좋았다. 그런 이유로 부모님은 더더욱 확신했다. 확실히 오빠보다 공부머리가 없고 아이큐가 나쁘다며... 그렇게 나의 주문은 점점 확신이 되어갔다.
그런 내가 너무 싫었다. 미술도 안된다는 부모님 앞에 내가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런 내 성적에 아버지도 그냥 상업고등학교나 가서 돈이나 일찍 벌어오라 말씀하시곤 했다. 그리고 나도 그게 내 미래이구나 낙담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다행히 나를 상업고등학교로 진학시키시는 않으셨고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 당시 한국의 고등학교 생활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공부 빼고는 아무것도 의미 없는 삶이었다. 그리고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나 같은 학생에겐 더더욱 절망스러운 학교생활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 가지 숨통이 트이는 순간은 교회생활이었다. 작은 개척 교회였지만 비슷한 또래의 학생들이 8-10명 정도 모인 교회에서 주일날 만나 찬양도 하고 수다도 떨며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때로는 교회가 가기 싫을 때도 있었지만 또래 아이들과 만나서 함께 노는 시간만큼은 늘 즐거웠다. 엄마손에 이끌러 억지로 가게 된 교회였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이 믿음이 생겨났다.
신앙도 없는 철없는 중고등학생들이 주일학교니 오후 찬양팀이니 하는 것을 해야 할 할 정도로 그 당시 나의 교회는 무척 작았다. 일요일 아침 일어나지 않는 몸을 일으켜 자주 오지도 않는 버스를 한 시간씩 기다려 40-50분을 가야 하는 교회가 너무 가기 싫은 적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주일학교 선생님이었고 반주자였기에 책임감이라는 명목하게 억지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울며 겨자 먹기로 다닌 어느 날, 나에게 깨달음이 왔다. 늘 내가 무엇인가 이 교회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는 자만심으로 가득 찼던 나를, 하나님께서 그렇게라도 나를 교회로 이끌고 계셨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사랑이라는 것을 한 번도 피부로 느껴보지 못했던 나는, 내가 존재하기 전부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셨다는 것이 믿어지기 시작하면서 달라졌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나도 뭔가 보답을 하고 싶었다. 그 당시 학생 신분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었고 대학을 가서 하나님께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 그러나 나에게 수능시험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년 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사실 그전까지 나는 부산 주변의 4년제 대학도 갈 수 있을지 의문인 성적이었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다행히 부산 인근 4년제 대학에 수시로 합격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실력으로 4년제 대학을 들어간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라 믿었고 대학교에 가선 더 하나님을 찾았다. SFC라는 대학교 기독교 동아리에 참여하며 열성적인 멤버가 되었다. 학교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매일 같이 학교 동아리에서 QT와 기도로 시작했고 기숙사가 닫기 전 기숙사에 남은 멤버들과 늘 찬양과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같은 학년 동기들과 선배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고민을 나누고 기도하고 함께 공부하던 그 모든 시간들이 너무 좋았다. 나의 깊은 우울과 화를 삐뚤어지게 표출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대학시절 공동체 생활과 믿음 생활 덕분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내 재능을 알아주고 나를 예뻐해 주고 고민을 들어주는 신앙의 동기와 선배들과 함께 울고 웃으면서 대학교 4년이 참 행복했다. 그리고 그렇게 행복해지자 꿈이 생겼다. 특수교육 선생님이 되어야겠다고.. 그래서 내가 받은 사랑을 아이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그렇게 꿈이 생기고 내 인생의 큰 챕터가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미국으로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사람에게 상처 받은 사람들은 쉬 고립되려고 한다.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상처도 버겁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이상의 상처나 거부는 너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사람들 사이에서 회복되어야 한다. 사랑받고 사랑을 주는 연습은 절대로 혼자서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그 시절 믿음의 공동체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땠을까 가끔 상상해 본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의 이 모습은 아니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