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대학원, 진짜 미국에 살다.
고생은 성장의 원동력
남편의 지지와 응원 덕분에 나는 내 평생 한이 되었던 미술공부를 원 없이 했다. 특수교육 대학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내 원래 꿈이었던 그림을 시작했다. 호기심으로 들어간 첫 미술 수업에 교수님의 칭찬과 관심에 흥분한 나는 주저 없이 진로를 바꾸었다. 이제 부모님의 동의나 허락 따위는 필요 없었으므로..
그렇게 아이 둘을 낳고 키우며 미술대학원까지 졸업했다. 그림을 그리고 배우는 시간은 너무 행복했지만 그림은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주변에 알게 모르게 가정으로부터 상처 받는 아이들을 보며 그림으로 상담을 하는 미술치료에 관심이 생겼다. 그렇게 나는 또 무모하고도 용감하게 미술치료/ 가족 치료학과 대학원으로 진학을 했다.
그때 당시 셋째 막내를 낳고 백일밖에 되지 않은 상태로 입학을 했다. 미국에 산지 그래도 10년이 넘었으니 영어가 나름 익숙해진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대학원 첫 수업에 나는 그야말로 멘붕이 왔다. 상담대학원은 그야말로 토론과 발표 그리고 질문으로 가득 찬 수업이었다. 한마디로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해서 학생들끼리 가르쳐주는 수업방식이 대부분이었다. 대부분이 네이티브 미국인들이었고 나같이 영어가 서투른 사람은 정말 한 반에 한두 명일까 말까 했다. 그 안에서 나는 정말 벙어리 아닌 벙어리가 되는 것 같았다.
나의 소심한 아이가 다시 발동하면서 나는 다시 움츠러들었다. 아이 셋을 데리고 대학원을 마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고 너무 두렵고 무서웠다. 그러나 돌이키기엔 너무 먼길을 온 것 같았다. 남편이나 가족들이 "이제 그만해라. 애셋 데리고 그 나이에 무슨 공부냐?"라고 해주길 바랬다. 그 핑계로 정말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 주변엔 나를 응원해 준 대학원 친구와 남편, 지인들의 열렬한 지지만 있었다. 나는 정말 울며 겨자 먹기로 한 학기 한 학기 사선을 넘듯이 보냈다. 정말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것이었고, 언어는 되든 안되든 몸으로 부딪쳐야 한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상담대학원을 가기 전까지 나는 미국에 살았어도 미국에 살지 않은 듯한 삶을 살았다. 대부분 한국 커뮤니티를 이용하고 만나는 사람들도 거의다 한국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영어라고 해봐야 대학교 다니면서 듣던 수업시간, 아이들 학교 그리고 간혹 가는 병원이나 공공시설을 이용할 때뿐이었다. 그리고 그전에 듣던 미술 수업들은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대부분이었서 말을 할 필요가 많이 없었다. 그러니 10년을 넘게 살아도 영어는 그다지 늘지 않았다.
그래 이번 학기만 해보자
그러나 상담 대학원에선 영어를 피할 수가 없었다. 수업시간 내내 토론하는 것은 물론이고 매 수업마다 발표 준비를 해야 했고 졸업을 앞두곤 1년 동안 학교에서 아이들을 상대로 실습을 하고 졸업 전에 논문도 써야 해야 했다. 10년을 넘게 살았어도 이민사회 변두리에서 살다가 진짜 미국 사회로 들어온 것이다. 날마다 장애물 경기를 하는 느낌으로 매일 끊임없이 나의 불안과 한계를 넘어야 했다.
그 당시는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대학원 진학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누가 시키지도 않는 공부를 괜히 시작해 엄마 노릇도 아내 노릇도 못하고 공부도 제대로 못하는 그야말로 루저 중에 루저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요즘 흔히 말하는 그냥 "존버"했다. "그래 일단 이번 학기만 마쳐보자. 그리고 안되면 자퇴를 하던지 휴학하자"며 매 학기 그렇게 나를 달래며 하루하루 한 달 한 달을 주어진 할당량을 마쳤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4년 후에 졸업을 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하는 것이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일 수도 있었겠지만, 나에게 인생에서 정말 거대한 산을 넘은 것 같았다. 절대로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산을 넘고 보니 얹은 게 너무 많았다. 영어라는 언어의 장벽도 넘었고 나름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에 능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인간에 대한 이해와 폭이 훨씬 깊어지고 넓어졌다. 나아가 상담가의 기본인 경청하고 소통하는 방법은 가정에서도 밖에서도 너무나 유용하게 이용되었다.
가장 큰 소득이라 치면 사실 글쓰기이다. 미국의 수업방식은 글을 쓰고 정리하는 하고 말을 하는 법을 배우기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이 능력이 있어야 비판적 사고와 논리적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원을 다니는 사람 정도라면 이런 비판적 사고는 기본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 미국 교육의 방침이다. 그러다 보니 수업방식도 창의적이고 비판적이 생각을 하게끔 체계화되어있다. 나 또한 그 훈련을 4년 동안 독하게 받았다. 주입식 공부에 익숙했던 나는 그 당시에는 머리를 쥐어 띁으며 밤잠을 못 자며 괴로웠지만, 지나고 보니 그때 그렇게 고통스럽게 배운 글쓰기가 지금 이렇게 이 자리까지 오게 한 밑거름이 된 것이다.
대학원 과정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안주하던 나를 과감히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밀어주었다. 이 시간이 없었으면 나는 여전히 미국 속에 있는 한국에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가정 안의 울타리에서 안정과 편안함 만을 추구하면서. 블로그니 브런치니 책을 써볼 생각 등은 아예 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십 년 전 미국으로 오면서, 내가 미국에 살면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고 영어로 상담하는 상담가라 되거나 책을 쓰고 싶은 작가가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 당시 내가 생각한 가장 큰 그림은 유학만 빨리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특수교육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지금 나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능력을 펼치며 살고 있는 중이다. 그건 내가 특별히 능력이 많아서가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도전이나 어려움을 피하지 않은 결과라 생각한다. 어린아이들은 고난과 어려움을 피하려고만 하고 불평한다. 그러나 진짜 어른은 알고 있다. 고난과 도전 앞에서 자신의 진짜 능력이 나온다는 것을. 그래서 진짜 어른은 상황과 환경을 비난하기보다 주어진 일에 묵묵히 최선을 다한다.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고 자신을 알아가는데 고난과 역경만큼 사실 좋은 것은 없다. 인간은 고난과 어려움 앞에서 자신의 진짜 모습이 보이고 진짜 실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안정에 집착한 삶은 어쩌면 자신의 진짜 자아를 만나본적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의 능력을 시험에 보고 싶다면 때론 과감한 도전이 필요하다.
예전에 누군가 산을 오르는 법이라는 글을 쓴 것을 본 적이 있다. 멀리 보이는 산은 너무나 크고 멀고 험준해 보이지만 막상 산을 오르기 시작하면 함께 오르는 사람도 있고 표지판도 있어서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오를 수 있다고 했다. 나에게 대학원이 그랬다. 포기하고 싶은 하는 마음이 매 수업시간마다 들었지만 그래 이 학기만 마치고 생각해 보자며 나를 다독이고 걸어온 길이였다. 그리고 이 산을 넘고 난 후부터 다른 산들도 그리 두렵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소득이기도 하다. 그렇게 나는 산을 오르고 넘는데 능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